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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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下第一石材黄登石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윤미 |
[정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만든 돌, 전라북도 익산에서 생산되는 황등석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
[개설]
익산 황등에서 나는 화강암을 ‘익산 황등석’이라고 한다. 익산 황등석은 황등과 낭산을 중심으로 함열, 삼기, 여산, 금마를 아우른 지역에서 주로 채취된다. 예로부터 익산의 화강암은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할 정도로 우수성을 인정받아 왔다. 조선 철종 9년(1858)경부터 청나라인에 의하여 황등의 지명을 딴 ‘황등석’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익산 황등석에는 백제의 후손으로 알려진 석공 아사달 이야기와 황등석 운송의 플랫폼인 황등역, 그리고 운송노동요로 불리던 「목도소리」, 황등 석공들의 음식으로 알려진 비빔밥까지 다양한 이야기와 문화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전국돌문화축제’는 2012년까지 명맥을 이어 오다가 현재는 폐지되었으나 익산의 돌조각 명장 김옥수에 의하여 익산 돌 문화축제에 대한 방향성이 다시 논의되고 있다.
[익산의 황등석과 황등역 그리고 목도소리]
익산(益山)은 예로부터 ‘산에서 이익을 보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익산 미륵산 줄기인 낭산과 황등 지역을 중심으로 함열, 삼기, 여산, 금마 지역은 모두 화강암을 노잣돈처럼 품고 있다. 그 면적이 1,072㏊에 이르며, 매장량 또한 10억 6200만㎡로 추정된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양이다. 익산에서 채취되는 화강암은 삼국시대부터 애용될 정도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돌의 성질이 단단하고 철분 함량이 적어 오랫동안 자연 상태에 있어도 부식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그 유명세에 힘을 더한다. 색깔 또한 밝은 회백색이면서 쑥색의 입자가 깔려 있어 비에 젖어도 은은한 쑥색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익산 화강암의 품질은 전국 최고로 친다.
석재의 이름은 보통 산지의 지명을 그대로 따서 부른다. 그런 이유로 익산 지역에서 채취되는 돌은 모두 ‘황등석’이라 불린다. 익산의 화강암이 ‘황등석’으로 불리게 된 본격적인 역사는 조선 철종 때로 전해진다. 조선 철종 9년경 청나라인들은 익산 황등에서 화강암을 기업적으로 채취하였다. 이는 황등석의 역사가 청나라인들의 화강암 채취 과정에서 발현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익산의 황등석은 누구라도 탐을 낼 만큼 석질이 우수하고 내습성이 좋아 고급 석재 공예품으로 자주 활용되었다.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국보 제289호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보물 제45호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인 태봉사 삼존석불 등은 황등석이 쓰인 대표적인 석조 문화재이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은행, 중앙청, 서울역 등도 황등석이 활용된 유명 석조건물로 회자된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황등석의 유명세는 계속되는데 청와대의 영빈관, 국회의사당, 독립기념관 등과 같은 의미 있고 유서 깊은 석조물의 축조에도 황등석은 어김없이 애용되었다. 그만큼 황등석은 나라에서도 인증하는 최고의 석재로 통한다.
황등석은 보통 철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익산의 황등석을 이야기할 때 황등역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일제 강점기의 황등역은 일제의 황등석 수탈 현장으로 활용되었다. 집채만 한 돌들이 황등역에 모였다가 순간 사라지는 모습은 황등 지역 석공들의 눈에는 매우 뼈아픈 풍경이었다. 대장촌역[춘포역]에서 쌀을 실어 군산항으로 향하였던 그 무지막지한 기차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황등역에는 늘 석공들의 「목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허여-허여차허여/ 허여차 허여/ 내려간다 발 조심/허여차아 어여차/ 진 데 있어 주추움/ 허여차 허여”
「목도소리」는 지역과 상관없이 돌이나 나무를 나르는 사람들이 함께 불렀던 운반노동요 중 하나다. 보통 노래의 사설은 대부분 여러 사람이 발을 함께 맞추거나 숨을 고르기 위한 소리로 구성된다. 대부분이 의미 없는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황등석을 일본인에게 빼앗겨야만 했던 석공들에게는 황등역에서의 그 의미 없는 「목도소리」의 사설마저 서글픈 노랫가락이었을 것이다.
[백제 후손의 석공, 신라로 스카우트되다]
전국 석재 산업 중 익산의 석재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70%이다. 전국의 석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석공인의 90% 이상이 황등 사람이라고 한다. 1973년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시행한 불국사 석조 복원 공사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석공인 16명을 모집한 바 있는데, 그중 황등 출신 석공인이 14명이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익산 황등 석공들의 큰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이러한 자부심의 내면에는 백제의 후손으로 최고의 석공이었던 아사달이 자리하고 있다. 아사달의 유명세는 멀리 신라 땅으로까지 전해지게 되는데, 김대성(金大城)[700~774]이 불국사를 발원하면서 석가탑을 세울 때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으로 알려진 아사달을 맨 처음으로 경주로 불러들인다. 김대성은 화려하고도 우아한 백제의 석공 기술을 자신이 스카우트한 아사달을 통해 신라 문화에 녹여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백제 후손인 석공 아사달은 실제 현실 속의 인물은 아니다. 불국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효선편(孝善篇)」에 등장하는데, 불국사의 시작을 경덕왕 10년(751)으로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660년에 멸망하였으니 백제의 석공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사달의 전설이 아직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현진건의 장편소설 『무영탑』의 영향이 크다. 이 소설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상황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불국사 고금창기』의 무영탑 전설 기록에도 아사달은 이름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석가탑은 당나라의 장인 ‘장공’이라는 사람이 만들었으며, 그의 누이 이름이 ‘아사녀’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무영탑』에서 아사달은 익산 사람이 아닌 부여 사람으로 묘사된다. 실제 소설 속에서도 “부여는 신라 땅이 아닌가베.”라는 문장이 기록되어 있어 석가탑은 백제 멸망 이후 만들어진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여전히 석가탑을 백제의 석공 아사달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을까. 현진건의 『무영탑』 속 아사달과 백제의 장인으로 선덕여왕 12년(643)에 신라에 가서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웠다는 『삼국유사』 속 아비지(阿非知)의 이야기가 혼재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예로부터 백제 땅에는 돌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아사달이라는 석공이 백제 최고의 솜씨를 자랑한다고 퍼트려 익산 지역에 뛰어난 석공이 많았음을 은연중 암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실이야 어쨌든 간에 아사달에 대한 전설이 허구임에도 아사달과 석가탑의 전설 속에서는 여전히 황등 지역이 석조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말해 준다. 아울러 백제 문화의 석조 기술이 한 지역에 편중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익산 황등석이 불교문화와 긴밀하게 부합되어 있어 불교 건축물이나 조각에 적합한 재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아사달에 대한 전설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아마도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은 신라 때의 승려 자장[590?~658?]이 황룡사의 탑을 세우기 위하여 맨 먼저 백제의 명공 아비지를 스카우트하였던 사실을 선행학습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아사달의 석가탑의 전설과 영지(影池) 연못 아사녀의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없는 탑] 전설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백제 후손이었던 아사달과 같은 석공들의 인내와 예술혼의 가치가 얼마나 우수하였는지를 우회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아사달의 후예들 그리고 도제제도]
익산 황등 석공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석공을 하려면 가난에서 시작해 역사로 끝내야 한다.” 이 말 속에는 석공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겨운지를 드러낸다. 석공들은 학문보다는 몸으로 직접 돌을 만지고 익히는 가난한 장인들이었다. 석공들은 보통 돌에 대한 이론보다는 실제 현장에서 돌을 보면서 그 성질을 이해한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적인 요인에는 결국 경제적 능력에 대한 고민이 뒤따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경제적인 능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사람이 결국 아사달과 같은 석공의 길을 걷는다. 끝까지 남아 백제의 석조 문화를 잇는 아사달의 후예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석공의 삶은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고되고 힘들다. 여기에 덧붙여 황등 석산에서 채취되는 집채만 한 원석을 보면서 석공들이 느껴야 하는 중압감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이는 황등석에 숨어 있는 예술적인 아우라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예술적 혼에 대해 이탈리아의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나는 대리석 안에 들어 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가 나올 때까지 돌을 깎아 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황등석을 매일 깎고 있는 익산의 석공들도 미켈란젤로와 같은 심정은 아닐까.
익산의 석공들은 솜씨 좋은 석공이 되기 위하여 대부분 도제제도(徒弟制度)를 거친다. 황등에서 석공 도제제도는 1990년대 초까지 맥을 이어 왔는데 일반적으로 원석을 가공하는 기능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기간을 3년으로 본다. 그 기능을 익히면 석공들은 비로소 도제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돌을 다루는 수련 과정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석공들 대부분이 정과 쇠망치에 의존하여 돌을 다루었기 때문에 돌의 성질과 도구의 쓰임에 대해 잘 알아야 하였다. 연장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돌을 잘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석공의 망치는 목수의 망치와 각도부터 다르다. 석공의 망치는 75도 각이며, 목수의 망치는 90도 각이다. 내려치는 높이와 내려오는 각도에 따라 돌이 떨어져 나가는 정도가 다르므로 석공은 설계도를 읽어 내는 능력도 겸비해야 하였다. 그래서 황등의 석공들은 도제제도를 포함하여 총 15년 정도의 경력은 되어야 진짜 황등석의 성질을 알아볼 수 있으며, 스스로 조형물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진다고 장인들은 말한다.
황등에는 황등석의 제1세대로 불리는 석불상 전문 김삼득을 비롯하여 석공예의 이종천, 윤순복, 양필수, 박명수 등의 명인이 아사달의 맥을 이어 오고 있다.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2세대 석공은 오영근, 김은중, 한한식, 허한천, 김수만, 문익주 등이 있다. 현재는 권오달, 김옥수 명장들이 있으며 200여 개의 석재 가공업체에 1,000여 명의 종사원들이 석재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러한 황등 석공들의 끊임없는 노력은 현재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는 요인이 된다. 특히 황등의 물다듬무늬석은 일본에 연간 57억 원 정도가 수출되고 있다.
[석공들의 음식은 정말 비빔밥?]
석공들의 땀과 노력이 모여 석공의 고향이 된 황등에는 석공을 위한 음식이 있다. 바로 비빔밥이다. 매일같이 돌을 만지고 다듬는 석공들에게는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황등비빔밥에는 이 지역 석공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전해지는 말처럼 황등의 비빔밥이 석공들에게 가장 만만한 음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황등비빔밥은 돌을 다루는 서민들이 먹기에 비싼 음식이었다. 오히려 돼지국밥 같은 음식이 더 석공들의 음식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비빔밥이 유명하지만, 비빔밥 같은 건 잘했지. 돼지국밥도 옛날에 많이 팔았지. 그리고 비빔밥을 지금처럼 가게에서 하는 게 아니라 5일장마다 팔았지. 근데 비빔밥도 여간해선 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먹지도 못하고. 양도 적고 비싸기만 항게. 많이 먹은 사람도 없고 더러 한 번씩 그냥 누가 사주거나 어쩌거나 허면 먹고, 내가 사 먹더는 못허고. 근디 그게 그렇게 맛이 있더라고 배고플 때잉게.”[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구술 채록]
오히려 황등비빔밥은 불가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석공들에게도 조심해야 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기본적으로 석공들은 석상과 석탑을 만들기 위하여 최소 5년, 석상에는 최소 20년의 수련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불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가의 제자들은 석상을 조각하는 기간에는 의무적으로 몇몇 음식을 피하였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비빔밥이었다. 현재 황등 지역에 남아 돌을 만지는 석공들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예전에는 중요한 돌 작업을 앞두고 실제 비빔밥을 먹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비빔밥을 비며 먹다 보면 그 기운이 돌고 돌아 돌이 으깨질까 두려워서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익산 황등의 비빔밥이 석공들의 대표 음식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또한, 돌로 먹고사는 석공들에게 가장 만만했을 비빔밥은 석공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그것은 전국 최고의 화강암인 황등석을 온 생을 바쳐 자유롭게 다루고 싶었던 황등 석공들의 예술혼이 마음껏 먹지 못하였던 비빔밥에 그들의 소망으로 비벼져 나온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