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25
한자 甘隱里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6년 5월 14일연표보기 - 감은리전투 시작
종결 시기/일시 1896년 5월 14일연표보기 - 감은리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감은리전투 - 경북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감은리전투 - 경북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전쟁
관련 인물/단체 김하락|김상종|심성지|구연영|신용희|김경성|조성학|김대락|정진도|오세로|윤도혁|안병룡|이경식|윤경승|이천의진|청송의진|의성의진

[정의]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靑松義陣), 의성의진(義城義陣), 이천의진(利川義陣)이 연합하여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에서 관군과 벌인 전투.

[개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 의성의진, 이천의진이 연합하여 의성연합의진(義城聯合義陣)을 결성하고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에서 관군과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의성연합의진은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등 크게 이겼다.

[역사적 배경]

의성의진의 대장(大將) 김상종(金象鐘)은 1896년 5월 10일 황산전투(黃山戰鬪)에서 크게 패한 뒤 남은 군사를 이끌고 고무곡(鈷鉧谷), 누실(累實), 공곡(孔谷)을 거쳐 5월 13일 청송으로 들어와 화목(和睦) 등지를 전전하며 청송의진 및 이천의진과 연합을 도모하였다.

한편, 이천의진의 김하락(金河洛)은 안동에서 연합의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서상렬(徐相烈)과도 결별하고, 4월 28일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金城山)과 비봉산(飛鳳山)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수정사(水淨寺)에 주둔하고 있었다. 5월 10일 김하락은 의성의진이 황산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5월 12일에는 대곡(大谷)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관군에게 쫓기며 청송으로 들어가던 의성의진의 구원 요청을 받았다. 이에 김하락은 의성의진을 따라 청송으로 들어가 대장 김상종을 만나 합세한 뒤, 관군과 대적할 준비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5월 13일 의성의진의 대장 김상종의 제의에 따라 이천의진과 청송의진이 상응함으로써 3진 연합부대인 의성연합의진이 결성되었다.

[경과]

1896년 5월 14일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는 3진 연합부대인 의성연합의진이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에서 관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이다. 의성연합의진은 관군 170여 명이 대구 방면에서 청송 화목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이천의진의 구연영(具然英)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후방에 잠복하고, 신용희(申龍熙)는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뒤 상봉에, 김경성(金敬誠)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산(城隍山) 주봉에 각각 매복하였다. 그리고 조성학(趙性學)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현(城隍峴)에 잠복하고, 김하락은 높은 지대에 올라가 각 부대를 총지휘하였다. 한편, 김상종이 거느린 의성의진은 앞선 전투의 피로 때문에 관망하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청송의진안덕면 근곡(斤谷)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날 정오 관군은 의병이 매복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안덕을 지나 성황현까지 행군해 들어왔다. 이때 의병진에서 천보총(千步銃)으로 일제히 사격을 가하자 앞서 들어오던 관군은 곧 흩어져 후퇴하였다. 이어 사방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일제히 추격하여 관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관군은 크게 무너져 앞산을 향해 도주하였다. 총을 잘 쏘는 의병 10여 명이 다시 총을 쏘아 관군 수십 명을 죽이니 관군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얼마 후 달아났던 관군이 다시 의병진을 공격하였으나 김하락은 포를 쏘아 관군의 공격을 막았다.

이때 청송의진의 중군(中軍) 김대락(金大洛), 진무(鎭撫) 정진도(鄭鎭燾), 참모(參謀) 오세로(吳世魯), 서기(書記) 윤도혁(尹道爀), 외방장(外防將) 안병룡(安秉龍), 군사(軍師) 이경식(李景植), 집사(執事) 윤경승(尹景昇) 등은 포정(砲丁) 60여 명을 거느리고 안덕면 명당동(明堂洞) 연안에 도착하여 감은리 뒷산으로 올라가 합류하였다.

청송의진, 이천의진, 의성의진의 의병들은 계속 관군을 추격하여 관군을 다수 죽였다. 이때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마침내 군대를 산 아래로 퇴각시켜 옥현(玉峴)에 유진(留陣)하였다. 관군들은 감은리에 방화하여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았고, 포성은 땅을 진동하여 그 참상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이천의진 2대와 청송의진이 파수(把守)를 보며 모든 의진은 안덕면 문거(文居)로 물러나 유숙(留宿)하였다. 관군은 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의성·신녕 등지로 물러났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결과]

감은리전투는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여 의성연합의진의 승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전투로 안덕면 감은리는 관군의 방화로 전소되는 참상을 입었다. 청송의진에서는 중군 김대락과 진무 정진도감은리로 보내 위무하였으며, 김대락은 군문집사(軍門執事) 박봉의(朴鳳儀)로 하여금 이천의진과 의성의진을 위무하기 위해 네 동이의 술을 공궤(供饋)하며 전별하였다. 이천의진과 의성의진은 안덕 신시장에 주둔하며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수습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날 오후 의성으로 회군하여 오촌동(梧村洞)에 유숙하였다. 그리고 청송의진은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의의와 평가]

감은리전투에서 의성연합의진은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청송·이천·의성 세 의병진은 조직의 독립성을 유지한 채 감은리전투를 수행하였다. 전기 의병 때 각 군에서 결성된 의병진이 추구했던 의병부대 간의 연합을 통해 크게 승리한 사례로 주목된다. 이 전투 이후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과 영덕연합의진(盈德聯合義陣)의 결성을 통해 의병진의 전투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와 영덕전투(盈德戰鬪)를 수행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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