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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384
한자 明査官
영어의미역 Examiner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안홍민

[정의]

개항기 관찰사가 시흥농민봉기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경기도 광명 지역에 파견한 관리.

[개설]

명사관은 조선시대 당시 지방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면 도의 감사가 사건 내용의 진상 조사를 위하여 파견하는 관리이다.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의 농촌은 토지가 소수 부호에게 독점되고, 대다수의 농민이 토지에서 배제된 상황이었다. 즉 많은 수의 농민이 소작농의 처지에 있었고, 농업 이외의 다른 수단을 이용하여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도한 조세와 지대, 지방관이나 아전 등의 탐학까지 겹쳐져 농민층은 더욱더 어려운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현재의 광명 지역을 포함한 시흥군 지역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1898년 8월 23일[군수 교체일] 전임 군수였던 문봉오(文鳳梧)의 탐학 및 향리의 횡포에 반발하여 시흥에서는 1차 농민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태의 해결을 위해 경기감사는 두 차례에 걸쳐 명사관을 파견하여 사건을 조사하였다.

[경과]

1898년 1차 시흥농민봉기가 발생하여 시흥군 이서들이 피해를 입은 사실이 알려졌다. 상급 기관인 경기도 관찰부에서는 처음에 성석영(成奭永)을 명사관으로 선임하여 사태의 내용을 조사하도록 하였으나 사건의 조사 내용이 정확하지 못하고 축소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자 1898년 9월 19일에 당시 파주 군수였던 이필영을 두 번째 명사관으로 선임하여 재조사를 지시했다. 이필영은 1898년 9월 20일 시흥군에 들어가 24일까지 조사 활동을 펼치고 관련자를 심문·조사하였다. 그 주 대상은 봉기 주동자 9인과 탐학에 관련된 아전 4인이었다. 명사관 이필영은 농민 봉기의 원인은 전 군수 문봉오의 탐학과 토색, 관속들의 불법적인 중간 수탈로 결론지었다.

한편 농민 봉기의 장두였던 현 광명 지역 출신인 성우경(成禹慶)과 관속인 이종렬, 이희복, 김홍식, 이희장 등을 재수감하였다. 이상의 조치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9월 24일 경기도재판소로 이송하는 한편, 경기도재판소 판사 김영덕(金永悳)은 법률상의 하자 유무를 확인하여 9월 28일 의정부법무대신 신기선(申箕善) 앞으로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탐학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전임 군수 문봉오는 단지 면직(免職) 조치되는 데에 그쳤다.

[의의와 평가]

시흥[광명]에서의 명사관의 활동은 조선 후기 당시 국가가 농민의 봉기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였나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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