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562
한자 金大洛
영어공식명칭 Kim Daerak
이칭/별칭 학원(學源),만송(晩松)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1년연표보기 - 김대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3월 - 김대락 청송의진 참모 및 중군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김대락 김해부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05년 10월 01일연표보기 - 김대락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05년 - 김대락 병마절도사 증직
추모 시기/일시 1997년연표보기 - 김대락 건국포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896년 5월 14일 - 감은리전투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86년 7월 20일 - 화전등전투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활동지 청송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개설]

김대락(金大洛)[1851~1905]은 1896년 3월 청송의진(靑松義陣)의 참모(參謀) 및 중군장(中軍將)을 역임하였으며, 중군장으로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에 참여하여 크게 이겼다. 해산 이후 상경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여 융릉참봉(隆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후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학원(學源), 호는 만송(晩松). 1851년경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대락은 1896년 3월 청송의진에 참여하였다. 1896년 3월 8일 안동의진(安東義陣)의 소모장(召募將)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으로 들어와 청송군 관아의 군기(軍器) 탈취를 시도하고, 거의(擧義)를 촉구하는 격문을 청송 유림들에게 보냈다. 이에 3월 10일 청송향교(靑松鄕校)의 향원(鄕員) 100여 명과 함께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창의(倡義)를 추진하였다.

3월 12일 청송 유림 200여 명과 함께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창의하기로 한 뒤,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창의장(倡義將)으로 심성지(沈誠之)를 추대하였다. 3월 15일 부장(副將) 조성박(趙性璞), 우익장(右翼將) 권성하(權成夏), 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 등을 내정하고 참모와 서기(書記) 이하를 선발하였는데, 이날 저녁에 김대락은 조규진(趙奎震)과 함께 의병진에 합류하여 참모를 맡았다. 3월 22일 김대락은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김대락은 5월 2일 임시로 부장의 수기(手旗)를 세우고 포정(砲丁) 5명과 함께 안동의진에 파견되는 등 각처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5월 12일 의성의진(義城義陣)과 이천의진(利川義陣)이 관군의 공격을 받고 청송으로 들어오자, 5월 13일 청송의진은 진용을 합하여 의성연합의진(義城聯合義陣)을 결성하였다. 5월 14일 청송의진은 중군장 김대락을 비롯하여 진무(鎭撫) 정진도(鄭鎭燾), 소모(召募) 심능장(沈能璋), 참모 오세로(吳世魯), 서기 윤도혁(尹道爀), 외방장(外防將) 안병룡(安秉龍), 군사(軍師) 이경식(李景植), 집사(執事) 윤경승(尹景昇) 등이 거느린 포정 60명을 안덕면 감은리에 파견하여 관군과 접전토록 하였다. 이른바 감은리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관군 7~8명을 죽이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5월 24일 국왕 고종의 해산 칙유문(勅諭文)을 받고, 청송의진은 5월 25일 청송군 관내 8개 면으로 분진(分陣)을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부장 조성박을 현내면, 사병도총(司兵都摠) 남승철(南昇喆)현동면과 현남면, 선봉장(先鋒將) 홍병태(洪秉泰)를 현서면, 우익장 서효신(徐孝信)부동면[현 주왕산면], 좌익장 권성하를 부내면, 소모장 심능장을 부서면 등의 외방장에 임명하여 의병진을 면군체제(面軍體制)로 전환하였다. 중군 김대락은 현북면의 외방장을 맡았다.

그 후 청송의진은 면군체제 아래 6월 15일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6월 18일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를 벌였으며, 6월 28일 영덕연합의진(盈德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7월 13일과 14일 영덕전투(盈德戰鬪)를 벌였다. 그리고 청송의진은 청송으로 귀환하여 7월 20일 부동면[현 주왕산면] 상평리 뒷산 화전등전투(花田嶝戰鬪)를 벌이는 등 8월경까지 활동하였다.

김대락청송의진 해산 후 상경하여 융릉참봉에 임명되었고,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하였다. 그 뒤 김해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905년 10월 1일 사망하였다. 사망 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증직(贈職)되었다. 아들 김진영(金震榮)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중국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 등과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8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부동면[현 주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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