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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600
한자 靑雲里平海黃氏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청운마을 -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 지도보기
성격 집성촌
가구수 78가구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 청운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평해황씨 영이공파 집성촌.

[개설]

청운리 평해황씨 집성촌청운리 청운마을에 있는 평해황씨 세거지이다. 평해황씨는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고려시대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을 지낸 황온인(黃溫仁)을 1세조로 한다. 평해황씨 부사공파(府使公派) 청송 입향조는 영이(詠而) 황덕필(黃德弼)이다.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경주로 낙향한 평해황씨 부사공파 3세손 황국노(黃國老)의 증손자인 황덕필과 아우 황덕진(黃德眞)은 1573년경 청송에 들어왔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정세가 어수선하여, 귀향하지 않고 청송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영이공파(詠而公派)는 부사공파의 지파(支派)이며, 영이 황덕필을 파조(派祖)로 한다.

[명칭 유래]

본래 청송군 부내면 지역에 조선시대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을 중심으로 한 안기도(安奇道)의 속역인 청운역(靑雲驛)이 있었으므로 청운리를 청운 또는 역마라 불렀으며, ‘푸를 취(翠)’ 자를 붙여 취동(翠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평해황씨가 입향하여 세거지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에는 가평이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성진이라는 도사가 청운리를 지나며 “후일 여기에서 정승이 난다”는 말을 남기고 마을 앞 골짜기로 사라졌다고 한다. 가평이씨들은 성진이 사라진 곳을 성지골이라 부르며, 그 말을 믿고 여러 대를 살았으나, 정승이 나지 않아 결국 청운리를 떠났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평해황씨청운리에 입향한 것은 1573년(선조 6)이다. 입향조는 부사공(府使公) 황곡(黃鵠)의 6세손인 영이 황덕필과 그의 아우 황덕진이다. 이들의 증조할아버지인 황국노는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경주로 낙향한 인물로, 황덕필과 황덕진은 경주에서 의성을 거쳐 청송에 들어오게 되었다. 청운리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청송군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성촌으로 평해황씨가 151가구였으며, 1992년에는 평해황씨가 130가구였다.

[자연환경]

청운마을의 동쪽으로 용전천이 흐르고, 내 건너편에 직두들이라는 전답이 펼쳐져 있다. 마을 서쪽 높이 435m의 보광산에 직면하여 청운마을은 서고동저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지형적 요인으로 청운리의 주택은 서고동저의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는데, 대체로 동쪽의 용전천 건너편의 안산인 성황산을 바라보는 동향으로 건립되었다.

[현황]

2017년 현재 청운마을은 120~130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평해황씨는 78가구이다. 청운리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평해황씨가 151가구였으며, 1992년에는 130가구였던 것을 고려하면, 마을의 전체 인구가 감소하였으나 평해황씨 세거지로서의 성격을 잘 보존하고 있다.

청운마을 곳곳에는 평해황씨 영이공파 문중에서 세운 정자, 서당 등을 볼 수 있다. 용전천 건너 성황산 중턱에 세워져 있는 만취정(晩翠亭)은 평해황씨 22세손인 만취동(晩翠洞) 황학(黃學)을 기리기 위해 1947년 세운 것이다. 마을 남쪽의 영이정(詠而亭)은 평해황씨 입향조인 황덕필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 1739년 마을 가운데 건립하였으나 1946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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