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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526
한자 新基里眞城李氏始祖墓域
이칭/별칭 진성이씨 시조묘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신기2리 산7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창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 시기/일시 1679년 - 신기리 진성이씨 시조묘역 단장
현 소재지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신기2리 산7 지도보기
성격 묘역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있는 진성이씨[진보이씨] 시조 이석의 묘역.

[개설]

진성이씨(眞城李氏)는 고려말 진보현의 향리인 이석(李碩)[생몰 연대 미상]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묘갈명에 의하면 이석은 진보현의 현리(縣吏)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후 아들인 송안군 이자수(李子脩)가 귀하게 되어 봉익대부 밀직사(奉翊大夫密直使)에 추봉되었다. 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전부인은 호장 김현(金玄)의 딸이고, 후부인은 성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석의 아들 이자수가 공민왕 때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에 녹권되고 송안군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이석을 시조로 하고 진보를 본관으로 삼았다. 진성이씨는 진보이씨라고도 한다. 진성이씨 중에서도 6대손인 퇴계 이황의 후예가 가장 번성하여 문과 출신자 32명을 배출하였고,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이육사 등 3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위치]

신기리 진성이씨 시조묘역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신기2리 산7번지에 있다. 이석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기곡재사(岐谷齋舍)[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5호] 우측편의 능선상에 묘역이 있다.

[변천]

이석 사후 최초 묘역을 조성한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0대손 통정대부 전사간원 대사간 이명익(李溟翼)[1617~1687]이 찬한 묘갈명에 따르면 “숭정 을유년[1645]에 원손(遠孫) 이시립(李時立)이 3개의 큰 분묘 뒤로 두어 걸음 지점에서 시조의 증손 주부 이양호의 묘를 파서 지석을 발견하였다. 그 지석에 ‘명구를 선조 곁에 붙여 쓴다[明龜祔先祖食]’라는 글귀가 있었다. 이것으로 그 3개의 분묘가 선조의 전·후부인의 묘이며 이양호의 묘를 그곳에 붙여 쓴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시립이 그 묘지석을 숨겨버리고 주부공의 유해를 파서 옮기고, 그 자리에 모친을 장사지냈다.

이시립이 죽었을 때 또 시조와 주부공 양묘 사이에 묻었다. 그후 다행히 지석을 얻어 이 사실을 관가에 고발하여 그 죄를 다스리고 이시립과 부모의 무덤을 파내었다. 기미년(1679) 2월 30일 자손들이 모두 모여 시조의 묘를 다시 봉할 때, 중간 묘에서 벼루와 술잔, 술병이 나왔고, 상하 두 묘에서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이것으로 중간의 묘가 시조묘이고 상하 양묘가 전·후부인의 묘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여, 1679년(숙종 6) 새롭게 단장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묘역은 전체적으로 무덤이 있는 위쪽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판단되며, 경사가 심한 아래쪽은 단으로 구획을 하였다. 아래쪽부터 보면 먼저 축대를 쌓아 위를 편평하게 하였다. 그리고 장방형의 석재를 2단으로 길게 쌓아 단을 지은 후 그 좌우에 망주석 1기를 각각 두었다. 망주석의 중앙부에는 향로석, 상석, 혼유석이 있고, 상석에 붙여 장방형의 크고 넓은 석재를 이어 3면에 둘렀다. 혼유석 위쪽과 접해 비석이 있고, 비석 위쪽에는 다시 2단의 석재를 3면에 둘렀다. 다시 위쪽에는 2단의 석재로 3면을 둘렀고, 바로 뒤쪽으로 무덤 4기가 연접하고 있다. 단은 전체적으로 경사가 있는 상태이며, 크게 ‘⊔’ 모습이 위로 올라가면서 줄어드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무덤 4기는 모두 봉토분으로 호석 등의 시설은 없다. 제일 위쪽에 있는 무덤은 앞의 3기의 무덤보다 다소 거리가 떨어져 조성되어 있다. 앞의 무덤 3기는 장축이 북동-남서 방향이며, 나머지 1기는 동북쪽으로 약간 꺾여 조성되어 있다.

[금석문]

비는 하부가 매몰된 장방형의 비좌 위에 비신, 옥개석의 모양을 한 가첨석(加檐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의 상면에는 전서로 ‘고려증봉익대부밀직사진성(高麗贈奉翊大夫密直使眞城)[전면] 이공지묘(李公之墓)[좌측면]’가 새겨져 있다. 비신의 전면과 좌측면에는 10대손 통정대부 전사간원 대사간 이명익이 찬한 묘갈명이 있고, 후면에는 12대까지의 인물 49명에 대한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후면의 좌측부터 우측면에는 ‘영락(永樂) 19년(1421) 2월 24일’ 진사 김진(金璡)이 기록한 이양호의 묘지명이 부기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신기리 진성이씨 시조묘역에는 비가 있는데, 10대손 통정대부 전사간원 대사간 이명익이 찬한 묘갈명과 12대까지의 인물 49명에 대한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후손들의 가계도를 대충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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