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01
한자 甫城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재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고려 전기 - 보성부 설치
개정 시기/일시 1394년~1414년 - 보성부에서 보성군으로 승격
개정 시기/일시 1413년 - 보성군에서 진보현으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4년 - 보성부에 감무 파견
관할 지역 보성군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지도보기|파천면지도보기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개설]

보성군(甫城郡)은 조선 전기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파천면 일대에 있던 지명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에 단행된 군현(郡縣) 통폐합 과정에서 1394년(태조 3) 속부(屬府)로 존재했던 보성부(甫城府)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그러면서 1394년~1414년(태종 14) 사이에 보성군으로 읍격(邑格)이 조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현재 전해지는『지리지(地理志)』류와 『읍지(邑誌)』류에는 보성군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없다. 다만, 『지리지』류와 『읍지』류에 소개되어 있는 보성부진보현(眞寶縣)의 연혁, 그리고 조선 전기 실록을 통해 보성군의 존재를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진보현의 연혁에 대해 “신라 경덕왕이 칠파화현(漆巴火縣)을 고쳐서 진보(眞寶)로 하여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는데, 지금의 보성(甫城)이다. 또 고구려의 조람현(助攬縣)을 고쳐서 진안(眞安)으로 하여 야성군(野城郡)의 영현을 삼았는데, 지금의 보성부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진보·진안 두 현이 합하여 보성부가 된 것이다. 고려 현종 무오년(戊午年)[1018년]에 예주(禮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관사(官舍)가 타 없어지고, 사는 백성들이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본조 태조 갑술년(甲戌年)[1394년]에 비로소 보성감무(甫城監務)를 두고, 태종 계사년(癸巳年)[1413년]에 진보(眞寶)로 고쳤다. 무술년(戊戌年)[1418년]에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현(縣)을 청부(靑鳧)와 합하여 청보군(靑寶郡)으로 이름하였다가, 5년 계묘(癸卯)[1423년]에 다시 떼어서 진보현감(眞寶縣監)을 두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한편, 『태종실록(太宗實錄)』 1414년(태종 14) 5월 2일 기사에 “경상도 보성군 청부현에 서리가 내렸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기사가 보성군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자료이다.

[변천]

보성군의 전신인 보성부는 고려시대 예주[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의 속부로 존재하다가,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으로 거주민이 거의 없는 공지(空地)가 되었다. 이후 복구가 이루어졌고, 조선 전기 군현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1394년(태조 3) 처음 감무가 파견되어 비로소 독립 군현이 되었다. 이후 보성이 어느 시기에 군(郡)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414년(태종 14) 5월 2일 『태종실록』의 기록에 보성군이 언급되고 있어, 감무를 파견한 이후부터 1414년 사이에 군으로 읍격이 조정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413년(태종 13) 고을 이름을 진보로 고쳤다고 하여, 『태종실록』의 1414년 5월 2일 “경상도 보성군 청부현에 서리가 내렸다.”라는 기사에서 확인되는 고을 이름과 어긋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조선 전기 행정구역 통폐합 과정에서 읍격뿐만 아니라 읍명(邑名) 개정이 거듭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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