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00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in 1592~1598)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재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8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종전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조선|일본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경상북도 청송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1597년의 제2차 침략 전쟁을 따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도 한다. 처음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명군(明軍)이 원군으로 참가하면서 7년간 조선과 명나라, 일본 사이의 동아시아 국제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우리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더 나아가 세 나라의 16~17세기 역사를 뒤흔든 전쟁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엽 조선은 정치적으론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士禍)와 훈구(勳舊) 세력과 사림(士林) 세력 간의 정쟁으로 인해 중앙 정계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1589년(선조 22)에는 당쟁(黨爭)이 격화되어 서인(西人)이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기화로 동인(東人)을 무섭게 박해하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정계는 온통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通信使)의 보고가 엇갈리자 국가 방비에 대한 노력을 접을 정도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군사적으로도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기구로 설치한 비변사(備邊司)가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등 국방 체계가 유명무실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국가 재정 역시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심지어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며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나 오히려 배척당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말부터 약 100여 년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영주들끼리 전쟁을 벌인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내란 기간 중 크게 강성해진 무인 세력은 여전히 사회의 불안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자신의 대외팽창 야욕을 채우고, 일본 안의 불안요소를 국외로 돌리기 위해 조선 침략을 꾀하여 군비 확장에 착수, 약 20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17만여 명의 육군과 3~4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여 부산으로 침입하였다. 부산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등이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일본군은 진로를 셋으로 나누어 서쪽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중앙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동쪽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각각 부대를 이끌고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제대로 된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왜군의 진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면서 전국이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백성들은 왜군의 갖은 노략질과 인면수심과 같은 만행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게 되었다.

이렇듯 전국의 대부분이 왜군의 침탈에 시달렸던 데 비해 경상도 북부에 있는 청송과 진보는 왜군의 침입 경로에서 벗어나 있음으로써 적군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미증유의 전란을 겪게 됨에 따라 청송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은 우국충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창의하여 국난극복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렇게 창의한 인사들은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거나 순절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군량과 병기 보급에 공헌하였다. 신당(新堂) 조수도(趙守道)의『임란일기(壬亂日記)』, 백운재(白雲齋) 권응수(權應銖)의『임란동고록(壬亂同苦錄)』, 지악(芝嶽) 조동도(趙東道)의『화왕산회맹록(火旺山會盟錄)』등에서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활약한 청송 지역 인사들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청송 출신으로서 곽재우(郭再祐) 의진에 참여했던 인물로는 조형도(趙亨道), 남윤조(南胤曺), 조동도, 권준(權晙), 신지남(申智男), 권소(權昭), 안윤옥(安潤屋), 권완(權腕), 김사형(金士亨), 권의립(權義立) 등이 있다.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권응수 의진에는 김몽린(金夢隣), 김몽구(金夢龜), 김몽기(金夢麒), 김성원(金聲遠), 김성달(金聲達), 김몽룡(金夢龍)이 있다. 그 외 손응현(孫應峴), 심정(沈汀), 서사원(徐思遠), 서사술(徐思述), 이응의(李應義), 이정백(李庭柏) 등은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홍중(李弘重), 최충손(崔忠孫), 최응삼(崔應參)도 다른 의진에 의병으로 참여하였다.

김응하(金應夏), 김응상(金應商), 김응주(金應周) 형제와 신예남(申禮男)은 적들의 분탕질에 단신으로 저항하다 순국하였다. 그리고 심정(沈汀), 심호(沈湖), 장후완(蔣後琬), 정운(鄭雲)은 관군 지휘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심청(沈淸)은 청송에서 동래까지 군량미와 군수물자 운반에 공을 세웠다.

[결과]

관군이 왜군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자 전국의 곳곳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창의 의병들의 의진이 속속 조직되었다. 특히 경상도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왜군에 의한 피해가 가장 큰 지역으로서 의병들의 활약 또한 가장 많았다. 이러한 경상도 지역 의병들의 활약은 전란의 피해를 막고 왜군을 무력화하여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그만큼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경상도 지역의 의진, 특히 곽재우와 권응수의 의진에 많이 참여하였던 청송 지역의 인사들도 왜군과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많은 전과를 쌓기도 했지만 희생자도 그만큼 많았다.

청송 지역 인사로서 왜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한 인물들로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김몽린, 김몽구, 김성달, 정운이 있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증직(贈職)된 손응현,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증직된 신예남이 있다. 또한 의성 사촌전투(沙村戰鬪)에서 순절한 김응하, 김응상, 김응주 3형제와, 울산 도산전투(島山戰鬪)에서 순절한 심청이 있다. 그 외에도 남윤조, 최충손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당시 청송 지역은 적들의 침입 경로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많은 인사들이 의병을 일으키거나 적극 참여하여 지역을 지키고 나아가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우국충정을 보여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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