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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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希迪 |
이칭/별칭 | 모정(慕亭),길부(吉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훈 |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창에서 활약한 의병.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길부(吉夫), 호는 모정(慕亭). 고려 시대 대제학을 지낸 양수생(楊首生)의 후손으로 양수생의 처 이씨는 남편이 죽자 남편의 홍패를 안고 개성에서 남원으로 낙향, 다시 순창으로 이주해 동계면 구미리 일대에 남원 양씨가 현재까지도 세거하게 하였다. 양희적의 아버지는 돈암공(墩庵公) 양사선(楊士選)이다. 처는 경주 김사걸(金士傑)의 딸이다.
[활동 사항]
양희적(楊希迪)[1555~1601]은 1555년(명종 10)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에서 출생하였다. 38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유팽로·양대박 등과 함께 거병(擧兵)하여 고경명(高敬命) 장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유팽로·양대박은 종사관이 되고, 양사형·이대윤·최상중 등은 군량을 모으는 모량관(募糧官)을 맡아 삼남에서 모은 군량을 금산으로 운송(運送)하였다. 정유재란 때 이언찬(李彦贊)이 의병을 거느리고 남원에 있을 때 운량장(運糧將) 박천정(朴天挺)과 함께 양곡과 군기를 공급하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뒤, 조정에서는 전공을 치하하여 종5품인 봉훈랑 내선사 판관(內膳寺判官)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601년(선조 34)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모과정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아계사(阿溪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