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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186
한자 人文地理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규영

[정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 지리적 요소.

[개설]

진안군은 진안읍을 비롯하여 용담면·안천면·동향면·상전면·백운면·성수면·마령면·부귀면·정천면·주천면의 11개 읍면과 77개 법정리, 303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진안 지역은 동쪽으로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진 백두 대간, 서쪽으로는 주화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 호남 정맥주화산에서 부소산 조룡대까지 이어진 금남 정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앙으로는 영취산에서 주화산까지 이어진 금남 호남 정맥이 진안군을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 유역으로 갈라놓는다.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의 수분령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진안군 북동부 여러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과 함께 용담댐으로 흘러들어 간다. 그리고 이 물은 다시 무주·금산·공주·부여를 거쳐 군산 앞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섬진강백운면팔공산 북쪽 골짜기 신암리 원신암 마을의 위쪽에 있는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백운면·마령면·성수면을 지난다. 두 강의 지류들은 낮은 산지 사이에 여러 방향으로 뻗은 골짜기를 만들면서 주변에 충적지를 만드는데, 진안읍금강의 지류인 진안천의 침식 분지이다.

진안군 전체 면적은 789.11㎢로서 전라북도 내에서 두 번째로 크다. 노령산맥이 남쪽으로 뻗어 있어 임야가 79.9%로 약 611.09㎢를 차지하고 있고, 경지는 13%인데 이 중 전답이 약 88.01㎢이다. 인삼·표고·더덕 등의 특산품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그밖에 공장 용지 0.73㎢, 대지 6.92㎢, 도로 14.78㎢, 기타 67.58㎢로 구성되어 있다.

진안군에는 전주-거창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소태정을 통하는 4차선 도로가 개통되어 전라북도 전주 지역과의 교통이 원활하게 되었다. 또한 국토 종합 계발 계획에 의해 대전-통영 간 고속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익산-포항 간 고속 도로가 전체 개통되면 전라북도와 경상도 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가 될 전망이다.

전라북도의 젖줄인 용담댐이 완공되어 용담면을 비롯하여 주천면·정천면·안천면·상전면진안읍 등의 31.4㎢가 수몰되었지만, 전주·군산·익산 등지에서 용담호를 통해 맑고 깨끗한 생활용수 및 공업용수를 공급받고 있다.

[진안의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안 지역은 본래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혹은 월랑(月良)]·마돌현(馬突縣)·물거현(勿居縣)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에 편입되었다. 신라 경덕왕난진아현진안현이라 개명하여 벽계군(壁鷄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마돌현마령현이라 개명하여 임실군의 관할 하에 두었다. 물거현청거현이라 개명하여 진례군(進禮郡)[현 금산군]의 관할 하에 두었다.

고려 초에 이르러 진안현마령현 모두 전주에 소속시켰다가 그 후 감무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는 진안 감무가 마령을 겸무하도록 하였다. 1413년(태종 13) 마령현이 폐치되어 마령 지역이 진안현에 속하게 되었고, 감무를 진안 현감으로 고쳤다.

한편 용담은 1313년(충선왕 5)에 용담현으로 고쳐 현령을 두었는데,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1895년 전국이 23부로 개편됨에 따라 진안현은 진안군으로, 용담현용담군으로 개칭되어 남원부에 속하였다. 그 이듬해인 1896년 13도로 개편되자 이들 지역은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진안군이 용담군을 병합하여 11개 면을 관할하였다. 1979년에 다시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진안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진안군은 1읍 10면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83년에는 대통령령 제11027호에 따라 마령면 연장리진안읍으로, 정천면 구룡리상전면으로 편입하였다. 1987년에는 대통령령 제12007호로 상전면 운산리진안읍으로, 정천면 용평리상전면으로 편입하였다. 1994년에 대통령령 제14434호로 동향면 신송리 일부 마을이 장수군으로 편입되면서 진안군은 1읍 10면 297개 마을이 되었다.

[인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용담현의 인구가 86호 274명, 진안현의 인구가 169호 72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지도서』[1759]에 의하면 용담현의 동면(東面)·서면(西面)·남면(南面)·북면(北面)·현내면(縣內面)을 합하여 호적에 편성된 민호는 3,311호이고, 남자는 5,460명이며, 여자는 4,491명이다. 진안현은 읍내·상도면(上道面)·하도면(下道面)·탄전면(呑田面)·여면(與面)·일동면(一東面)·이동면(二東面)·일서면(一西面)·이서면(二西面)·두미면(斗尾面)·마령면(馬靈面)·일북면(一北面)·이북면(二北面)·삼북면(三北面)을 합하여 전체 민호는 5,727호이고, 남자는 1만 722명이며, 여자는 1만 1434명이다.

진안군의 세대는 2005년 전체 1만 1622호였던 것이 2012년에는 1만 2480호로 증가하였다. 인구는 2005년에 남자 1만 4758명, 여자 1만 4441명으로 전체 2만 9199명이었던 것이 2012년에는 남자 1만 3630명, 여자는 1만 3623명으로 전체 2만 7253명으로 조사되었다. 7년 만에 인구가 전체적으로 약 6% 정도 감소하였다. 외국인은 2006년에 303명이었는데, 2012년에는 남자 79명, 여자 211명으로 전체 290명으로 조사되었다.

[문화유산]

진안 용담댐 수몰 지구 내 발굴 조사에서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함께 조사되었다. 이는 백제의 중앙과 가야를 최단 거리로 이어주던 간선 교통로와 백제가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백제와 신라를 연결해 주던 내륙 교통로가 진안군을 통과했던 것과 관련이 깊다. 즉 진안 지역이 금강을 중심으로 만경강과 동진강·섬진강·남강·황강 유역을 하나로 묶는 내륙 교통로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진안군을 중심으로 그물 조직처럼 잘 갖춰진 내륙 교통로를 이용하여 사람의 왕래나 물자의 교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진안군은 평균 고도가 500m에 이르는 고원 지역으로서 호남의 지붕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자연 지리적 특성상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마을에는 돌탑·입석·마을숲 등의 비보(備補)를 담당하는 여러 가지 신앙의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돌탑이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입구에 원통형으로 돌을 쌓아 조성한 것을 말한다. 진안 지역에는 돌탑이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마을에서 중요한 신앙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다양한 탑 신앙이 유지되고 있다. 돌탑 혹은 마을의 입구 등에 조성된 마을숲은 마을의 역사·문화·신앙의 중요한 요소이다.

진안군 내에 있는 지정 문화재는 보물 2점, 명승 1점, 천연기념물 3점,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6점,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1점, 전라북도 민속 자료 1점, 전라북도 기념물 4점,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10점에 이른다.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로는 금당사 괘불탱과 조선 개국 초에 원종 공신에 책봉되었던 성석린의 성석린 좌명공신 왕지가 있다. 또 진안 마이산이 명승으로 지정되었고, 천연기념물로는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지·진안 은수사 청실 배나무·진안 평지리 이팝나무 등이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전라북도 지정 문화재로는 유형 문화재에 강정리 오층 석탑·금당사 목불 좌상·운산리 삼층 석탑·천왕사 대웅전·회사동 석탑·황방촌 영정이 있으며, 백운면의 매사냥이 무형 문화재로, 백운면 물레방아가 민속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에는 마이산 탑·만육 최양 선생 유허비·태평 봉수대·가림리 줄사철나무 등이 있고, 문화재 자료에는 금당사 석탑·수선루·영모정·와룡암·용담 향교 대성전·이산묘·지선당·주천 서원·진안 향교 대성전·천황사 부도·태고정 등이 지정되어 보호·관리되고 있다. 이 외에도 웅치 전적지를 비롯하여 항일·독립운동 및 의병 활동과 관련된 유적지 및 인물들이 많다.

[인물과 성씨]

진안의 토성으로는 진안과 용담을 합쳐 이(李)·전(全)·백(白)·한(韓)·유(庾)·한(韓)·송(宋)·장(張)·가(價)·고(高)·문(文)·임(林)·염(廉)·가(賈)·임(任)씨 성이 있는데, 18세기에 이르면 경주 이씨·수원 백씨·천안 전씨·청주 한씨·김해 김씨·완산 최씨·여산 송씨·옥야 장씨·남양 홍씨·동래 정씨·영산 신씨·함양 오씨·전주 유씨·밀양 박씨·조양 임씨·남원 양씨·거창 신씨[이상 진안현 지역]와 제주 고씨·남평 문씨·용담 염씨·나주 임씨·풍천 임씨·용담 가씨[이상 용담현 지역] 등으로 정리된다.

조선 개국 초에 원종 공신에 책봉되었던 성석린의 후손의 일부가 진안 지역에 살게 되었고, 세종 대 정승 황희의 후손들이 진안에 대대로 거주하였다. 숙종 대에 우의정까지 지냈던 만암 이상진이 진안 출신이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칼로 아버지를 헤치려고 하자, 이를 막아 효자로서 왜적을 감화시켰던 신의련도 진안 백운 출신이다. 임진왜란김수·김정 등의 의병 활동은 일제 강점기의 의병 활동과 항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이석용이 1907년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기우만·전해산 등과 함께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외에도 정찬석·최재학·임병찬·문태수 등이 이 지역을 거점으로 활발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제 산업]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용담현진안현의 산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용담현의 토질은 메마른 편이고, 기후는 일찍 추워진다. 간전(墾田)이 1,851결인데, 그 중 논은 약 11%를 차지한다. 주로 생산되는 것은 오곡과 뽕나무·삼·닥나무·왕골이고, 토산물로는 송이, 공물로는 살쾡이 가죽·자리·족제비털·지초·대추·석이·배·꿀·밀[黃蠟]·칠(漆) 등이 있다. 약재로는 백복령(白茯苓)·녹각상(鹿角霜)·바디나물 뿌리[前胡]·복신(茯神)·겨우살이풀 뿌리[麥門冬]·산양이뿔[羚羊角]·흰바곳[白附子] 등이 채취된다.

진안현용담현과 마찬가지로 땅은 메마르고 일찍 추워진다. 간전(墾田)이 2,772결인데 그중에서 논은 약 25%이다. 토산물로는 오곡·뽕나무·삼[麻]·닥나무·왕골이 있고, 공물로는 족제비털[黃毛]·칠(漆)·대추·석이·꿀·밀[黃蠟]·가뢰[斑猫]·여우 가죽·살쾡이 가죽·자리가 있다. 약재(藥材)로는 백복령(白茯苓)·녹각상(鹿角霜)·복신(茯神)·바디나물 뿌리[前胡]·당귀·백작약(白芍藥)·겨우살이풀 뿌리[麥門冬] 등이 채취된다. 진안현 마령 두언리(豆彦里)에 자기소가 1곳 있었고, 마령면 동림리(東林里)에는 도기소 1곳이 있었다.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 마을에는 고려 청자 초기 도요지가 있다. 현재까지의 지표 조사를 통해 진안군에서 그 존재가 파악된 도요지는 100여 개소에 달한다. 고려 초기의 순청자부터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 옹기 등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솥내 옹기에서는 지금도 옹기를 생산하고 있다.

2012년 현재 진안군의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37%를 차지하고 있어 진안군의 산업 구조는 농업 중심인 것으로 보이지만, 진안군이 산간 지대에 속해 있어 경지 면적은 7,571㏊로 12.7% 정도이다. 논은 3,168㏊, 밭은 4,403㏊이며, 가호당 경지 면적은 논 0.72㏊, 밭 1㏊이다. 진안군에는 298개의 저수지·보·관정 등 수리 시설이 있어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콩·감자류 등으로 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농업 구조 개편과 함께 고원성 기후를 이용하여 채소·과수·담배·인삼 등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무·배추 등의 고랭지 채소는 성수산·덕태산·운장산 등지의 기슭에서 많이 생산되며, 사과·배·포도 등의 과일은 진안읍을 중심으로 재배되고 있다. 진안군에서는 인삼·더덕·고추·곶감·인진쑥·표고버섯·한과·흑돼지 등을 8품(品)이라 하여 진안군 특산품으로 선정하였다. 진안읍을 중심으로 한우·돼지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군에서는 특산품으로 토종 검정 돼지 사육을 장려하고 있다.

인삼은 금산군과 인접한 용담면·안천면·정천면·주천면 등이 주요 산지였으나 지금은 진안군 전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다. 생산량은 2002년 현재 575톤이다. 인삼은 연작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군내에서는 점차 경작 가능한 곳이 줄어들고 있어 인삼 경작자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여 재배하기도 한다. 진안군 관내에서 3,110톤이 생산되는데, 이것은 전국 생산량의 약 20%에 달하는 것이다.

천연 자원은 18개소의 광산이 있었으나 2002년 말 기준으로 거의 휴광중이고, 동향면의 석회석 광산 1곳만 가동 중이다. 산간 지대라는 불리한 입지 조건으로 공업은 낙후되어 있다. 1990년 진안읍에 연장 농공 단지를 조성하면서 10개 업체가 입주하여 인삼 가공 제품·전자 제품·음료·식품 등을 생산하면서 200여 명의 고용 창출 효과는 물론 50여 억 원의 수출 실적을 올려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03년에 조성된 진안 제2 농공 단지에도 13개 업체가 입주하여 가동 중에 있으며, 미분양 구역에는 홍삼 한방 타운과 연계하여 홍삼과 약초 등 부존자원을 활용하는 업체에 우선 분양을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진안 제2 농공 단지에 입주한 한국 고려 홍삼 조합에서는 2004년 대만에 103만 달러의 홍삼을 수출하기로 하는 등 진안 홍삼을 전 세계에 홍보하며 수출 확대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상업 활동을 보면, 상설 시장 1개소·정기 시장 9개소·특수 시장 1개소가 있었다. 상설 시장은 진안읍진안 시장으로, 정기 시장·수삼 시장·인삼 시장을 겸하고 있다. 정기 시장은 상전면을 제외한 각 읍·면 소재지에서 열렸다. 그러나 인구 감소와 교통의 발달로 인해 진안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폐지된 상태이다.

[관광]

진안군은 백두 대간의 금남 호남 정맥·호남 정맥·금남 정맥의 세 개의 큰 정맥이 지나고 있어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탑사·천지탑·역고드름으로 유명한 마이산을 비롯하여 주천의 운일암·반일암은 여름철 피서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운장산·구봉산·지장산에는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호수와 수려한 자연 경관이 어우러진 용담호 주변은 관광지이자 전원 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 밖에도 성수면 좌포리에는 한여름에 에어컨처럼 찬바람이 나오는 바위구멍인 풍혈(風穴)과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이 솟는다는 냉천(冷泉)이 있어 진안의 다양한 볼거리를 만든다.

[민속]

1. 진안 백운의 매사냥

진안 백운의 매사냥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매사냥 방식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매사냥 기능 보유자였던 전영태가 죽은 후 백운면 운교리에 살고 있는 박정오가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그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매사냥은 고조선 시대에 북방 민족인 숙신족에게서 전해졌으며, 백제 때 이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고려 때에는 응방이라는 관청을 두고 국가 차원에서 매를 사냥하고 사육하여 원나라에 조공품으로 바쳤다. 조선 시대에는 내응방을 두고 군역 대신 매를 잡게 하였다. 이러한 매사냥의 명맥이 이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매사냥에는 그 해에 태어난 새끼를 집에서 길들여서 사냥하게 하는데, 이를 보라매라 한다. 매를 부려 꿩을 잡는 사람은 봉받이·매받이 등으로 불리며, 매사냥을 할 때에는 봉받이 외에 4~8명의 털이꾼과 매와 꿩이 날아간 방향을 털이꾼에게 알려 주는 매꾼이 합세한다. 매사냥은 늦여름부터 겨울까지 행해진다.

2. 민속 신앙물 돌탑의 고장 진안

돌탑이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입구에 원통형으로 돌을 쌓아 조성한 것을 말한다. 돌탑은 마을에서 중요한 신앙적 기능을 수행해 왔고, 현재에도 다양한 탑 신앙이 이어지고 있다. 진안군에는 돌탑이 많이 남아 있을 뿐 만 아니라 현재도 새로운 탑들이 조성되고 있다. 따라서 진안군의 돌탑은 축제 문화로도 발전시킬 수 있는 귀중한 민속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3. 동제

진안군의 곳곳에서는 당산제·거북제·깃고사 등 다양한 형태의 동제가 시행되고 있다. 깃고사는 동향면 능금리 능길 마을에서는 지내는 동제이다. 깃발은 1800년대 만들어진 것으로 ‘능사사명(能社司命)’이라 새겨져 있다. 깃고사를 지내면서 풍년을 기원한다. 예전에는 깃발을 논에 세웠으나 지금은 능길 회관 앞에 세운다. 제일은 음력 정월 초사흗날이고, 제를 지내고 한 달 후인 2월 초사흗날에 깃발을 떼어 놓는다.

진안읍 가림리 은천 마을에서는 거북제와 당산제를 함께 지내고 있다. 제는 정월 보름날 마을 뒷산 사자골에 있다는 샘물과, 마을 앞 돌거북 및 당산나무에 지냈다. 거북제를 지내게 된 것에는 유래가 있다. 마을을 마주보는 서촌 싸리봉이 화산(火山)이어서 1919년에 화재가 나 마을 전체가 불타 없어지는 일이 생겼다. 이후 이 마을을 지나가던 승려가 화재를 막을 비방으로 거북을 만들라고 하여 자연석을 거북 모양으로 다듬어 세웠다.

거북은 물에 살기 때문에 화재막이로서 역할을 한 듯하다. 그리고 방죽을 2개 만들고 나무로 용의 형상을 만들어 묻기도 했다. 이 모두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런데 20여 년 전 돌거북을 도난당하면서 거북제도 지내지 않다가 2005년에 전통 마을 숲 복원 사업 공모에 선정되면서 이를 계기로 마을 문화를 복원하기로 하였고, 지금은 다시 거북을 세우고 동제를 지내고 있다.

이 밖에 배넘실 마을에서는 홍수 설화와 관련하여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당산제는 마을 회의에서 결정하는데 대체로 정월 초사흗날 경에 거행된다. 만일 마을에 부정한 일이 발생할 경우 정월 열 엿새날로 연기하게 된다. 섣달 그믐이 되면 마을에서 나이가 들고 부정 타지 않은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하고 제사 준비에 들어간다. 초이튿날 풍물을 치며 걸립을 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마을 기금으로 진안장에 가서 제수 물품을 구입해 온다. 당산은 이 마을 앞에 오래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3그루의 수목 당산이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 아침에 당산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마을 장정들이 나와서 왼새끼로 금줄을 치는데, 당산 3그루를 5번 둘러 감는다.

당산제는 저녁 때 거행한다. 당산 제물로는 돼지머리·삼실과·떡과, 여자들이 집집마다 쌀과 팥을 걷어 끓인 팥죽을 함께 올린다. 제사는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정해 유교식 제사 방식을 따르는데 기원 독축을 하고 마을 주민들이 각기 소지를 올리고 음복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제사가 끝나면 여자들이 팥죽을 당산 주변에 뿌리면서 액이 물러가기를 기원한다. 당산 옆에는 입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장수가 대덕산에서 짐을 지고 오다가 이곳에 쉬면서 지게의 광대목을 꽂은 것이 입석이 되었다고 한다.

노채 마을에는 마을이 풍수지리적으로 배의 형국이기 때문에 세웠다고 전하는 2개의 짐대가 있다. 배가 안정되게 운항할 수 있도록 돛대 역할을 하는 짐대를 세워 마을의 안정을 기원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 뒷쪽 짐대는 짐대거리라 부르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가에 세워졌는데, 감나무에 가려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전 짐대는 썩어 없어지고, 5년 전에 밤나무로 지금의 짐대를 만들어 다시 세웠다고 한다. 60여 년 만에 다시 세워진 짐대는 높이 6~7m, 둘레 30㎝이다. 마을 뒤쪽 짐대는 기둥에 Y자 모양의 가지가 올려져 있었고, Y자의 세 끝 부분에 오리 모양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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