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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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三大 樓閣 嶺南 第一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석태 |
관련 지역 | 밀양 영남루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내일동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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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조선시대 3대 누각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밀양 영남루.
[밀양 영남루의 특성]
밀양 영남루는 동래를 종착지로 하는 영남대로가 통과하고, 한양과 일본 등을 주요 목적지로 하는 낙동강 수로가 출발하는 밀양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악 속의 도시이자 가운데로 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강이 흘러가는 밀양의 지리적 특성상 밀양 영남루에서 조망되는 산수자연의 아름다움이 신선 세계에 비견될 만큼 수려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밀양 영남루는 자연경관의 수려함 외에도 건축물로서도 완결된 형식으로 결구(結構)되고 훌륭하게 단청이 된 조형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거듭되는 중창과 중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대루(大樓)[本樓]에 좌우의 익루(翼樓)[능파당(凌波堂)과 침류당(枕流堂)]를 붙인 웅장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좌측의 익루는 대루에 이어 붙이고 우측의 익루는 여수각(如水閣)으로 연결함으로써 변화와 섬세함도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영남권 진주의 촉석루와 우열을 다투며 영남 제일의 누각으로 일컫기도 한다.
[밀양 영남루의 연혁과 문화재적 가치]
밀양 영남루는 고려시대 영남사(嶺南寺) 죽루(竹樓)에서 출발하여 1365년 지군사 김주(金湊)가 진주 촉석루를 본떠서 창건하였다.
밀양 영남루는 본래 객사 별관의 하나로 창건되었지만 나중에는 밀양부 객사를 대표하는 건물이 되었다. 관료와 일본 사신 등을 위한 연회만이 아니라 밀양부의 중요 행사 장소, 밀양부사와 조선 전기 감영이 행영 체제였을 때 경상감사, 경상병사, 경상도사 등의 집무실로도 활용되었다. 권벌(權橃)의 밀양부사 재직 시절 『춘양일기(春陽日記)』[개인 소장, 보물 제896호]와 임진왜란 이전까지 창작된 영남루 제영시문(題詠詩文)을 필사한 영남루제영문집(嶺南樓題詠文集) 『영남루시운(嶺南樓詩韻)』[개인 소장] 등 문헌자료를 통하여 확인되는 영남루 주요 건물의 창건 내력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루(大樓)[본루]: 1365년 지군사 김주가 진주 촉석루를 본떠서 창건하였다. 1460년 부사 강숙경(姜叔卿)이 규모를 2칸 넓혀 증축하였으며, 1543년 부사 박세후(朴世煦)가 전면 해체 수리하고 좌우에 두 익루를 거느린 형태로 대폭 증축하였다. 본래는 객사 별관의 하나로 창건되었지만 나중에 밀양부의 객사를 대표하는 건물이 되었다.
2) 능파당(凌波堂): 1495년 부사 김영추(金永錘)가 대루 동북쪽에 빈객의 숙소로 창건하여 망호당(望湖堂)이라고 하였고, 1543년 부사 박세후가 대루에 비하여 낮다고 하여 대루 곁으로 옮겨 터를 돋우고 한 칸을 증축한 다음, 능파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봉래관(蓬萊觀)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3) 침류당(枕流堂): 1439년 부사 안질(安質)이 창건하였다. ‘소루(小樓)’라고 부르던 것을 1442년 경상도사 권기(權技)가 ‘소루(召樓)’로 명명하였다. 1503년 부사 이충걸(李忠傑)이 개창하여 임경당(臨鏡堂)[영주각(瀛洲閣)]이라고 하였던 것을 1543년 부사 박세후가 중건하여 침류당으로 이름을 고쳤다.
4) 객사동헌(客舍東軒): 밀양읍성 남문 안쪽에 있었던 객사 동상헌(東上軒)으로 추정된다. 공무 등으로 왕래하는 관료들의 숙소로 활용되었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5) 선정(船亭): 1543년 부사 박세후가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함께 건조한 누선(樓船)의 정박과 승선 편의를 위하여 밀양강 가에 세운 정자로 추정된다.
6) 여수각(如水閣): 영남루 대루 왼쪽 침류당으로 내려가는 층층 계단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다. ‘월랑(月廊)’ 또는 ‘층층각(層層閣)’이라고도 한다. 시원한 바람을 맞아 마음을 물처럼 맑게 하여 준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밀양 영남루와 부속 건물은 임진왜란 때 밀양성과 함께 모두 소실되었다. 1599년 부사 이영(李英)이 영남루 능파당 자리에 임시로 초옥을 짓고 경상감사 한준겸(韓浚謙)이 억석당(憶昔堂)[월파정(月波亭)]이라고 명명하여 관아와 객사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1643년에 부사 심기성(沈器成)이 대루를 중건하였다. 1651년 부사 김응조(金應祖)가 대루 서북쪽에 객사 공신관(拱辰館)을 짓고 전패(殿牌)를 봉안하면서 밀양부 객사 별관에서 객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1661년 부사 이지온(李之馧)이 능파당을 보수하고 영남루의 모든 건물에 단청을 하면서 임진왜란 이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 이후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844년 부사 이인재(李寅在)가 1년여의 공사 끝에 영남루를 대루와 좌우 익루를 붙인 웅장한 규모로 중건하였다. 그리고 경내에 수백여 칸에 이르는 부속 건물을 지어 밀주관(密州館)이라고 명명하고는 관료 등 빈객의 접대와 밀양부 주요 행사와 공무 수행에 활용하였다. 이리하여 밀양 영남루는 임진왜란 이전보다 더욱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비록 밀주관의 많은 건물이 후일 화재로 대부분 소실이 되고 말았지만, 그중 핵심이 되는 영남루 대루와 두 익루 및 옛 공신관의 부속 건물 요선관(邀仙觀)[천진궁(天眞宮)]은 그대로 남아 있다.
[밀양 영남루의 인문학적 가치, 영남루제영문집의 존재]
밀양 영남루는 자연미와 조형미가 빼어난 데다가 영남대로가 통과하고 또 낙동강 수로가 출발하는 밀양의 객관 부속 누각으로서 접근성까지 용이하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 주로 당대 대표적인 관료문인들이 올라가 보고 또 묵어가곤 하였다. 공무 또는 다른 일로 영남이나 밀양에 내려오게 되면 꼭 올라 봐야 할 명소로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밀양 영남루에 오르거나 묵게 되면 늘 밀양 영남루에 대한 여러 글들을 남겨 두었다. 직접 오지 못할 경우, 다른 사람들이 지은 글을 통하여 상상 속에서 글을 짓기도 하였다.
영남루 제영 시문 작품 중 문헌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작품은 단편으로,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실린 고려 전기 정지상(鄭知常)의 한시 작품이다. 그 뒤 고려 후기 임춘(林椿)은 1174년 무신란(武臣亂)을 피하여 밀양에 내려와 있으면서 영남사 죽루를 제재로 한 한시 작품들을 남겼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5세 중엽 이후로는 밀양의 위상이 대단히 높아지면서 공무 출장 중인 관료문인들의 왕래도 빈번하였다. 공무로 밀양을 찾아와서 밀양 영남루에 들르거나 머물면서 영남루 제영 시문 작품을 남겼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관료문인들뿐만 아니라 밀양을 중심으로 한 일반 문인들도 영남루 제영 시문 작품의 작자로 참여한다.
밀양 영남루에 대한 글은 한시 작품을 중심으로 기문과 상량문, 서사 작품과 한글가사, 시화와 탐방기 등 실로 다양하다. 한시 작품이 대종을 이루지만, 기문과 상량문도 적지 않게 전하고 있고, 서사 작품과 한글가사 및 시화와 탐방기 등도 더러 있다. 이와 같은 글들은 밀양 영남루가 영남사의 부속 누각으로 존재하던 고려시대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지속적으로 창작되었고, 나아가 후기로 갈수록 창작은 더욱 활발해졌다. 여기에 지리지와 읍지, 문집과 여행기 등 관련 기록들을 더하여 본다면, 영남루 관련 문헌 자료는 한 권의 책자로도 엮기 어려울 만큼 방대한 양에 이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누정을 위시한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가장 많은 문헌자료가 있다.
영남루 제영 시문은 195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창작 또는 기록된 것으로 제한해서 들어보면 한시 작품이 973수, 산문 작품이 27편, 아랑전설(阿娘傳說)이 5편이다. 그리고 작자는 한시 작품 468인, 산문 작품 24인, 아랑전설 5인의 총 497인이다. 이 중 한시 작품과 산문 작품, 한시 작품과 아랑전설 양쪽 모두에 작품을 남긴 사람이 17인이므로 이 수만큼을 제하면, 현재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모두 480인이다. 그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341인이고, 시호를 받은 사람은 111인이다. 이들 대부분은 당대의 중앙 문단을 주도하던 인사들이었고, 그중 후대까지 영향력을 크게 미쳤던 인사들도 적지 않다.
고려 전기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해방 전후에 이르기까지 영남루라는 단일한 공간에서, 영남루라는 단일한 소재 또는 제재를 가지고 작품 창작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작자의 역량과 시기별 분포 및 산출된 작품 양을 고려할 때, 영남루를 하나의 문단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고려 전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존속되고, 관료문인부터 일반 문인에 이르기까지를 아우르는 ‘영남루문단(嶺南樓文壇)’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까지 작가 259인의 작품 570편을 모은 영남루제영문집 『영남루시운』을 낳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제영 시문 작품은 한시 작품이 중심이 되어 있다. 서사 작품이라고 할 아랑전설도 내용의 대부분이 한시 작품으로 채워져 있어 기문과 상량문 등인 산문 작품 23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시 작품으로 창작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시 작품은 특히 전통시대 누정 제영 한시 작품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 누정과 누정의 경관을 구현하는 데 집중하는 두 기본 운자(韻字)인 누각 누(樓) 자를 포함하는 하평성(下平聲) 우(尤) 자 계열 글자와 하늘 천(天) 자를 포함하는 같은 하평성 선(先) 자 계열 글자를 운자로 사용하는 두 유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시 작품의 창작에서 이렇게 고정된 운자를 사용할 경우 이미 창작된 작품들의 강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많은 영남루 제영 한시 작품 작자들이 창작의 어려움에 대한 고충을 토로하였거니와, 전대 작품의 집적 정도에 비례하여 새로운 작품 창작에 굉장한 제약이 가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이 도리어 작자들의 창작 의욕이나 경쟁 심리를 고취하여 치열한 창작 현장으로서 많은 작품을 산출하였다.
먼저 누각 누 자를 포함하는 하평성 우 자 계열의 글자를 운자로 사용한 한시 작품은 그 계열의 글자 56자 중 3분의 1이 넘는 20자를 운자로 사용한, 누각과 관련한 상상력을 극에 이르기까지 밀어간 박상(朴祥)의 장편 칠언배율 한시 작품을 낳으면서 창작의 가능성을 활짝 넓혀 놓았다. 이황(李滉)은 박상의 장편 칠언배율이 시판으로 걸리자 영남루 한쪽이 기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다음 하늘 천 자를 포함하는 같은 하평성 선 자 계열 글자를 운자로 사용한 한시 작품은 고려 후기 성원도의 시를 원운으로 차운한 작품이 다수 창작되었다. 이안눌(李安訥)의 말로는, 임진왜란 전까지 영남루에는 성원도의 시를 차운한 작품만도 무려 200여 수가 시판에 새겨져 걸려 있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지금도 337수[임진왜란 이전 218수]가 전한다. 그 결과 영남루는 조선 전기부터 일찍이 시로 이름을 떨치는 누각, 곧 시루(詩樓)로서 명성이 높았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영남루는, 부벽루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무대였기 때문에 제영 한시 작품 창작이 누각과 경관보다는 중국 사신과의 수창에 집중되고, 촉석루가 진주성 전투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제영 한시 작품 창작이 삼장사와 논개에 집중된 것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밀양 영남루는 조선 전기 영남루의 명성이 중국까지 알려져서 『삼재도회(三才圖繪)』에도 소개되어 있다. 『삼재도회』는 명나라 왕기(王圻)와 그 아들 왕사의(王思義)가 천하의 명승지와 누정을 소개하기 위하여 엮은 책자이다. 우리나라 누정으로는 영남루가 강원도 양양에 있었던 상운정(祥雲亭)과 함께 올라 있다. 상운정이 소개된 것은 금강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영남루가 소개된 것은 시루로서의 명성, 다시 말하면 영남루 제영 한시 작품만이 앞서 언급한 대로 전통시대 누정 제영 한시 작품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인 누각 누 자를 포함하는 하평성 우 자 계열의 글자와 하늘 천 자를 포함하는 같은 하평성 선 자 계열의 글자를 운자로 사용하는 두 유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영남루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중국 어느 누정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밀양 영남루의 랜드마크화]
밀양 영남루는 목조 건축물로서 조형적 우수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부터 이미 시루로서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중국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방대한 문헌자료와 수준 높은 제영 한시 작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밀양 영남루가 주요 무대의 하나가 된 권벌의 밀양부사 재직 시절의 『춘양일기』가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또 임진왜란 이전까지 영남루 제영 시문을 필사해 둔 영남루제영문집 『영남루시운』이 최근 발견되어 일반에 소개되었다. 또 진주 촉석루의 논개나 남원 광한루의 춘향에게 비견될 만큼 많은 이야기와 시문 작품을 낳은 ‘정순(貞純)’의 상징 아랑의 전설이 깃든 아랑각이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관련 문화재와 방대한 문헌자료를 활용하여 밀양 영남루를 밀양을 대표하는 관광 자원, 교육 자원으로 적극 개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