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564
한자 密陽朴氏敦窩公派所藏古文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862년 3월연표보기 - 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 중 박현진 등의 상서 작성
작성 시기/일시 1864년연표보기 - 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 중 박준한의 호구단자 작성
발급 시기/일시 1609년 - 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 중 박자흥 교지 발급
발급 시기/일시 1862년 윤8월 - 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 중 태학 통문 발급
발급 시기/일시 1862년 11월 - 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 중 예조 완문 발급
발급 시기/일시 1883년 정월 - 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 중 향중 완문 발급
발급 시기/일시 1904년 10월 22일 - 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 중 박상규 고신 발급
소장처 밀양박씨 돈와공파 문중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어천리 지도보기
발급처 태학[성균관] - 서울특별시
발급처 예조 - 서울특별시
수급처 박씨문중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어천리 지도보기
발견|발굴처 밀양박씨 돈와공파 문중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어천리 지도보기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박승종|박자흥|박유도|박준한|박현진|박준장|박상규
용도 증명|청원
발급자 국왕|예조|태학|향중|궁내부대신|박준한
수급자 박자흥|박준장|진보향교|박씨문중|박상규|진보현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어천리 밀양박씨 돈와공파 종중에서 소장하여 보관하고 있는 고문서.

[개설]

밀양박씨 돈와공파는 1623년(광해군 15) 돈와(遯窩) 박유도(朴維度)[1600~?]가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감곡리]에 일시 거주하다가 어천리(魚川里)로 옮겨 정착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박유도의 이주는 당시 인조반정과 관련이 깊다. 박유도의 아버지 박자흥(朴自興)은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였던 이이첨(李爾瞻)의 사위로 161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후 1611년 딸을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으로 왕실에 들이면서 광해군과 사돈이 되었다. 박유도의 할아버지는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퇴우당(退憂堂) 박승종(朴承宗)이었다.

이처럼 광해군 때에 왕실과 혼인을 맺은 당대 최고 문벌가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1623년 인조반정이 발발하면서 박승종, 박자흥 부자는 광주(廣州)에서 자결하였고, 역적으로 지목된 그들의 가산(家産)도 몰수되었다. 그로 인해 박유도의 후손들은 1862년(철종 13) 신원(伸冤)될 때까지 박유도가 박자흥의 아들임을 알리지 못하였고, 진보의 유안(儒案)에도 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소장된 고문서는 박유도의 후손들이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제작 발급 경위]

인조반정 이래로 신분을 숨기고 지내왔던 박유도의 후손들이 1862년에 자신들이 박승종, 박자흥의 후손임을 증명하고, 국가로부터 박승종 부자의 신원을 받는 과정에서 생성된 문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박자흥 교지는 밀양박씨 돈와공파가 박자흥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이를 근거로 1862년 3월부터 진보현감에게 상서를 올리는 한편, 태학(太學)에서도 이들의 신원을 요청하는 통문을 윤8월에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공론을 바탕으로 재차 현감-관찰사-예조로 이어지는 신원소를 올렸으며, 11월에 예조 완문이 성급(成給)되면서 박승종, 박자흥 부자에 대한 신원이 확정되었다. 1883년의 향중 완문 역시 박씨 가문 인사들의 신원이 예조와 태학 통문 등에서도 명확히 확인되었기에 유안에 입록하고, 후에 이에 대해 혐의를 지어서 소송할 때 증빙 자료로 삼도록 발급되었다.

[형태]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는 모두 낱장으로 되어 있다. 박자흥 교지는 세로 62.5㎝, 가로 74.6㎝이고, 1904년 박상규(朴祥圭) 고신(告身)은 세로 39.0㎝, 가로 59.1㎝로서 궁내부대신 민병석이 답인(踏印)하였다. 1862년 3월 박현진 등의 상서는 세로 112.0㎝, 가로 68.0㎝이며, 1862년(임술) 윤8월 태학 통문은 세로 45.0㎝, 가로 57.0㎝, 1862년 11월 예조 완문은 세로 97.5㎝, 가로 65.7㎝이다. 1883년[계미] 정월 향중 완문은 세로 51.5㎝, 가로 62.7㎝이며, 1864년 박준한(朴準漢) 호구단자는 세로 64.0㎝, 가로 34.7㎝이다.

[구성/내용]

1609년(광해군 1) 박자흥 교지는 박자흥을 ‘가선대부행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行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는 1609년에 박자흥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1611년 세자의 장인이 된 이후 거듭 승진하여 1621년(광해군 13) 3월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1622년 12월에 경기감사로 나가기 전까지 병조참판에 있었다. 그렇기에 박자흥의 병조참판은 사실이지만 이 교지의 날짜는 맞지 않는다. 박상규 고신은 1904년(광무 8) 10월 22일 ‘통신사 전화과 주사 8등’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으로서 궁내부대신 민병석의 답인이 있다.

1862년 3월 박현진 등의 상서는 박승종 부자에 대한 신원을 요청하는 상서이다. 박현진 등은 박자흥의 교지를 근거로 자신들이 박자흥의 아들인 박유도의 후손이며, 나아가 역적으로 몰려 자결한 박승종, 박자흥 부자에 대한 신원을 요청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사림의 공론을 끌어내기 위하여 태학에도 비슷한 내용을 청원한 것으로 보인다. 1862년 윤8월 태학 통문은 그에 대한 답변으로 후손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1862년 11월에는 예조에서 완문을 발급하여 박유도 후손들의 신분을 증명해 주었다.

1862년 11월 예조 완문은 예조에서 경상도 진보현 어천리에 살고 있는 박준장(朴準章) 등이 박승종과 박자흥의 후손임을 인증하고, 박승종 부자에 대한 신원을 확인해 주는 내용이다. 이 예조 완문을 바탕으로 박유도의 후손들은 박승종의 후손임을 내세워 진보현 유안 입록과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했다. 실제 1864년 박준한의 호구단자는 자신의 유학(幼學)으로 기재하고, 4조(祖)도 학생(學生)으로 표기하여 양반 사족의 후손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 가문과 인사들의 반대로 오랜 기간 사족들의 명부인 유안에 입록되지 못하였음이 1883년 향중 완문을 통해 확인되었다.

1883년 정월의 향중 완문은 향중에서 박씨 문중에게 발급한 것으로서 어천리에 살고 있는 박준한·박준규(朴準規)·박석래(朴碩來)·박형래(朴形來) 등이 박승종의 8세손이자, 박자흥의 7세손임이 증명되었고, 박승종·박자흥 부자가 신원되었음을 확인하고, 그 근거로서 1862년의 태학 통문, 예조의 완문 등이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들을 향교의 유안에 입록하여 조정의 은전을 받든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어떤 하나의 가문이나 한 인물이 사적인 감정으로 혐의를 씌워 소송한다면 이 완문을 증거로 삼으라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는 역적으로 지목되었던 인사의 후손들이 정치사회적 변화에 편승하여 선조의 신원과 사족으로의 지위를 회복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이용자 의견
박** 저는 청송군 파천면 어천리, 돈와공파후손입니다. 집안의 역사사료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관리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사료를 감명깊게 탐독하였습니다. 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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