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의진 영덕출진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27
한자 靑松義陣盈德出陣所
이칭/별칭 영덕출진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6년 5월 22일연표보기 - 영덕출진소 설치
종결 시기/일시 1896년 7월 20일연표보기 - 영덕출진소 화전등전투 이후 해산
발생|시작 장소 영덕출진소 - 경상북도 영덕군
종결 장소 화전등전투 -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상평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부대
관련 인물/단체 권성하|장무호|조광규|윤효업

[정의]

1896년 청송의진(靑松義陣)이 영덕에 파견한 의병 부대.

[개설]

청송의진은 창의(倡義) 이후 흥해, 영덕(盈德)[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지역과 척후(斥候)를 파견하거나 사통(私通)을 주고받으며 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 주둔 관군의 출병에 위협을 받고 있던 영덕의진(盈德義陣)의 요청으로 군사를 파견하여 출진소(出陣所)를 설치하고 후원하였다.

[역사적 배경]

청송의진은 영덕의진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일이 있으면 서로 돕는다.’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1896년 5월 14일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 소식을 접한 영덕의진이 청송의진을 지원하기 위해 5월 17일 저녁 청송 이전평역(梨田坪驛)에 도착하였고, 이미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청송의진을 방문한 뒤 돌아갔다. 이때 영덕의진은 군문도지휘(軍門都指揮) 겸 총포장(銃砲將) 김노헌(金魯憲), 전방장(前防將) 심의종(沈宜宗), 후방장(後防將) 신병렬(申炳烈), 서기(書記) 안문익(安文翼) 등이 포군(砲軍) 42명을 이끌고 있었다.

[경과]

청송의진은 1896년 5월 20일과 21일 대구의 관군이 출병하여 영덕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사통을 거듭하여 받았다. 이에 5월 22일 청송의진은 우익장(右翼將) 권성하(權成夏), 후방장 장무호(蔣武鎬), 참모(參謀) 조광규(趙光奎), 종사관(從事官) 심 모(沈某), 서기 윤효업(尹孝業) 등으로 하여금 포군 3초(哨)를 이끌고 영덕에 가서 후원하도록 하였다. 이날 저녁 청송의진 영덕출진소가 영덕 지품(知品)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영덕의진은 원척(元陟)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고 12명의 부상자를 낸 채 도피한 뒤였다.

[결과]

청송의진은 흥해와 영덕에 출진소를 설치하고 활동하던 중, 1896년 5월 25일 본진을 해산하고 군내 8면(面)으로 분진(分陣)하였다. 그러나 청송의진 영덕출진소는 6월 28일 영덕으로 진출한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진(利川義陣)과 합세하였다. 흥해의진(興海義陣), 영덕의진, 영해의진(寧海義陣), 안동의진(安東義陣)과 연합하여 7월 14일 영덕전투((盈德戰鬪)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청송의진은 흥해와 영덕의 출진소를 바탕으로 경주, 흥해, 영덕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청송의진 영덕출진소는 경상북도 동해안 일원의 흥해, 영덕, 영해 지역에서 각처 의병진과 연합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파견부대였다. 전기 의병에서 각처 의병진은 의병부대의 연합을 모색하였는데, 영덕출진소는 그 구체적 사례로 매우 주목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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