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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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弓裔王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집필자 | 이원용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0년 - 「궁예왕」 『포천의 설화』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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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95년 8월 - 「궁예왕」 이병찬이 김한길에게 채록 |
채록지 | 「궁예왕」 채록지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중리 |
성격 | 인물담 |
주요 등장 인물 | 궁예|왕비|왕건|노인 |
모티프 유형 | 여우 왕비의 패악|지명 유래|일제의 만행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서 궁예(弓裔)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궁예왕」은 여우가 둔갑한 궁예왕 왕비가 저지르는 패악담, 울음산·한탄강 등 궁예 때문에 생성된 지명 유래담, 일제 강점기 경원선 부설 중에 일본인이 죽자 궁예왕에게 제사를 지내서 위로하였다는 일화 등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설화이다. 궁예[?~918]는 후고구려[태봉]을 건국한 인물로, 아버지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875] 아니면 헌강왕(憲康王)[?~886]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라고 한다.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일대에 궁예산성이 전하고, 그의 패주와 죽음에 대한 설화가 서너 편이 채록되어 있는데, 「궁예왕」도 그중의 하나로 궁예 관련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2000년 이근영·이병찬 등이 엮고 포천 문화원에서 발행한 『포천의 설화』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1995년 8월 이병찬이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중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김한길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옛날에 왕은 부인을 여럿 두었다. 궁예가 왕이 되니 욕심이 많아져서, 또 한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 여자는 몇 백 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여우는 사람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러한 여우가 궁궐로 들어오니 그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비는 병이 나 드러누웠다. 왕이 용한 의사들을 다 불렀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궁에서 그런 일이 나니 이름 좀 알릴까 하고, 별 사람이 다 모여들었다. 한 사람이 “나는 잘 알지는 못하나 맥쯤은 안다.”고 하니, 옆에 있던 사람이 “그럼 궁중에 가보라.”고 하였다. 그가 하는 말이 “병은 아닌데 꼭 사람 고기를 먹어야 나을 병이라.”고 하였다. 또 “꼭 열세 살, 열네 살 정도 된 여자아이의 유방을 먹여야 한다.”고 하며, “좀 힘들겠다.”고 했다. 옆의 사람이 말했다.
“아! 힘들게 뭐가 있어.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뭐가 힘들어.”
그래서 왕명이라면서 여자 하나를 빌려다가 가슴을 딱 베여 먹이니 왕비의 병이 나았다.
그리하여 이럭저럭 여섯 달이 지났는데, 왕비가 또 아프다고 하였다. 이렇게 자꾸 여자아이를 잡아 먹이니, 4,5년이 지나자 사람이 무척 줄게 되었다. 그것도 꼭 열세 살, 열네 살 된 여자아이를 갖다 먹여서, 그때부터 일곱 살, 아홉 살에 시집가는 것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시집만 보내면 잡혀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왕건이 가만히 보니까 사람을 다 죽이고 나면 나라가 없어질 것을 염려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궁예가 군사를 데리고 도망을 쳐서 여기에 있는 궁예성[포천군 창수면 중리]으로 왔다. 이 당시에 왕건에게 쫓겨 올라오면서 군사를 많이 데리고 왔기 때문에, 거기서 쌀 씻은 뿌연 물이 왕건 군사가 있는 곳까지 흘러내려 갔다고 한다. 거기에 성을 쌓는 동안에도 왕건이 자꾸 쳐들어오니, 궁예는 성만 쌓아 놓고 그곳에 하루만 머물고는 그냥 또 쫓겨 갔다.
왕건이 또 계속 쫓아와서 도망간 데가 운천구에 있는 용해라는 곳이다. 그곳에 있는 울음산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울음산 저쪽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함] 울면서 한탄을 했다. 그 결과 한탄강이 생겼다고 한다.
왕건은 궁예를 잡을 수 있었지만, 잘못해서 그 사람보다 더 난 사람이 날까봐 죽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추방시켰다. 궁예가 도망갈 때, 남자들은 돌을 져다주고 여자들은 돌을 날라 와, 사람들이 그 돌멩이를 쌓아 놓고 던졌다. 그래서 강원도 복개[철원에서 삼십 리쯤 되는 곳에 위치]라는 곳에서 돌무덤에 묻혀 죽었다.
그런데 왕건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역적이 된 궁예는 제사 지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흐른 후에 고종 때 일본이 을사조약을 맺자고 하며, 만주를 침범해 그것을 나누자고 했다. 고종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서 을사조약을 맺었다. 이때 일본이 한국을 빌려달라고 해서, 서로 의형제를 맺은 것과 같으니 승낙을 했다. 그러자 일본은 인천, 부산, 원산으로 군사를 데리고 들어와 무기를 확보했다. 그 뒤에 일본이 서울에서 원산까지 경원선을 닦는데, 철로가 복개를 지나면 길이 조금 구부러지고 능선을 끊으면 좀 가까웠다. 그래서 그렇게 길을 닦자, 일본인이 자꾸 이유 없이 죽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어떤 한 노인이 말했다.
“거기 끊는 데가 어디 있다고. 그 앞에 그래도 일개 왕의 무덤이 있는데, 아무리 역적으로 죽었지만 거길 끊는 데가 어디 있어? 그러니까 너희가 죽을 수밖에 없지.”
이 소리를 마을 사람들이 듣고, 그중 한 사람이 일본인에게 고자질했다. 그러자 순경들이 나와서 그 노인을 붙잡으니까, 그는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면서 말했다.
“길을 그렇게 닦지 말고 그 앞으로 다시 재어서, 거기에 제사를 지내야 당신들이 잘 닦을 수 있습니다. 길을 다 닦고서 한 번 제사를 또 지내십시오.”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돼지를 잡고 제사를 지내고 길을 닦으니, 사고가 하나 없이 원산까지 철도를 놓을 수 있었다. 기차가 서울부터 개통을 하는데, 복개라는 언덕에 와서는 올라가질 못했다. 그때 다시 노인의 말이 생각이 나서, 궁예왕의 무덤 앞에다 제사를 지냈다. 한 번 절을 하고 일어나니까 잔에 부어 놓은 술이 없어졌다. 절하던 사람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술이 없어지니까, 또 한 잔을 부어 놓고 절을 했다. 그랬더니 또 부어 놓은 술의 반이 줄었다. 계속해서 술 석 잔을 다 올리니 맨 끝의 잔은 그냥 흔들리기만 하였다. 제사를 다 지내고 나자, 노인이 음력으로 시월 보름날이면 잊지 말고 제사를 지내 주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본인에 의해 후대에 와서 궁예왕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궁예왕은 역적이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제사를 못 얻어먹고, 일본인이 기차를 개통하는 바람에 제사를 얻어먹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한 번 지냈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해, 제사를 지내지 않았더니 또 기차가 가지를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일본인들은 8·15 해방 전까지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궁예왕」의 주요 모티프는 ‘여우 왕비의 패악’, ‘지명 유래’, ‘일제의 만행’ 등이다. 「궁예왕」은 궁예와 관련된 유래담으로 무자비한 궁예왕의 악정(惡政)과 개항기의 국권 피탈, 일제 강점기의 삶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궁예왕의 실정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여우가 둔갑한 왕비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사람을 다 죽이고 나면 나라가 망할 것 같아 왕건(王建)[877~943]이 군사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알려 주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