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12
한자 沈相完
영어공식명칭 Shim Sangwa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길 15-2[덕천리 176]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김영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4월 28일연표보기 - 심상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6년 5월 16일 - 심상완 (주)청송흥업사 설립, 대표 취체역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0월 - 심상완 동아일보 청송지국 고문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0년 3월 - 심상완 경상북도 평의회 의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33년 5월 - 심상완 경상북도 평의회 의원 재선
활동 시기/일시 1946년 3월 - 심상완 조선전선회사 자치위원장으로 선임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길 15-2[덕천리 176]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청송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청송군
학교|수학지 세이소쿠 영어학교 - 일본 도쿄
학교|수학지 보성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신인동맹회 후원회 - 서울특별시
활동지 시사책진회 - 중국 상하이
활동지 중한국민호조사 총사 - 중국 상하이
활동지 (주)청송흥업사 - 경상북도 청송읍 지도보기
활동지 조선전선회사 - 서울특별시
성별
대표 경력 경상북도 평의회 의원|조선전선회사 자치위원장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사회활동가.

[개설]

심상완(沈相完)[1899~?]은 1899년 4월 28일 청송군 파천면 덕천동(德川洞)에서 자산 60만 엔을 보유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대 전반기에 국내 사상 단체와 국외 독립운동 단체에 일시 가담하였다가 물러난 후 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며 광산 개발 및 경영에도 전념한 사업가였고, 경상북도 평의회(評議會) 의원을 두 번 지낸 지역 유지였다.

[가계]

본관은 청송(靑松). 부인은 유춘향(柳春香)으로 슬하에 딸 넷을 두었다.

[활동 사항]

심상완청송공립보통학교(靑松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와 중앙학교(中央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어서 1921년 6월 일본 도쿄[東京]의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다가 9월에 물리학교로 전학하고 11월에 퇴학하였다.

귀국 후 1922년 2월 20일 서울에서 이영(李英), 신일용(辛日鎔), 장병천(張炳天) 등과 함께 서울파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의 합법 외곽 단체인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를 결성하였다. 3월 31일에 신인동맹회는 그 해 1월 김한(金翰), 신백우(申伯雨), 이준태(李準泰) 등이 초유의 합법적 사회주의 사상 단체로 결성하였던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가 되었다.

다른 회원들로부터 이념적 동지라기보다는 주요 자금원(資金源)으로 여겨진 심상완은 4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고, 7월 “독립운동의 전도(前途)를 통일의 길로 개진(開進)”시키려는 조직인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시사책진회는 내부 성원들 간의 노선 차이와 이해관계 대립으로 8월 11일 성과 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당시 심상완은 여운형(呂運亨), 여운홍(呂運弘), 남정철(南廷哲)과 친하게 지냈으며, 신규식(申圭植)의 발의로 1921년 5월 상하이에 조직되어 있던 중한국민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통칭 중한호조사] 총사(總社)의 사원이 되었다.

1923년 1월 김사국(金思國), 이영(李英) 등이 전조선청년회연합회(全朝鮮靑年會聯合會)에 맞서 전선청년당대회(全鮮靑年黨大會)를 3월 24일부터 1주일간 개최할 것을 주창하고, 2월 24일 청년당대회 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심상완은 그 회원이 되었다. 이때 그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학생이었다.

그 후 사회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심상완은 1926년 5월 16일, 자본금 10만 원[불입금 2만 5천 원]의 주식회사 청송흥업사(靑松興業社)를 청송면 월막동(月幕洞) 337번지에 설립하고 사장인 취체역(取締役)이 되었다. 이사는 심상완을 포함하여 조성우(趙性佑) 등 7인, 감사는 윤상영(尹商榮) 등 4인이었고, 농촌 산업자금 대부, 육해 물산 무역, 일용 잡화 판매가 설립 목적이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동아일보 청송지국의 고문[총무 겸 기자는 윤활(尹活)]으로 임명되었다.

1930년 3월 경상북도 평의회의 청송군 의원에 입후보하여 최다득표인 60표로 당선되고 경상북도지사의 임명을 받았다. 1932년 3월 7일 경상북도의회에서, 경제공황하에서 낭비 요소가 많은 월 2회의 향교 제사를 폐지하거나 횟수를 줄여서 그 비용을 아동교육비에 충당토록 하며 향교 재산 관리를 개혁할 것을 요구하는 발언을 하였다. 1933년 5월 10일 도 평의회 의원 선거에서 25표로 재선되었다.

1935년 5월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의 48만 평 땅에 서울 사는 남상일(南相一)과 함께 광업권을 설정하고 대표자가 되었고, 1940년에는 평양북도 초산군 판면의 광업권을 다른 3인과 함께 인수받아 대표자가 되었다. 1941년 11월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에 금은동 광산 개설을 출원하였는데, 수정도면 제출 명령을 기한 내에 이행하지 못하여 이듬해 4월 각하 (却下)되었다.

광복 후 1946년 3월 미군정 관리하의 적산(敵産)인 조선전선회사(朝鮮電線會社)의 자치위원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의 이력과 사망한 시기는 미상이다.

[저술 및 작품]

『동아일보』 1929년 12월 3일과 4일자에「금 해금의 준비 성취의 의의- 무역의 개선과 물가저락(金解禁의 準備成就의 意義- 貿易의 改善과 物價低落)」이라는 기고 논설문이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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