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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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澤林氏五世六孝旌閭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외이3길 36-2[외이리 478-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승대 |
건립 시기/일시 | 1892년 - 평택 임씨 오세 육효 정려각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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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평택 임씨 오세 육효 정려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 478-1 |
성격 | 정려각 |
양식 |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 건물 |
소유자 | 평택 임씨 문중 |
관리자 | 임병용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에 있는 개항기 평택 임씨 5대에 걸친 6명의 효자 정려.
[개설]
6명의 효자는 임시채(林時采), 임양성(林養性), 임광수(林光洙), 임종혁(林宗赫)·임종빈(林宗彬) 형제 및 임환(林煥)이다. 임시채는 선친의 묘소에서 시묘를 하던 중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큰 호랑이가 임씨를 보호하며 3년 동안 같이 묘를 지켰다고 한다. 또한 영조가 세상을 떠나니 곡을 하고 3년간 소복을 하여 순창읍에서 호세(戶稅)와 부역을 면제하고 쌀과 고기를 주어 표창하였다. 임시채의 아들 임양성은 아버지의 효를 본받아 실천하였으며, 아버지가 등창으로 고통을 받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낫게 하였다. 정조가 승하하니 집 후원에 단을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며 능이 위치한 곳을 바라보며 곡을 해 충과 효가 하나임을 보였다.
임양성의 아들 임광수는 어머니가 병고에 시달릴 때마다 꿩 고기가 먹고 싶다 하여 며칠을 두고 산속을 헤매던 중 하늘이 감동하여 내렸는지 꿩 한 마리가 스스로 날아들어 이를 잡아 봉양하였다. 아버지 시묘막이 약 3.93㎞[10리] 밖에 있는데도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식사 공양을 빼먹지 않았다.
임광수의 아들 임종혁은 아버지의 초상에 시묘를 하다가 복을 벗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아우인 임종빈이 뒤를 이어 시묘를 마쳤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유명으로 시묘를 살지 말라고 하니 매일 묘에 가서 통곡하는데, 아무리 큰 비나 눈이 와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임종빈의 아들 임환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시묘를 살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만류하여 비록 시묘는 살지 않았으나 아침저녁으로 산소에 가서 곡하기를 3년 동안 비와 바람을 가리지 않고 마쳤다.
[위치]
평택 임씨 오세 육효 정려(平澤林氏五世六孝旌閭)는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 478-1번지에 있다.
[변천]
1892년(고종 29) 임시채와 임양성이 정려되고, 1893년(고종 30) 임광수·임종혁·임종빈·임환이 정려되었다.
[형태]
맞배지붕 겹처마로 1892년 상량하여 만든 목조 건축물이다. 담장 문머리에는 ‘평택 임씨 육효 지문(平澤林氏六孝之門)’이라는 액자(額字)가 붙어 있다. 각각의 현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임시채지려 상지 29년 임진[고종 29년 1892년] 12월 일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林時采之閭 上之二十九年壬辰十二月日命旌)’, ‘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임양성지려 상지 29년 임진 12월 일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林養性之閭 上之二十九年壬辰十二月日命旌)’, ‘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임광수지려 상지 30년 계사[고종 30년 1893년] 4월 일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林光洙之閭 上之三十年癸巳 四月日命旌)’, ‘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임종혁지려 상지 30년 계사 6월 일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林宗赫之閭 上之三十年癸巳六月日命旌)’, ‘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임종빈지려 상지 30년 계사 6월 일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林宗彬之閭 上之三十年癸巳六月日 命旌)’, ‘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임환지려 상지 30년 계사 6월 일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林煥之閭 上之 三十年癸巳六月日命旌)’
[현황]
지반이 약하여 건물이 왼쪽으로 약간 기울었고 단청이 퇴색하였다. 2009년 현재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 평택 임씨 후손 임병용이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