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령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32
한자 長水嶺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 4월연표보기 - 장수령전투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06년 4월연표보기 - 장수령전투 종결
전개 시기/일시 1906년 4월 - 진보의진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장수령 일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 교전
발생|시작 장소 장수령전투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장수령 지도보기
종결 장소 장수령전투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장수령 지도보기
성격 의병 전쟁
관련 인물/단체 이현규|진보의진

[정의]

1906년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장수령(長水嶺) 일대에서 벌어진 진성의진과 일본군의 전투.

[개설]

1906년 4월 이현규(李鉉圭)가 이끄는 진성의진(眞寶義陣)이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장수령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하사 계급] 무토[武藤]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를 맞아 교전 끝에 격퇴시켰다.

[역사적 배경]

1905년 11월 일제는 친일 정부대신(政府大臣)들을 조종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을 노골적으로 침략하였다. 이러한 국권 상실의 위기에 직면하자 애국지사들은 이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항거하였다. 그중 가장 직접적인 투쟁 방법으로 대응한 것이 의병 항쟁이었다.

[경과]

1905년 11월 을사조약 직후 이현규, 김대규(金大圭), 신형일(申衡一), 조완이(趙完伊), 권대성(權大聲)[권이달(權理達)], 김동식(金東植) 등 수십 명의 인사들이 그해 11월 하순경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周王山) 대전사(大典寺)에 모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였다. 약 한 달 만에 300여 명이 모였고, 그해 12월 중순 울진 불영사(佛影寺)로 이동하여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모인 군사들과 함께 이현규를 안동·진보·청송·영양4군 의병대장(義兵隊將)으로 추대하고 격문을 발송하여 군사와 무기를 모집하니 그 수가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모집된 군사들을 청송 주왕산과 봉화 청량산(淸凉山)에 분산하여 훈련을 시킨 뒤, 1906년 2월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교동(橋洞) 김대규의 자택에서 의진을 편성하였다. 대장(大將) 이현규, 중군장(中軍將) 유시연(柳時淵), 도포장(都砲將) 김대규, 소모장(召募將) 신형일, 도포수(都砲手) 권대성, 집사(執事) 조완이 등으로 부서를 편성하고, 의진 이름은 진성의진이라 하였다. 의진은 곧 출진하여 청송·진보·영양·영해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성과를 일궜다.

1906년 4월 의진은 청송 방향으로 진출하였다. 진보면 장수령 입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일본군이 출현하였다. 일본군은 강원·경상 지방의 의병 소탕 책임을 맡고 있던 헌병 오장 무토와 경북지사 마쓰오[松尾]가 이끄는 부대였다. 규모는 1개 분대 10여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장 무토가 청송·진보 쪽으로 간 이유는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과 신돌석(申乭石)의 영해의진(寧海義陣) 등과 연계하여 왕성하게 활동하며 일본군을 위협하고 있는 진성의진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동시에 이를 탄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주차헌병대(韓國駐箚憲兵隊) 헌병사령관(憲兵司令官)의 지휘를 받는 헌병 오장은 군사경찰 외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 업무까지 장악하면서 정보 파악을 주된 업무로 하고 있었다.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국권 수호의 의기(義氣)로 무장한 의병진과의 전투는 단숨에 끝날 수는 없었다. 밀고 밀리는 쌍방 간의 공방전은 10여 차례를 거듭하였다. 하지만 결코 물러설 의병부대가 아니었다. 대규모의 군사와 강력한 사기와 함성으로 일본군을 남쪽으로 격퇴시켰다. 이를 장수령전투(長水嶺戰鬪)라고 한다. 이 장수령전투의 승세는 진성의진 최고의 전투인 오누지전투로 이어져 갔다.

[결과]

장수령전투는 진성의진이 일본군 헌병 오장 무토와 경상북도 지사 마쓰오가 이끄는 부대를 맞아 수십 차례의 공방전을 거듭한 끝에 일본군을 격퇴시킨 전투이다. 의진은 달아나는 일본군을 섬멸할 각오로 끝까지 추격하여 오누지전투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장수령전투는 진성의진이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장수령 일대에서 일본군을 맞아 벌인 전투로서, 국권 수호의 의기로 무장한 의병들이 우세한 화기로 무장한 일본군 정예부대를 패주하게 함으로써 그 다음에 오는 오누지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수 있게 되었다. 장수령전투는 진성의진에서 가장 빛나는 오누지전투의 실마리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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