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1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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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川面新石里-寺 |
이칭/별칭 | 폐허가 된 납돌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신석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주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6년 - 「남천면 신석리의 납돌사」 『경산문화유적총람』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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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2년 - 「남천면 신석리의 납돌사」 정경환으로부터 채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5년 - 「남천면 신석리의 납돌사」 「폐허가 된 납돌사」라는 제목으로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 「남천면 신석리의 납돌사」 「폐허가 된 납돌사」라는 제목으로 『경산문화대사전』에 수록 |
관련 지명 | 납돌사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신석리 |
채록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신석리 |
성격 | 인물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안동 권씨|밀양 박씨|납돌사 주지 스님 |
모티프 유형 | 폐사|단혈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신석리 마을 뒷산에 있었다는 납돌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남천면 신석리의 납돌사」는 남천면 신석리 마을 뒷산 기슭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납돌사가 폐사된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혹은 불경이 더 잘들리게 하기 위해서 물길을 돌리려다 산의 혈을 끊었기 때문이라는 지명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경산문화유적총람』에 「남천면 신석리의 납돌사」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채록 시기와 채록 장소가 명확하지 않다. 2005년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간행한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 「폐허가 된 납돌사」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2002년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신석리 정경환[남, 당시 68세]에게 채록한 것으로, 2009년 경산시립박물관에서 간행한 『경산문화대사전』에 「폐허가 된 납돌사」라는 제목으로 인용되어 있다.
[내용]
남천면 신석리 마을 뒷산 기슭에 신라 선덕여왕 시대에 세웠다는 납돌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폐사되었다. 그 원인으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첫번째는 농사를 짓기 위해 산을 파헤친 이야기이다. 이 부락에 처음 정착하였다는 안동 권씨와 밀양 박씨가 북쪽 산등성이 너머 시골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 납돌사의 개울물을 산 넘어 보내려고 했다. 산등선을 수십 자 파니 그 속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공사를 계속할 수가 없었고 물을 보내는 공사는 하는 수 없이 중지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는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산을 파해 친 이야기이다. 납돌사의 주지 스님이 불경을 할 때 개울가의 물소리가 너무 요란하여 중생들에게 홍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물길을 돌리려고 땅을 파는 과정에서 산줄기에 피가 솟구쳐 중단하였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번창하던 마을이 삽시간에 각종 재난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사찰과 마을 전체가 폐가가 된 것은 산의 혈이 끊어졌기 때문이라 전해오고 있다.
[모티프 분석]
「남천면 신석리의 납돌사」의 주요 모티프는 ‘단혈’과 ‘폐사’이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산의 혈을 끊게 되자 그 산에 있던 절과 마을이 모두 폐허가 된 것을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불교적 교세확장을 위해서 산을 파헤쳤다고 한다. 농사나 종교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자연의 정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도가 나쁜 것이 아닐 지라도 큰 불운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