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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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本人企業-銀行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Enterprises & Bank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익산 지역에서 경영한 기업과 은행.
[개설]
군산 개항 이후 일본인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군산과 가까운 익산 지역에도 일본인이 이주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익산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미곡을 가공하는 정미업, 양조업 등에 종사하였고 기업 활동에 필요한 금융기관도 설립하였다.
[정미업·양조업]
익산 부근의 평야에서 생산하는 미곡은 생산량이 많기 때문에 벼인 채로 운반하면 현미 또는 정미로 가공하여 반출하는 것에 비하여 운임 등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고 운반 과정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리를 비롯하여 기차역이 있는 황등, 함열 등지에 자연스럽게 부피를 줄이면서 운임을 줄일 수 있는 정미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익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정미업을 시작한 것은 1911년 12월 청주에서 이리로 이주해 온 이마이 소타로[今井宗太郞]의 금정정미소이다. 이후 군산에서 미곡상을 하던 히다카 치요키[日高千代吉]가 이리에 정미 공장을 세우는 등 정미업은 익산 지역에서 가장 각광받는 업종이 되었다. 1928년 당시 이리에만 35개의 정미소가 있었다고 하며 이외에도 함열의 촌정(村井)정미소, 황등의 삼(森)정미소 등 기차역이 있는 곳에서는 정미업이 발달하였다.
정미업 다음으로 많은 것이 양조업이었다. 익산 지역에서는 술의 맛을 좌우한다는 질 좋은 쌀이 많이 생산되었고 장유(醬油)에 필수인 보리와 대두 또한 풍부하여 쉽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양조업을 시도하려고 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물이었다. 조선의 지하수에는 대부분 다량으로 유기물이 포함되어 있거나 짠 맛이 있어서 양조용으로는 사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산 특히 이리 지역의 수질은 모두 담수로 염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물의 용출양도 풍부하였기 때문에 양조업을 경영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익산군내 동업 조합의 조합원이 31명에 달할 만큼 양조업이 성업하였다.
[익산 지역의 금융]
익산 지역에 일본인 이주가 증가하고 기업 활동이 증가하면서 금융 기관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익산 지역 일본인들은 1912년 전주 농공은행에 지점 설치를 요구하는 한편 저금조합을 조직하는 등 노력하였다. 1913년 익산금융조합을 설립하였다. 1919년 여산금융조합을 설립하였다. 1920년 이리금융조합을 설립하였다. 1917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이리에 지점을 설치하고 소유 농지에 대한 관리는 물론 지역의 부동산 담보 대출 등 금융 업무를 시행하였다. 일본인 기업가들에게 사업 자금을 운용해 주기 위해 설립한 농공은행이 조선식산은행으로 개편되면서 1918년 이리에 식산은행 이리지점이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