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창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20
한자 戊申倡義
영어공식명칭 Musin Righteous Army Movem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재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28년 3월 15일연표보기 - 무신란 발생
종결 시기/일시 1728년 4월 7일연표보기 - 무신란 진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4년연표보기 - 무신창의록 간행
발생|시작 장소 청송의진 - 경상도 청송군
발생|시작 장소 진보의진 - 경상도 진보현

[정의]

1728년 3월 일어난 무신란(戊申亂) 진압을 돕기 위해 경상도 청송과 진보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일.

[개설]

무신창의(戊申倡義)는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 탈취를 기도한 사건으로, 무신년(戊申年)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 또는 주동자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이라고 한다. 이에 경상도 청송과 진보 지역을 비롯해 각지의 유생(儒生)들이 의병을 일으켜 무신란 진압에 힘을 보태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의 제20대 왕인 경종은 세자 때부터 병약하여 국사(國事) 처리에 어려움이 많았고, 숙종은 이를 우려해 이이명(李頤命)과 1717년(숙종 43) 정유독대(丁酉獨對)를 통해 후에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을 부탁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世子聽政)을 할 때도 정사(政事)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老論) 측은 경종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책봉(世弟冊封)과 세제대리청정(世弟代理聽政)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 측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의 옥사(獄事)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朴弼顯), 이유익(李有翼), 심유현(沈維賢) 등의 과격 소론 측은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南人)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경과]

반란은 충청도의 이인좌와 경상도의 정희량(鄭希亮)이 중심이 되어 두 곳에서 발생하였다. 충청도의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淸州城)에 들어와 청주의 충청 병영을 급습하여 충청병사(忠淸兵使) 이봉상(李鳳祥)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등 관리를 살해하고, 자체적으로 목사(牧使)와 병사(兵使)를 세운 후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병마(兵馬)를 모집하였다. 그리고 이인좌를 대원수(大元帥)로 하여 청주를 장악한 다음, 주변 고을인 목천과 청안, 진천을 통과해 안성, 죽산으로 진군하였다.

경상도의 정희량 등의 반군은 3월 20일 안음 고현(古縣)에서 기병하여 안음과 거창을 점령하였고, 합천에 있는 정희량의 인척인 조성좌(曺聖佐) 등은 합천과 함양 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의 동조를 얻지 못하였다. 더구나 조직적인 무력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애초에 합류하려던 계획도 어긋나게 되면서 관군의 반격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반면 경과를 관망하던 각지의 사림(士林)들은 이들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키는 대열에 속속 합류하였다. 이때에 청송과 진보의 사림들도 의진(義陣)을 조직하여 출진하려고 하였으나 난이 평정되면서 파진(罷陣)하였다.

[결과]

무신란이 발생하자 청송과 진보에서도 이웃한 여러 고을과 마찬가지로 충군(忠君)의 행위로서 창의하여 의진을 조직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유후조(柳厚祚)가 1874년(고종 11)에 간행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청송의 인사들은 뜻을 모아 의진을 조직하여 출진하려는 상황에 난이 평정되어 파진하게 됨으로써 직접적인 전투 참여 등을 통한 전과(戰果)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무신창의록』에 기록되어 있는 청송의 창의사적(倡義事蹟)은 의병의 조직 상황을 기록한 의병군문좌목(義兵軍門坐目), 조직 과정과 난의 경과를 기록한 군문일기(軍門日記)로 되어 있다. 진보의 창의사적은 의병의 조직 상황과 활동을 규정한 좌목(坐目)·절목(節目), 의병의 조직 과정과 난의 경과를 기록한 일기(日記), 의병조직에 참여를 호소하는 부장(副將) 권성천(權聖天)이 지은 격일향문(檄一鄕文), 안동의진(安東義陣)과의 연계를 꾀한 서기(書記) 권극태(權克泰)가 지은 답안동의진문(答安東義陣文) 등으로 되어 있다.

두 고을의 군문좌목에 따르면 청송의 의병은 대장(大將) 유학(幼學) 조덕승(趙德昇), 부장(副將) 유학 권대형(權大衡), 유학 이붕령(李鵬齡)을 중심으로 다수의 사림이 임무를 맡아 참여하였다. 진보의 의병은 대장 유학 이사구(李思九), 부장 유학 권성천, 창의공사원(倡義公事員) 유학 신숙(申璹)을 중심으로 다수의 사림이 임무를 맡아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군문좌목에 언급된 인물들 외에도 여러 인사가 창의에 동참하였는데, 청송의진의 대장 조덕승의 사종형(四從兄)인 조태익(趙泰益)은 창의 시에 모병도감(募兵都監)을 맡아 사방의 많은 선비들이 의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고, 안동 태생으로 진보에 입향한 인물인 권성전(權聖銓)은 무신란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의 군진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난이 끝난 후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또한 파평윤씨(坡平尹氏) 문중의 윤정유(尹廷瑜)는 육촌 아우인 윤정린(尹廷璘)과 창의하였고, 윤정린의 아들인 윤응천(尹應天) 또한 창의에 동참하였다. 윤정유는 난이 끝난 후 분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전투 도중 순절한 윤정린·윤응천 부자는 각각 분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정조조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의의와 평가]

무신란이 일어나자 청송 지역 인사들은 난의 진압에 힘을 보탤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실로 향사당(鄕射堂)에 의병 군문(軍門)을 설치하고 의진을 조직하여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그러나 안동 및 진보의 의진과 합진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첩보가 도래하였고, 각 읍의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이 있어 파진하게 되면서 직접적인 전투 참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난의 진압에는 직접적인 공헌을 한 바 없으나 지역의 정서가 반란세력에 동조적이었다기보다는 조정에 우호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당시 청송 지역의 정치·사회적 동향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정보로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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