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585
한자 薪城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09월 21일연표보기 - 신성전투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07년 09월 22일연표보기 - 신성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신성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영일군 죽장면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성격 의병 전쟁
관련 인물/단체 서종락|산남의진

[정의]

1907년 9월 21일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서 벌어진 의병 전투.

[개설]

신성전투(薪城戰鬪)는 1907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 추석 전날 밤 추석 명절을 보내기 위해 고향에 들어온 산남의진의 청송 지역 유격대와 일본군이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건너 추강마을에서 벌인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1907년은 의병 전쟁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되는 시기로 7월 19일 고종의 강제 퇴위와 7월 31일 한국군대(韓國軍隊)의 해산으로 말미암아 위기의식은 한층 가중되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의병 진압을 전담하였고, 해산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하였다. 산남의진에는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봉장 이세기(李世紀), 유격장 임중호(林中虎), 장영집사 김진영(金震榮) 등이 청송 출신으로 편성되었다. 곧이어 산남의진의 청송 지역 유격대가 편성되고 유격장에 청송 출신 서종락(徐鍾洛)이 임명되어 청송 지역의 활동 책임자가 되었다. 1907년 8월 이후 우재룡(禹在龍), 김성일(金聖一), 조선유(趙善裕), 김치현(金致鉉), 은순택(殷淳澤) 등 수십 명의 진위대(鎭衛隊) 군인들이 산남의진에 투신하였다.

당시 산남의진의 목표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 진공 작전 참여였으나 8월 하순까지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산남의진은 신돌석이 관동지방으로 진출하여 서울 진공 작전에 쉽게 참가할 수 있도록 배후의 일본군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우선 산남의진은 경상북도 포항·흥해·청하 등을 공략하고, 청송·신령 등지를 거쳐 9월 10일[음력 8월 3일] 영천 자천으로 들어갔다. 그 후 산남의진은 안동으로 들어가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청송 노구재를 거쳐 청송 안덕으로 들어갔다. 이때 산남의진은 일본군이 청송읍에서 안덕을 향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과]

신성전투는 1907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 추석 전야에 있었다. 일본군은 의병들이 추석 명절에는 차례를 지내기 위해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추강마을 뒷산에 매복하였다. 14일 저녁 이 사실을 알고 저녁에 안덕 신성에 도착한 산남의진의 의병은 부대를 3대(隊)로 나누어 진을 쳤다. 의병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본군을 3대로 포위하고 혈전을 전개하였다.

안덕면 신성 1동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추강 마을 뒷산이 산남의진신성전투가 전개되었던 격전지이다. 신성1동 앞으로 추강이 흐르고 그 앞에 무당산이 있으며, 그 옆으로 개[犬]가 누워 있는 형국의 개산이 바로 추강마을 뒷산이다

[결과]

신성전투에서 파수 이치옥(李致玉)이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때마침 몰아치는 폭풍은 화승총을 사용해야만 했던 의병의 전투력을 반감시켰기 때문이다. 의병은 포위를 풀고 영일군(迎日郡) 죽장(竹長)으로 들어갔다. 신성전투 이후 산남의진은 영천 자양전투(紫陽戰鬪)와 검단전투(檢丹戰鬪), 그리고 영일군 죽장의 입암전투(立巖戰鬪) 등에서 수차례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의병장 정용기(鄭鏞基)가 입암전투에서 전사하자 산남의진의 북상계획도 미뤄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성전투는 1907년 5월 재기한 산남의진의 정용기가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한 북상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군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산남의진 청송유격대가 치른 전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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