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716
한자 金誠一
영어공식명칭 Kim Seongil
이칭/별칭 사순(士純),학봉(鶴峯),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순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8년연표보기 - 김성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4년 - 김성일 부수찬, 정언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김성일 사간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6년 - 김성일 나주사직단 화재로 사직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김성일 통신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김성일 경상우도병마순찰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김성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5년 - 김성일 선무원종공신 녹훈, 가의대부 이조참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64년 - 김성일 신도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676년 - 김성일 이조판서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79년 - 김성일 문충으로 추시
출생지 천전리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수학지 도산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묘소|단소 서지리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의성
대표 관직 경상우도병마순찰사

[정의]

조선 후기 청송 지역의 학풍에 영향을 끼친 문신.

[개설]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안동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대표 제자로 청송 지역의 학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 할아버지는 김예범(金禮範), 아버지는 김진(金璡), 어머니는 민세경(閔世卿)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인데, 민세경은 청송 출신이다.

[활동 사항]

김성일은 1556년(명종 11) 예안의 도산(陶山)을 찾아가 퇴계 이황에게 학문을 배웠다. 1564년 진사시, 156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해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577년(선조 10) 사은사 서장관(謝恩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을 세웠다.

이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장령(掌令), 검상(檢詳), 사인(舍人),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 황해도순무어사(黃海道巡撫御史) 등을 지냈는데, 1586년(선조 19) 나주목사(羅州牧使) 재임 중 사직단(社稷壇) 화재의 책임을 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8년(선조 21) 다시 관직에 복직하였고,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달리, 일본이 군사를 일으킬 기색이 없다는 보고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통신부사 때의 잘못된 보고 때문에 파직되었다. 그러나 유성룡(柳成龍)의 비호로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가 되었다. 이후 여러 고을을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고, 그 해 경상좌도관찰사와 경상우도관찰사에 차례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593년(선조 26) 경상우도관찰사로 재임하며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학봉집(鶴峯集)』 16권 10책이 전하며, 저술로는 『해사록(海槎錄)』, 『상례고증』, 『조천일기(朝天日記)』, 『기묘일기(己卯日記)』, 『북정일록(北征日錄)』,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등을 남겼다.

한편, 김성일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에서 여러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안동 권역의 제자가 다수 배출되었는데, 청송 지역에도 김성일의 학맥을 계승한 인사가 다수 배출되었다. 특히 청송 지역은 재령이씨(載寧李氏)를 중심으로 한 영해 지역 김성일의 문인과 안동 지역 김성일의 문인을 연결해 주는 교량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성일은 부암서당(傅巖書堂)에서 후학을 가르쳤는데, 제자들 중 민추(閔樞)가 청송 출신이었다. 민추는 고향 청송으로 돌아가 김성일의 학맥을 계승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676년(숙종 2)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664년(현종 5)에는 신도비가 세워졌다. 1679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을 비롯해 임천서원(臨川書院), 여강서원(廬江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영산서원(英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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