항일의병기념공원 전시관 전시복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548
한자 抗日義兵紀念公園展示館展示服裝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의복/의복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창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31년 - 심성지 출생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36년 - 허훈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04년 - 심성지 사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07년 - 허훈 사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0년 - 허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5년 - 심성지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6월 2일 - 항일의병기념공원 개관
소장처 청송항일의병기념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청송로 4123 지도보기
성격 의류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항일의병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청송 의병의 복식.

[개설]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및 개항기 청송 지역에서 일어났던 의병 활동과 선열들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항일의병기념공원 내에 위치한 항일의병기념관에는 개항기 당시 의병들의 활동이 기록된 『적원일기』를 비롯하여 의병장과 의병들이 실제 사용했던 무기와 의복, 기(旗) 등이 전시되어 있어, 청송 지역의 의병 활동을 다양한 영역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연원]

1895년의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비분강개한 유림과 농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창의하여 봉기하였다. 마침 국왕 고종의 애통조(哀痛詔)[팔도에 의병을 일으키라는 고종의 거의(擧義) 밀지]가 청송 지방에도 전해졌고 주변 지역의 각 의진에서 발하는 통문과 격문이 돌았다. 마침내 1896년 3월 청송 지역의 유림세력이 주축이 되어 의진을 조직하고 창의하게 되었다.

청송 지역에서는 청송과 진보에서 각각 청송의진[창의대장 심성지], 진보의진[창의대장 허훈]이 결성되어 활동했고, 주변의 안동, 의성, 경주 등지의 의진과도 협력하였다. 양반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지휘를 맡았고 농민, 포수들이 전투병으로 편제되어 의병에 참가하였다. 이천, 의성의 의진과 연합해 감은리전투에서 관군과 맞붙어 전적을 올렸고, 이후 화전등전투에서 피해를 입고 와해되어 잔존 인원들은 영해, 안동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복식]

청송의병은 지휘 체계와 신분에 따라 다른 복장과 장비를 갖추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의 지휘체계는 근대적인 군대 편제와 달리 전통적인 편제를 따라 전군(前軍), 중군(中軍), 후군(後軍)을 기본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다. 지휘부는 청송 지역의 유력한 양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휘부는 대장, 부장, 참모 등이 해당되는데 실제 전투보다는 지휘와 참모를 맡았기 때문에 양반의 평시 복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갖신을 신었으며 관모는 망건에 테가 좁은 갓을 썼다.

야전에서 의병들의 작전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선봉장과 좌익장, 우익장, 전방장, 후방장의 중책을 맡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상투 위에 망건이나 머리띠를 두르고, 흰 저고리 위에 방호를 위해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터럭갑옷을 입었다. 신발은 검은색 갖신을 신었다.

농민, 보부상 등 평민들은 실질적으로 전투를 수행했는데, 이들은 일상적인 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어 활동을 하기 편하게 했고, 머리에는 상투 위에 망건이나 머리띠를 둘렀다. 또한 미약하지만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저고리 위에 짧은 배자형의 터럭갑옷이나 두꺼운 배자를 입었다. 전투 시에는 화승총이나 활, 창과 같은 재래식 무기로 무장하였다. 의병의 복식과 장비, 지휘 체계는 신식 소총과 군복, 근대적 지휘 체계를 갖춘 관군에 비해 열악했지만, 을미사변에서 비롯된 외세의 내정간섭에 맞서 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분전하였다.

[참고문헌]
  • 청송의병사이버박물관(http://ub.cs.go.kr)
  •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http://koreaub.cs.go.kr/)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5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주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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