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곡재사 소장 고전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578
한자 崎谷齋舍古典籍
이칭/별칭 기곡재사 고전적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기곡재사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가람실길 27-120[신기리 427]지도보기
발견|발굴처 기곡재사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가람실길 27-120[신기리 427]지도보기
성격 고문서
규격 홀기 11.2㎝[세로]|32.9㎝[가로], 기타 성채 고문서 15.2~30.5㎝[세로]|21.0~35.0㎝[가로]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기곡재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전적.

[개설]

기곡재사(崎谷齋舍)진보이씨 시조이며 이황(李滉)의 6대조인 이석(李碩)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당초 재암(齋庵)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40년(영조 16) 중건하였다. 1787년(정조 11)에 화재로 또 소실되었고, 1849년(헌종 15)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기 시작하여 1851년(철종 2)에 준공하였다. 제례 때 외에 문중 모임이 있을 때 집회 장소로도 이용될 뿐만 아니라 강학소(講學所), 묘제(墓祭)시 숙소로도 활용되었다. 기곡재사 소장 고전적은 이처럼 여러 형태로 활용되었던 기곡재사의 중건 및 운영과 관련된 것이다.

[편찬/간행 경위]

기곡재사는 이석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묘사(墓祀)시의 제물과 진행 절차를 기록한 「기곡묘사홀기(岐谷墓祀笏記)」가 제작되었다. 기곡재사는 별소(別所)를 두고서 묘사와 건물 중건, 중수에 필요한 자금을 준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갑인년에 별소 임원의 명단을 기록한 「기곡별소임안(岐谷別所任案)」, 별소 재원을 운용한 내역을 적은 「기곡재사별소문적(岐谷齋舍別所文籍)」 2책[계유~정축, 을미]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재사에서 묘사를 지낼 당시의 집사(執事) 명부인 「기곡재사회전시집사안(岐谷齋舍會奠時執事案)」 4책[병오~경인, 신묘~병자, 정축~병진, 정사~신미]이 남아 있어서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였던 임원과 그들을 지원하였던 인사[집사]들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임원들의 인수인계시에 제기(祭器), 전답(田畓), 추수(秋收) 내역 등을 기록한 「시도병추수급용하전장기(時到並秋收及用下傳掌記)」 4책[갑신, 계미, 을유, 임오]과 「전장기(傳掌記)」 2책[을사 10월, 을해 10월], 「신사록(辛巳錄)」 1책[신사 10월 7일]이 있다. 기곡재사의 운영 재원은 전답에서 소출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러한 전답 내역을 기록한 「기곡재사전답안(岐谷齋舍田畓案)」 1책[계축]과 이들 전답에서의 소출을 기록한 「추수기(秋收記)」 3책[신묘10월, 신축, 기축]이 남아 있다.

한편 규모 있는 목조 건물인 기곡재사는 처음 건립된 이래로 수차례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수리와 중건에는 많은 자금과 시간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자금의 마련 및 사용 내역, 일자별 공사 내역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일기(日記)와 장부로 남겼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기곡석역문적(岐谷石役文蹟)」[갑인], 「기곡재사건축시문적(岐谷齋舍建築時文蹟)」, 「기곡재사영건물력수합자손록(岐谷齋舍營建物力收合子孫錄)」[정축 11월], 「기곡재사중수시용전부(岐谷齋舍重修時用錢簿)」[병자], 「기곡재사중수시일기(岐谷齋舍重修時日記)」, 「기곡재사중수일기(岐谷齋舍重修日記)」, 「기곡재사중즙일록(岐谷齋舍重葺日錄)」, 「석역시사적(石役時事蹟)」[갑진], 「재사수리기(齋舍修理記)」[갑자]가 있다. 마지막으로 진성이씨들의 집성촌을 둘러본 후의 감회를 읊은 시 11수를 모아서 편찬한 「이촌유감운첩(李村有感韻帖)」이 있다.

[형태/서지]

기곡재사 소장 고전적은 절첩본(折帖本)인 홀기 1건을 제외한 나머지 28건은 필사본의 성책(成冊) 고문서이다. 홀기의 크기는 가로 32.9㎝, 세로 11.2㎝이며, 기타 성채 고문서는 가로 21.0~35.0㎝이며, 세로 15.2~30.5㎝이다.

[구성/내용]

기곡재사 성책 고문서는 그 성격상 크게 제향의례, 인적 구성, 경제·재정, 건물 수리 및 별소 운영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제향의례와 관련한 「기곡묘사홀기」는 정축년 10월에 후손인 이수걸(李秀杰)이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묘사시 진설도(陳設圖)와 제수(祭需), 축문(祝文) 및 제향 절차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기곡재사회전시집사안」 4책[병오~경인, 신묘~병자, 정축~병진, 정사~신미]은 묘사시 집사와 재사 임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기곡재사는 2명의 유사(有司)를 두고 있으며, 서원의 원장과 같이 재사의 운영을 총괄하는 도유사(都有司) 1인을 두고 있다. 한편, 병술년부터 문중에서 의논하여 1년에 1번 대제(大祭)를 지내기로 했는데, 봄에 지내던 묘제를 중지한 것은 그만큼 경영상의 어려움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곡재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묘제가 끝난 후 다음 묘제까지의 임원을 선발하였고, 묘제가 끝난 후에 전장기를 작성하여 인수인계를 진행하였다. 이와 관련된 「시도병추수급용하전장기」 4책[갑신, 계미, 을유, 임오]과 「전장기」 2책[을사10월, 을해 10월], 「신사록」 1책[신사 10월 7일]이 있다. 가을 묘제를 준비하는 9월 말부터 묘제가 있는 날까지 매일 재사에 나와서 준비한 인원들의 명단과 그들에게 제공된 음식의 수량, 제수 준비에 들어간 비용, 제기, 비축된 미곡의 양 등을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추수기에 묘제가 있었기에 그때 재사 전답에서 수확한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기곡재사 전답의 규모와 소출량은 「기곡재사전답안」1책[계축]과 「추수기」 3책[신묘10월, 신축, 기축]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기곡재사는 별소를 두고서 묘사와 건물 중건, 중수에 필요한 자금을 준비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 내역은 「기곡별소임안」과 「기곡재사별소문적」 2책[계유~정축, 을미]을 통해 확인된다. 한편 기곡재사는 처음 건립된 이래로 수 차례 중수와 중건이 있었으며, 이와 관련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기곡재사의 석축 기단을 쌓을 당시 작성된 「기곡석역문적」[갑인]과 「석역시사적」[갑진]이 있으며, 재사의 지붕과 건물을 수리할 때 쓴 「재사수리기」[갑자]와 「기곡재사중즙일록」도 있다. 한편 기곡재사를 대대적으로 중수할 때 작성된 「기곡재사중수시일기」, 「기곡재사중수일기」와 「기곡재사중수시용전부」[병자] 및 중건할 때 작성한 「기곡재사건축시문적」과 중건 비용을 마련한 목록인 「기곡재사영건물력수합자손록」[정축 11월]이 있다.

기곡재사가 있는 곳은 진성이씨들의 집성촌으로, 퇴계 이황의 6대조인 이석의 묘소가 있던 곳이다. 퇴계 이황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이곳을 지나는 인사들이 읊은 시를 모아서 「이촌유감운첩」을 작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문중 재사의 운영 실태 및 당시 기곡재사와 관련된 가문 및 인물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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