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68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The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전쟁,6.25전투,육이오,6.25동란,6.25사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06월 25일연표보기 - 6.25전쟁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53년 07월 27일연표보기 - 6.25전쟁 종결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경상북도 청송 지역을 포함해 대한민국 전역에서 펼쳐진 전쟁.

[개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의 기습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맺기까지 3년 1개월 동안 전개되었다. 6.25전쟁은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물적 기반이 파괴된 민족 간 전쟁이었다. 또한 유엔 연합군과 중국군이 참전했다는 점에서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전쟁의 명칭은 남한에서는 민족 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전에 6.25동란 또는 6.25사변으로 불렸다. 최근에는 6.25전쟁 또는 한국 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조선 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의 조선은 북한이 아닌 남북한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북한에서는 혁명적 관점에서 조국 해방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청송 지역은 안동과 영덕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어 6.25전쟁 초기 북한 인민군의 진격로가 되었다. 이에 7월 28일부터 8월 5일까지 국군 제3사단 예하 독립기갑연대와 기갑연대에 배속된 강원도 경찰 제5대대가 인민군과 지연전을 치르기도 했다.

[역사적 배경]

1948년 8월과 9월, 남한과 북한에는 각각 체제를 달리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9년 10월 중국에서는 4년 동안 계속된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여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국내외적인 상황 변화 속에서 국내에서는 좌익과 우익 세력 간의 갈등이 심각하게 표출되었고, 국외적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이 시기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 아래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시키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 전쟁을 준비하였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이 선전포고도 없이 전면적으로 남침을 하면서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우세한 군사력을 앞세운 북한군에 밀려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7월 말에는 낙동강 유역까지 후퇴하였다. 정부는 임시로 수도를 부산으로 옮겼다.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한국을 지원하는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하였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참전하였다.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 Douglas)에게 넘겼다. 유엔군의 지원을 받은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과 일진일퇴하며 대치하면서 반격을 시도하였다.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켰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고, 10월 20일 평양을 탈환하데 이어,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대규모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다시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일시적으로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1.4후퇴].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어 70여 일 만에 서울을 재탈환하였고 이후 38도선 부근까지 진격하여 38도선을 경계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지속하였다. 1951년 7월부터는 소련의 제안으로 휴전 협상이 진행되면서 대규모 공세는 멈추었지만, 휴전선이 정해지던 1953년 7월 27일까지 양쪽 진영은 최대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고지전을 펼쳤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청송 지역도 전장이 되었다. 특히 6.25전쟁 초기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의 진격로에 청송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1950년 7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 청송 지역에서도 전투가 치열하게 펼쳐졌다. 1950년 7월 25일 안동 지역에서는 국군 8사단이 북한군 8사단·12사단과 전투를 벌였고, 영덕 지역에서는 국군 3사단이 북한군 5사단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안동과 영덕 사이에는 큰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이에 앞서 유격부대인 제766부대를 주왕산으로 침투시켜 이전부터 활동하던 좌익 무장 유격대와 합류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국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동시에 동해안 방면에서 남하 중인 북한군 제5사단 제10연대를 ‘영양-진보-청송’을 거쳐 포항으로 우회 공격하는 전술을 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제766부대의 임무는 청송군과 영천군, 의성군 등지를 무대로 후방을 교란시키고 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용이하게 만드는데 있었다. 하지만 영덕 지방의 전황이 급박해져, 국군과 유엔군이 그곳으로 집중 투입되어 7월 중순부터 제766부대 방어는 경찰이 담당하였다. 이에 경찰은 7월 14~15일 도평리 일대에서 제766부대를 격파하였고, 이에 제766부대는 보현산으로 후퇴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7월 후반부로 접어들게 되자 국군과 유엔군은 안동과 영덕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와 미군 해병 1개 대대를 급파하고, 충청북도 영동에서 대구로 이동 중인 독립기갑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시켜 청송군 진보면으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좌익 무장 유격대를 진압하는 작전을 펴던 강원도 비상경비사령부 예하 강원경찰 제5대대를 독립기갑연대에 배속시켰다.

7월 25일 독립기갑연대는 진보초등학교에 연대지휘소를 설치하고, 현 진지선의 고수, 국군 제3사단과의 연결, 좌익 무장 유격대의 진압을 작전 목표로 세웠다. 7월 28일 독립기갑연대는 작전을 개시하여 1개 소대가 사단과의 연락을 시도하면서 진보면 화매리[현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에 주둔하던 북한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강원경찰 제5대대는 주왕산면 주산지리[당시 부동면 이전리]에서 주왕산에서 하산하던 좌익 무장 유격대를 공격하였다. 7월 29일 북한군 2대 대대 규모가 339고지와 영양과 진보를 잇는 국도31호선을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에 강원경찰의 2개 중대가 저지에 나섰으나 병력과 화력의 역부족으로 철수하여 273고지와 진보면 월전리의 월전삼거리 사이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7월 30일 경찰 제5대대는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공격해 오자, 2개 중대를 후퇴시켜 대대 정면을 축소하는 한편, 273고지에 주둔하던 제3중대가 북한군에 역습을 가하여 격퇴시켰다. 7월 31일 북한군 1개 대대가 273고지를 공격하자 경찰대대 3중대가 저지하려 했으나 전력의 열세로 진보면 각산리비봉산 능선으로 후퇴하였다. 같은 날 다른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월전삼거리 동쪽의 잠목으로 접근하자 제1장갑대대와 경찰대대가 연합으로 북한군을 공격하여 진보면 방전리[현 영양군 입암면 방전리] 쪽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기갑연대도 병력 손실이 커 부득이 비봉산-월전삼거리-261고지를 잇는 선으로 방어선을 축소하였다.

8월 1일 북한군 1개 대대 규모가 진보면을 장악한 후 영덕과 안동 사이의 유일한 횡단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월전삼거리 정면에서 기갑연대를 공격하였다. 제1장갑대대와 경찰대대는 무명고지를 중심으로 북한군과 세 차례나 고지를 뺏고 빼앗는 격전을 벌여 격퇴하였다.

8월 2일 독립기갑연대는 월전삼거리 동쪽의 시량리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연대 예비인 제3도보대대와 본부중대를 비봉산 북쪽의 동천으로 이동시켰다. 이날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격전을 벌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상황이 악화되어 ‘375고지-무명고지-비봉산-666고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하고 철수하였다. 8월 3일 국군 수도사단 사단장이 청송에 위치한 독립기갑연대 전술지휘소를 방문하여 ‘길안-청송지구’ 방어에 대한 전술을 논의하고, 4일 독립기갑연대를 수도사단에 배속시켰다.

8월 4일 북한군 1대 연대 규모가 두 개 대대의 지휘소가 있는 현서면 모계리로 잠입하여 공격하였다. 국군은 분전했으나 대대 지휘소가 북한군에 점령당했고, 대대장 장철부 소령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택한다”며 자결하였다. 이날 아침 제1장갑대대와 제2기병대대도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격전을 벌였으나 고전하였다. 8월 5일에는 국군 수도사단 제18연대 지휘소가 북한군의 습격을 받아 많은 병력과 장비를 잃고 부득이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철수하였다.

청송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국군은 비록 철수하였지만, 보현산지구전투에서는 북한군 유격대인 제766부대를 섬멸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앞서 보현산으로 철수한 제766부대는 7월 31일 제1201건설공병단이 배치된 569고지로 공격해 오자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하였다. 그 기세로 국군 제1유격대는 8월 6일 보현산을 포위하고 북한군 제766부대를 공격하여 북한 유격대의 근거지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이 전투의 성과로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총공세를 펴던 북한군의 공격 속도를 둔화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국군이 철수하면서 청송 지역은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북한군은 다른 지역에서처럼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토지개혁을 폈으며, 인민군을 모집하는 정책을 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을 시작한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청송 지역은 곧 수복되었고, 북한군의 점령 정책은 바로 폐지되었다.

[결과]

6.25전쟁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안겼다. 남한의 경우 사망자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고, 산업 시설의 절반 가까이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결과는 분단의 고착성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청송 지역에서도 6.25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적지 않은 민간인 희생자 및 전몰군경이 발생하였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 초기 청송 지역을 방어하던 국군은 북한 인민군의 공세에 따라 ‘청송-현동-죽장-기계’ 축선으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완강한 저항으로 북한이 계획한 남하 일정을 저지시키고 방어 전선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5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이전리 -> 주왕산면 주산지리[당시 부동면 이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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