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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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道玄 |
영어공식명칭 | Park Dohyu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상범 |
출생 시기/일시 | 1865년 2월 5일 - 박도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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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박도현 이리 장날 만세 시위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박도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4년 - 박도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
출생지 | 춘포면 -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
거주|이주지 | 춘포면 -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
활동지 | 오산면 -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도현(朴道玄)[1865~1919]은 1865년 2월 5일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오산면(五山面)에서도 큰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산면은 1919년 3월 26일에 펼쳐졌던 만세 시위로 인해서 일본군 제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며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박도현은 문용기(文容基)·장경춘(張京春) 등과 함께 4월 4일 이리 장날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기독교인과 학생 등 200여 명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장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1,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중으로 불어났다.
일본군은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일본인 농장원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열을 이끌던 박도현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묘소]
박도현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453호이다.
[상훈과 추모]
1994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도현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