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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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昌鄕校內碑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교성1길 13[교성리 134-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진돈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교성리에 있는 조선 시대 및 근현대에 세운 비.
[위치]
순창 향교는 순창 버스 터미널에서 서쪽 장류로를 따라가다 옥천교를 넘어 바로 좌회전하면 작은 산 밑에 있다. 순창 향교 외삼문을 통과하면 명륜당이 나오는데, 명륜당 북쪽 담 벽을 따라 순창 향교 내 비석 떼가 일렬로 서 있다. 그리고 명륜당 뒤편에도 비석 떼가 있는데, 2013년 3월경 옛 순창 여고의 비석 떼와 순창군 관아 지역의 비석 등을 이 곳으로 옮겨 어귀에서 담장 너머로 볼 수 있게 하였다. '순창 군수·전라 관찰사 청백비군'이라는 표지판을 세워 선정비 주인공의 명단을 기록하고 연대순으로 모셨다.
[형태]
순창 향교 명륜당 북쪽 담 벽에는 명륜당 중건비, 순창 향교 이건비, 흥학비 등 6기의 비가 있다. 왼쪽부터 5기는 개석(蓋石)이 연꽃 봉오리 모양이다. 왼쪽에서 첫 번째 비는 거북 좌대(座臺)가 있으며, 비신은 55×15×132㎝이다. 두 번째 비는 57×14×111㎝이고, 이수(螭首) 부분이 사각형이며 연꽃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세 번째 비는 이수가 두툼한 편이며 크기는 53×14×100㎝이다. 네 번째 비는 연꽃 모양 이수가 있으며 비신은 52×12×85㎝이고, 성혈이 있다. 다섯 번째 비는 이수 부분에 연꽃 모양이 확실히 나타나며 비신은 57×12×106㎝이다. 여섯 번째 비는 월석으로 된 모양의 화강암 재질이며 크기는 48×21×133㎝이다.
명륜당 뒤편의 옛 순창 여자 고등학교와 순창군 관아 지역에서 옮겨 온 비석 떼는 12기로 모두 화강암이며 월석 형태이다. 가장 앞에 순창 군수 최온의 청백비, 세 번째 관찰사 이서구의 영세 불망비, 열한 번째 참봉 김창식의 휼민 시혜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의 크기는 최온 청백비 비신(碑身) 높이 145㎝, 너비 54㎝, 두께 20㎝이고, 이서구 영세 불망비 비신 높이 172㎝, 너비 58㎝, 두께 24㎝이다. 김창식 휼민 시혜비는 비신 높이 114㎝, 너비 43㎝, 두께 16㎝이다. 김창식 휼민 시혜비는 좌대(座臺)와 비신, 개석(蓋石)을 갖추고 있다.
[금석문]
순창 향교 명륜당 북쪽 담 벽의 비석들은 석질이 사석이라 문자를 해독할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좌측 첫 번째는 순창 향교의 내력을 적은 비석으로 윤종지(尹宗之)[재임 1659~1662]가 순창 군수로 재임할 때 향교를 이건한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순창 향교가 옥천동에 있었는데, 1662년(현종 3) 윤종지가 길지를 택하여 자신의 녹봉을 들여 공사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마무리하여 이건하였다. 당시 이 일은 진사 설관도(薛貫道)와 유학 박재(朴梓)가 진행하였고, 향리 임희우(林希雨)가 감독을 맡았다. 이를 추진한 윤종지의 명성이 묻히지 않도록 이를 돌에 새겨 세운다는 내용이다. 건립 연도는 1671년 11월 4일이다.
좌측 세 번째 비석은 두전(頭篆) 부분에 전서로 ‘명륜당 중수비(明倫堂重修碑)’라 적혀 있고 바로 밑에는 해서로 음기(陰記)를 썼다. 여섯 번째 비석은 해서로 ‘군수 조후 중관 흥학비(郡守趙候重觀興學碑)’라 썼으며, 공적 내용을 전면에 기록하였다. ‘유화비신 인문함위(儒化丕新人文咸尉)’, 즉 군수 조중관이 유학으로 사람들을 교화시켜 크게 혁신하였다는 내용이다. 을사년 간지가 있어 1905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비석들은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명륜당 뒤 편의 최온 청백비에는 ‘최후 온 청백비(崔侯薀淸白碑)’와 ‘정축(丁丑) 7월’이라는 간지가 있어 정축년[1637]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순창 군수 최온(崔薀)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당시 옥과 현감 이흥발, 대동 찰방 이기발, 전 찰방 백석 유즙(柳楫), 전 한림(翰林) 양만용(梁曼容)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여산(礪山)의 모의소에서 다른 의병단과 합류한 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진격하였고, 청나라와 화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최온은 아버지가 이조 판서에 추증된 최상중이고 아들은 최유지인데, 이들은 성리학을 독실하게 연구하였다고 한다.
이서구 영세 불망비는 전면에 ‘관찰사 이상공 서구 영세 불망비(觀察使李相公書九永世不忘碑)’와 ‘을유년’[1820]이라는 간지가 있다. 이서구(李書九)는 전라도 관찰사를 두 차례 지냈는데, 1793년(정조 17) 부임하여 2년간 재직한 뒤 1820년(순조 20)에 재임하였다. 순창에 세워진 비석은 두 번째 왔을 때 세운 공적비로 볼 수 있다. 이서구는 전라도 관찰사 시절 숱한 기적과 야사를 많이 남겼으며,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회자된다. 참봉 김창식 휼민 시혜비(參奉金昌植恤民施惠碑)는 간지가 없으나 조선 후기로 추정할 수 있다. 공적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글자가 많이 마모되었다. 일부를 해석하면 “하늘에 가뭄이 들면 단비를 내려 주듯 하고, 겨울을 버리고 따뜻한 봄을 맞도록 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순창 군민들을 위하여 많은 선행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현황]
순창 향교 명륜당 북쪽 벽의 구비(舊碑) 옆에는 새로 조성된 신비(新碑)들이 있는데, 제목을 살펴보면 ‘부지사 이해권 기적비(副知事李海權紀績碑)’, ‘전 순창 군수 허공 승만 송덕비(前淳昌郡守許公承萬頌德碑)’, ‘경초 경주 김공 종만 헌성 기념비(耕樵慶州金公種萬獻誠記念碑)’, ‘유당 제주 고공 석진 공적비(惟堂濟州高公錫鎭功蹟碑)’, ‘전 전교 최공 사현 기적비(前典校崔公四鉉紀績碑)’, ‘예촌 양효섭 회장 공적비(禮村楊孝燮會長功績碑)’, ‘전교 순창 설공 창남 공적비(典校淳昌薛公昌南功績碑)’, ‘운보 경주 김씨 광욱 공적비(雲寶慶州金氏光旭功績碑)’ 등이다.
명륜당 뒤 ‘순창 군수 전라 관찰사 청백비군’ 12기를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군수 최후 온 청백비(郡守崔候薀淸白碑)[1637], 군수 이후 유겸 혜민 선정비(郡守李候有謙惠民善政碑)[1639], 관찰사 이공 서구 영세 불망비(觀察使李公書九永世不忘碑)[1820], 군수 김후 온순 유혜 선정비(郡守金候蘊淳遺惠善政碑)[1865], 효자 한공 해오지비(孝子韓公海晤之碑)[1869], 군수 조후 태영 청백 선정비(郡守趙候台永淸白善政碑)[1874], 군수 홍후 기주 유혜 선정비(郡守洪候岐周遺惠善政碑)[1875], 관찰사 이상공 헌직 휼민 선정비(觀察使李相公憲稙恤民善政碑)[1886], 군수 민후 영직 애민 유혜비(郡守閔候泳稷愛民遺惠碑)[1888], 군수 윤후 병관 휼민 선정비(郡守尹候秉觀恤民善政碑)[1889], 참봉 김창식 휼민 시혜비(參奉金昌植恤民施惠碑)[연대 미상], 군수 김영순 공적비(郡守金榮珣功蹟碑)[1957~1959].
[의의와 평가]
순창 향교 내에는 명륜당 중건비, 순창 향교 이건비, 흥학비, 선정비 등 조선 시대부터 개항기를 거쳐 현대까지 조성된 여러 비석들이 있다. 이 비들은 현재 글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마모되었지만 기나긴 순창의 역사를 보여 주는 산물이다. 순창 향교와 함께 관심과 보존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