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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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景岳 |
이칭/별칭 | 사앙(士仰),만성(晩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훈 |
[정의]
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문관.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앙(士仰), 호는 만성(晩醒). 증조할아버지는 최식(崔寔), 할아버지는 최봉성(崔鳳成), 아버지는 최석전(崔錫銓)이다. 어머니는 이천규(李天奎)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경악(崔景岳)은 1727년(영조 3) 순창군(淳昌郡) 유등면(柳等面) 화탄(花灘)에서 출생하였다. 1759년(영조 3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주서,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충청도 수군절도사,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두루 거쳤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정조에게 ‘첫째 성학(聖學)이 드러나는 사실이 없음이며, 둘째 상하(上下)가 신뢰하는 것이 부족함이고, 셋째 군신(君臣)이 일을 맡아 함에 실제가 없음, 넷째가 인재(人才)를 거두어 쓰는 것이 부족함, 다섯째 생민(生民)을 보호하는 일의 실제가 없음, 여섯째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 부족함, 일곱째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함이 부족하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정조가 비답(批答)[임금이 상주문의 말미에 적는 가부의 대답]을 내린 바 있다. 1794년(정조 18)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뒤 1800년(정조 24)에는 남병사(南兵使)가 되었다. 1804년(순조 4)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