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과 명성회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57
한자 安東農林學校朝鮮回復硏究團-明星會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4년 10월연표보기 -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 결성
종결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 광복으로 해체
전개 시기/일시 1945년 3월 10일 -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과 명성회의 무기 탈취 및 벽보 부착 등 거사 실패
발생|시작 장소 안동농림학교 - 경상북도 안동시
종결 장소 안동농림학교 - 경상북도 안동시
성격 항일운동단체
관련 인물/단체 심훈|윤동일|박동열|조선회복연구단|명성회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청송 지역 출신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항일 비밀결사 조선회복연구단명성회가 일으킨 항일운동.

[역사적 배경]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는 1933년 4월에 설립된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고 전쟁에 동원될 군인을 양성하는 군사교육기관으로 변질되었다. 학생들은 만주군 출신의 일본군에게 군사훈련을 받고, 내선일체(內鮮一體)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건립 중이던 부여신궁(扶餘神宮)의 건설과 침략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일에 강제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일제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 의식이 고조되었고, 일부 학생은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였다.

[경과]

일제는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였으며, 1943년 2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도 대구80연대로 끌려가 신체검사를 받았다. 당시 안동농림학교 학생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보내는 방송 등을 듣고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고 있었다. 특히 권영동(權寧東), 고제하(高濟夏) 등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일본 군대에 끌려가 헛된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고 결의를 하고, 1944년 10월 비밀리에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을 결성하였다. 조선회복연구단에는 안동농림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안동 지역의 지도층 인사들도 참여하여 1944년에는 단원이 50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조선회복연구단이 결성되기 전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가 활동하였다. 명성회는 1942년 2월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안동농림학교에서 퇴학당한 이정선(李貞善)이 일본 유학 중 독립운동가를 만나 일제가 곧 패망하므로 비밀결사를 결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한 후 1943년 4월에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명성회는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고자 1944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과 연대를 모색하였다. 조선회복연구단명성회의 연합은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회복연구단의 활동은 독립을 목적으로 국내외 정세에 맞추어 일제의 공공기관을 파괴하고 후방을 교란하여 연합군의 상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조선회복연구단안동농림학교의 무기고에 있는 총을 탈취한 후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파견대를 기습, 점령하여 일본인을 제압하고,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義城) 지역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체력 단련 훈련과 전기 기술을 배우고 통신 차단을 위한 모의 훈련을 하였다. 또한 일제의 기밀을 빼내기 위해 우체국 직원을 포섭하고, 철도와 전기 분야의 사람들을 포섭하였다.

한편 청송 지역 출신으로 조선회복연구단명성회에 참여한 인물로는 파천면 덕천리 출신의 심훈(沈勳)과 청송면 월막동(月幕洞) 출신의 윤동일(尹東一), 부남면 감연리(甘淵里) 출신의 박동열(朴東烈) 등이었다. 특히 윤동일은 무장봉기를 위해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대의 무기고를 조사하고, 유사시에 공격을 담당하는 특공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결과]

조선회복연구단명성회가 활동하던 중 일제가 수업 연한을 단축하여 비밀결사를 주도하던 학생들이 졸업해야 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결국 조선회복연구단명성회는 단원들인 학생들이 졸업하기 전에 거사를 실행해야 한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고, 1945년 2월에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거사는 먼저 헌병파견대와 경찰서를 야간에 기습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안동 전역에 일제 패망과 독립의 당위성, 거사를 선전하는 내용의 벽보를 부착하여 일반인의 참여를 끌어낸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거사가 성공할 경우 인근 지역인 의성으로 진출하여 거사 탄압을 위해 대구에서 출동하는 일본군과 일전을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45년 2월 초 조선회복연구단 단원들이 주고받은 편지 때문에 일부 단원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부득이 거사를 연기하였지만, 조선회복연구단명성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졸업 전에는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일제의 육군기념일인 3월 10일에 실행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이 비밀결사 단원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단원의 명단이 발견되어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고, 거사 계획도 발각되어 학생들이 체포되면서 거사는 무산되었다.

당시 청송 출신의 윤동일은 조직의 전모가 발각되자 3월 일본으로 가려다 안동역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심훈박동열도 체포되었다. 조선회복연구단명성회의 단원들은 일제 검찰의 조사가 진행되는 중 광복을 맞이하여 풀려났으며, 청송 출신의 심훈윤동일, 박동열도 미결 상태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과 명성회 사건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학생항일운동을 전개하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