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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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福興面魚隱戰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숙정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8년 6월 20일[음력] - 복흥면 어은 전투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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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09년 12월 23일 - 복흥면 어은 전투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
성격 | 의병 항쟁 |
관련 인물/단체 | 신보현 |
[정의]
1908년 6월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에서 의병장 신보현 부대가 일본군과 벌인 전투.
[개설]
일제는 조선을 완전히 집어삼키기 전 의병들을 먼저 소탕하고자 했다. 특히 전라도 지역은 의병들이 무수히 많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일본군은 크게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의병 활동은 시기적으로 볼 때 1895년의 을미 의병, 1905년의 을사 의병, 1907년의 정미 의병으로 나누어지는데 뒤로 갈수록 기세가 점점 커져 갔다. 이 중 복흥면 어은 전투는 정미 의병 시기에 포함된다.
[역사적 배경]
정미 의병은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을 계기로 일어났다. 경찰권이 일제에 넘어가고 군대가 해산되었는데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며 그 영향력이 커졌다. 결국 일본은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시행하여 의병들을 진압하고자 했다.
[경과]
신보현(申甫鉉)[1868~?]은 1907~1909년에 순창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한 의병장으로, 주로 순창을 중심으로 장성, 담양, 임실, 정읍, 태인, 고부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8년 음력 6월 20일 석양에 신보현은 부하 김만룡(金萬龍) 등을 이끌고 화승총을 휴대하여 복흥면 어은동에 이르렀다. 조용한 곳으로 금방동(金方洞) 동장을 불러들여 의병이라 밝히고 식사를 조달해 달라 하여 부하 100명분의 식료를 받아냈다. 동민들의 협조를 바탕으로 신보현 부대는 일본 군경을 상대로 순창군의 산세를 이용하여 유격전을 벌였다. 싸움의 전개 과정이나 승패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과]
신보현은 1909년 12월 23일 정읍군 동면 석계촌(石溪村)에서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순창군 복흥면 어은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주민들이 의병의 전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