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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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im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박노석 |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전라북도 무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초기 국가 시대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로 세분화된다. 현재의 전라북도 무주 지역에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적천현(赤川縣)과 두시이현(豆尸伊縣),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이 있었으며, 후기 신라 경덕왕(景德王) 대에 무산현은 무풍현(茂豊縣)으로, 적천현은 단천현(丹川縣)으로, 두시이현은 이성현(伊城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시대에 무풍현은 그대로 이어지고 단천현은 주계현(朱溪縣)으로, 이성현은 부리현(富利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진례현(進禮縣)에 통합되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 무풍현과 주계현이 합해져 무주현(茂朱縣)이 되었다. 따라서 무주 지역의 고대사를 볼 때에는 이들 지역의 역사를 나누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삼한 시대]
초기 국가 시대에 한반도의 남부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정립하고 있었다. 삼한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에 여러 지역에 소국이 형성되면서 시작하여,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발전하였다. 무주 지역에도 청동기 시대부터 국가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삼국 시대에 무주 지역은 신라의 무산현, 백제의 적천현과 두시이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현들은 이전의 국가 세력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현'으로 편성되었을 것이므로, 무주 지역에는 세 개 또는 그 이상의 정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두시이현과 적천현 지역은 마한에 속하였을 것이고, 무산현 지역은 진한이나 변한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지역은 이후 백제와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
[삼국 시대]
신라가 무주의 일부 지역에 진출하게 된 것은 서기 3세기경으로 보인다. 서기 231년(조분왕 2)에 신라에서는 이찬 우로(于老)로 하여금 감문국(甘文國)을 점령하게 하였다. 당시 감문국은 김천 분지의 중앙에 도읍하였고, 영토는 동으로는 낙동강, 서쪽으로는 추풍령에 이르고 북쪽과 남쪽으로는 산지를 경계로 상주 지역과 고령 지역 등과 접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 신라는 감문국이 있던 곳에 개령군(開寧郡)을 설치하고 무풍에 있던 무산현을 통솔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신라는 감문국을 점령하면서 무주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신라는 서기 231년에 감문국을 점령하였고, 이후 무주군 무풍 지역까지 점령한 것이다. 이곳을 점령한 신라는 지금의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거문들 마을 일대에 성을 쌓고 치소를 설치하여 무산성(茂山城)이라 이름하고서 백제와 대치하였다.
백제가 무주 지역에 진출한 정확한 시기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백제는 온조왕(溫祚王) 대에 이미 금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곳 무주 지역까지 차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는 현재의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와 대차리 경계 지역인 '성안'이라는 곳에 적천현을 두고 지금의 무주읍 일대를 통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무주군 무주읍의 진산인 향로산(香爐山)에서 서남으로 흘러내린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동헌 터로 보이는 축대와 둘레 약 1㎞ 정도 되는 성곽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이 백제의 적천현 치소로서 이곳을 중심으로 동쪽의 신라와 대치하였던 것이다. 즉, 백제는 지금의 무주군 무주읍 지역에 적천현을,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에 두시이현을 두고 지금의 부남면 지역을 통치하였고, 신라는 지금의 무풍면 지역에 무산현을 두고서 통치하였다.
이러한 백제와 신라의 대치는 삼국 시대 내내 계속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곳에서의 직접적인 전투에 대해서는 백제의 의자왕(義慈王) 대에 가서야 기록에 나타난다. 백제는 647년(의자왕 7)에 장군 의직(義直)을 시켜 신라의 무산성[무주군 무풍면] 아래에 진을 치고, 감물성(甘勿城)[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이나 개령면 일대]과 동잠성(桐岑城)[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 일대]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김유신(金庾信)의 반격으로 의직은 패하였다. 이때 김유신은 진례성(進禮城)[충청남도 금산군 일대] 등 9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김유신이 점령한 9개의 성이 구체적으로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천성도 빼앗겼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무주 지역은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되었고, 이후 삼국 시대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국 시대]
무주 지역은 647년에 김유신이 무주군 전체를 신라에 편입시킨 이후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신라는 757년(경덕왕 16)에 적천현을 단천현으로 바꾸고 진례군[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의 영현으로 삼았고, 무산현은 무풍현으로 바꾸고 개령군[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의 영현으로 삼는 등 이름을 바꾸고 행정 구역을 개편하였다. 한편 남북국 시대에 무주 지역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지내는 제사 중 소사(小祀)가 치러졌다. 동로악(冬老岳)에서 소사가 이루어졌는데, 이 동로악은 진례군 단천현에 있었다. 즉 지금의 무주군 무주읍 부근에 있는 동로악이라는 데에서 소사가 지내졌던 것이다.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도 후기에 들어서면서 왕들의 계속되는 실정에 의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각기 세력을 형성하여 신라와 함께 삼분하게 되면서 후삼국 시대가 형성되었다. 이때 무주는 신라의 영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하지만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하고 주변 지역을 점령해 나가는 과정에서 무주 지역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즉, 견훤은 920년(태조 3)에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계속해서 군대를 지금의 금산 지역인 진례성으로 향하였다. 합천에서 금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거창을 지나 무주를 통과하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이때 견훤의 군대는 이러한 길을 따라서 금산으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이에 신라의 경명왕(景明王)은 아찬 김율(金律)을 보내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이를 듣고 요청을 수락하여 장수를 파견하였다. 그러자 견훤은 진례성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이와 같이 무주 지역도 후삼국 시대에 견훤의 군대가 진례성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었지만, 견훤의 군대가 물러남으로써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비록 견훤의 군대가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무주 주변의 여러 지역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은 발휘하였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주 지역이 당시 신라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는지 아니면 이때 견훤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렵다.
[고대 관련 유적]
무주 군내에 있는 고대 관련 유적으로는 먼저 현의 치소와 관련하여 주계 고성 터와 무풍 고성 터가 있고, 이외에도 적상산성(赤裳山城) 등이 있다. 고분군으로는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에 있는 대차리 고분군(大車里古墳群) 등 다수가 있으며, 이 밖에 다수의 고인돌 떼와 봉수 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