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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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村落共同體-象徵洞祭 |
이칭/별칭 | 마을제사,동고사,당제사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집필자 | 이창언 |
[개설]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동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마을의 조상이나 수호신을 기리는 대표적인 민간 신앙이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마을에서 동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60여 개의 마을에서만 마을의 특성에 맞추어 동제를 공동으로 지내고 있다.
현재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는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다. 그러나 과거에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동제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을의 역사나 성격, 특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의]
의성 지역의 동제는 대체로 유사한 제의 절차를 가진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이 되면 책력의 생기에 맞춰 제관과 유사를 선정한다. 여기서 제관은 동제를 주관하는 사람을 뜻하며, 유사는 제관이 동제를 잘 지낼 수 있도록 부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이른다. 제관이 되면 동제를 준비하기 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이를 금기라고 부르며, 당 샘이나 마을 냇가에서 몸을 씻고, 부정한 것을 피한다. 이러한 금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제수 물품을 사러 시장에 갈 경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어떤 나쁜 말이 나올지 모르며, 부정을 탈 수도 있다고 여겨 이를 금기시한다. 또한 부정한 것을 보거나 듣게 되면 몸을 깨끗이 씻으며, 마음을 정리한다.
음력 정월 열 사흗날 아침에는 제관과 유사가 만든 금줄을 동제당과 마을 입구, 제관 집에 치며, 황토를 제관 집에서 동제당으로 가는 길목에 뿌린다. 이 행위는 부정을 막는다는 의미를 뜻하지만, 동제를 지낼 시기가 되었으니 마을 주민 모두가 조심하자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이후 음력 정월 열 나흗날이 되면 제수 물품을 장에서 구입한다. 제수 물품은 마을마다 다르지만, 삼실과[밤, 대추, 곶감]와 백편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사용한다. 그 밖에 선택적으로 육류[돼지, 소, 닭, 염소], 돔배기, 생선, 포[대구, 명태, 오징어], 감주, 정종, 막걸리, 밥, 나물, 국 등이 있다. 제수 음식 준비가 끝나 자정이 되면 제관들은 의복을 차려 입고 제당으로 제수 물품을 들고 간다. 의복은 마을마다 차이가 있고, 대부분이 삼베로 된 의복을 착용한다. 과거에는 음력 정월 열 나흗날에 매구를 치며 동제의 준비, 시작, 끝 등을 알렸으나 현재는 대부분 사라졌다.
제의 절차로는 기제사와 유사하게 강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 소지, 철상을 순서로 한다. 축문은 마을마다 유무가 다르며, 소지는 대부분 호마다 세대주의 이름을 올리지만, 마을 이름을 부르며 한 번에 올리거나, 가축까지 같이 올리는 경우 등 여러 방법이 존재하기도 한다. 동제는 대체적으로 첫 닭이 운 뒤에 철상을 하며, 동제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은 간단하게 음복을 한다. 정월 대보름 아침이 되서는 마을 주민 모두가 회관에 모여 제관과 유사의 수고를 치하하고 음복을 즐긴다. 이때 동회를 열며, 윷놀이, 지신밟기 등의 민속놀이도 행한다.
[살아 있는 역사, 의성]
의성 지역의 동제는 각 마을의 유래와 입향조, 위치 등과 어울려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의성 지역의 동제는 토테미즘과 유교·불교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그 연행 과정이 점차 변화·발전·쇠퇴 과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신격화되는 장소와 상징물, 그리고 제의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아 현재에도 마을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렇게 동제는 마을의 역사에 따라 갖가지 제의 특성을 보여 준다.
먼저,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동제의 경우 과거 생물 마을에 살고 있던 모자가 자기 소유의 많은 땅을 후세에 물려주지 않고 마을에 남겨 주었다는 실화가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이들 모자를 위해 동제를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생물 마을의 제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로 벽체는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지붕은 기와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동제를 준비할 때에는 두 상을 차린다. 또한 모자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매년 동제를 지내기 전날 소를 한 마리 잡아 육회와 생고기 산적을 올리기도 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덕미리 동제의 경우는 제당과 제수 음식에서 마을의 특징을 추정할 수 있다. 타 마을과 다르게 덕미리의 제당은 미륵당과 골맥이당이다. 미륵당은 당집으로서 마을 입구 방향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골맥이당은 미륵당에서 북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각각 위치한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미륵불을 모시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과거 스님에 의해 마을의 부정을 몰아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덕미리의 동제는 미륵당에서 먼저 제사를 지낸 후, 골맥이당에 제사를 지낸다. 즉, 미륵당이 마을신인 골맥이보다 상위에 속한다는 것이다. 제수 음식에서도 타 마을과 달리 큰 차이를 보인다. 미륵당을 제당으로 모신데서 제수 음식의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육류를 일절 금하고, 과일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타 마을에서 생고기와 삶은 고기 등을 사용하는 것과는 상반되며 마을의 유래에 따라 동제 또한 여러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의성 지역은 입향조를 제당에 모셔 놓고 매년 동제를 지내는 모습도 보인다. 그 중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이연리 중연 마을의 경우에는 4명의 입향조를 그린 그림과 제기를 제당인 당집에 모셔 놓고 매년 동제를 지낸다. 의성군 단촌면 관덕 1리 또한 입향조인 박운천을 모시며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흗날 동제를 지내고 있다.
[의성만의 독특한 지역성]
의성 지역은 동제를 통해 지역적인 구분이 가능하다. 중앙 고속 도로를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며, 금기와 제수 물품, 제의 절차, 변화 양상에서 다소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크게 분류하자면 동제에 대한 믿음과 엄격함을 들 수 있다. 서쪽 지역의 경우에는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주선리, 위중리, 서제리, 단북면 이연리, 다인면 덕미리, 안계면 위양리, 구천면 유산리 등 대부분의 마을에서 현재까지도 엄격한 금기를 행하고 있다. 또한 가신신앙을 집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독실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동쪽 지역의 경우에는 몇몇 마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마을에서 동제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었으며, 금기와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다음으로 서쪽 지역의 금기 경우 아직까지도 당 샘이나 냇가에서 몸을 씻고, 타인과는 마주치지 않는 등 엄격히 지켜 나가고 있지만, 동쪽 지역의 마을에서는 금기가 약화되어 대부분이 이를 행하지 않고 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현대화가 진행된 정도의 차이와 마을 재배 작물의 변화, 기독교의 전도, 동제를 지내지 않아도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점 등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의성 지역에서는 10년 전만 해도 60여 개의 마을에서 동제를 행하였다. 그러나 조사 결과 현재 서쪽 지역의 마을은 모두 동제를 전승해 나가고 있지만, 동쪽 지역은 9개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지 않고 있었다.
[지속성을 잃어가는 동제 신앙]
의성 지역의 동제는 타 지역보다 전승이 잘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마을의 입향조와 민간 신앙의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의성 지역은 거의 모든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60여 개의 마을만이 동제를 지내고 있다. 점차 마을이 현대화되면서 민간 신앙을 믿지 않아도 문제가 해결되고, 이에 따라 믿음이 점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을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젊은 사람의 경우 단순히 마을의 공동 행사로서 참여를 할 뿐이지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마을 재배 작물의 변화로 동제를 지내던 시기와 작물 재배 시기가 겹치면서 바빠져, 동제의 규모가 약화되거나 전승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의성군 가음면과 단밀면 비교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가음면의 경우 과거에 재배하던 벼와 특수 작물 형태에서 사과로 바꾸었다. 현재 사과를 재배하고 있는 마을의 경우 수입은 높지만 동제를 지내는 시기에도 쉴 틈이 없어 제관을 선정하거나 금기를 행하는 제의를 축소하거나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단밀면의 경우 가음면과는 달리 대부분이 벼나 특수 작물을 재배하고 있어, 동제를 지내는 시기에는 휴식기를 가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마을에서 제관으로 선정되면,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부정한 것을 보지 않는 금기를 행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동제를 정성들여 지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벼농사의 특성상 인력보다는 자연적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이 고령화되고 주민들이 점차 도시로 이주함에 따라 동제 또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의성군 사곡면 공정리 동제의 경우 산기슭의 자연석에 매년 음력 1월 15일에 동제를 지내 왔으나 현재 마을의 인구가 16호 정도로 줄어들면서 2005년부터는 동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종교의 변화도 동제를 약화시킨 요인 중의 하나이다. 단밀면 생송리 생물 마을에서는 2005년 마을에 교회가 들어와 동제를 지내던 주민들이 점차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이후 기독교를 믿은 주민들은 동제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고, 마을에 분쟁이 있었으나 당시 이장의 재량으로 잘 해결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교회로 인해 동제에 참여하는 마을 주민들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는 점은 동제의 약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믿음과 역사를 전승하는 의성]
점차적으로 동제가 약화되는 추세를 보이지만, 의성 지역 사람들은 동제라는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의성군 옥산면 실업 2리 동제의 경우 과거 2명의 제관이 선정되어 동제를 지내 왔으나 제관들의 부담이 컸다. 현재는 이를 고려하여 마을 주민 모두가 함께 동제를 준비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성군 춘산면 옥정 3리의 경우 마을 주민들의 이주와 고령화로 인하여 동제를 유지해 나가기 어려워졌다. 이에 마을 주민 간의 회의 끝에 마을 뒤편에 있는 복두사에 의뢰하여 매년 동제를 지내 주기를 부탁하였고, 성격은 변하였지만 현재까지 동제를 전승해 나가고 있다.
의성군 춘산면 신흥 2리 또한 고령화와 마을 주민들의 이주로 동제를 전승해 나가기 어렵게 되자 당신에게 제를 지내 10년마다 한 번씩 동제를 지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 밖에도 새로운 사례로서 단북면 이연리 중연 마을을 들 수 있다. 이연리는 2004년 당집 안에 모셔 놓았던 입향조 4명의 그림과 제기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동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 위기가 있었음에도 마을의 전통을 전승시키고자 입향조의 그림 없이 매년 동제를 지내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 한 의성 지역의 전승 의지는 대부분 입향조나 당신에 대한 존경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몇몇 마을은 단순한 존경심이나 믿음에 의해 전승해 오는 것이 아닌 곳도 있다.
의성군 춘산면 대사 1리의 경우 동제가 주민들의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1983년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자 마을에 불미스러운 일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자 1987년부터 동제를 다시 지내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에 대하여 힘들지만 동제를 지낼 수밖에 없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고, 현재는 이를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밀면 생송리 동제의 경우에는 부정에 대하여 엄격한 금기를 행하고 있다. 과거 제관 3명이 제수 물품을 사기 위해 장을 보러갔다가 타인과 말을 섞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여 한 시간 동안 마을 밖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또한 매년 지내던 동제를 제관이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소홀히 지냈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2012년 동제에서도 제관의 실수로 인하여 어머니가 아픈 일이 발생하였다. 병원에 찾아가도 낫질 않아 무당을 불러 새로이 동제를 지내 어머니가 나았다고 한다.
이처럼 의성 지역은 마을의 전통, 존경심, 당신에 대한 공포 등에 의한 여러 이유로 전승되고 있다. 전승 의지에 대하여 정확히 답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의성 지역의 특성을 개괄적으로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