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처사가 쓴 풍영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819
한자 葛處士-風詠亭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7년 - 「갈처사가 쓴 풍영정」 전라남도에서 간행한 『전남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갈처사가 쓴 풍영정」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
관련 지명 풍영정 - 광주광역시 광산구 풍영정길 21[신창동 852-1]지도보기
관련 지명 극락강 - 광주광역시 광산구 지도보기
성격 설화|인문전설|유래담
주요 등장 인물 김언거|갈처사
모티프 유형 기인이 써 준 현판 글씨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풍영정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

[개설]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풍영정(風詠亭) 이름의 유래와 현판 글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풍영정 현판의 글씨체가 다른 이유와 임진왜란 때 불에 탈 뻔하였으나 현판 글씨가 오리로 변해서 화재를 막았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7년에 전라남도에서 간행한 『전남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풍영정광산김씨(光山鄭氏) 칠계(漆溪) 김언거(金彦据)[1503~1584]가 지은 것이다. 김언거는 승정원판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매결마을에서 살았다. 김언거가 낙향을 하자 김언거를 아끼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정각(亭閣)을 지어 줘서 당시에는 열두 채나 되는 정각이 들어섰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명종(明宗)[재위 1545~1567]이 칠계의 정각 현판을 당시의 기인(奇人)인 갈처사(葛處士)에게 받아다 걸라고 하였다. 김언거는 많은 선물을 들고 무주 구천동에 산다는 갈처사를 찾아갔다. 김언거는 갈처사를 찾아갔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김언거는 3~4년간 갈처사를 찾아 13차례 무주 구천동을 찾아갔다. 그러다가 14번째에 담배밭에서 담뱃잎을 따고 있던 갈처사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갈처사는 그동안의 고생에 미안해하며 주머니에서 먹을 꺼내고 낫으로 칡넝쿨을 베어 붓을 만들어 ‘풍영정(風詠亭)’이라고 써 주었다.

갈처사는 돌아가려는 김언거에게 집에 가는 길에 절대 글씨를 펴 보지 말고, 현판에 새기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말라고 하였다. 김언거는 칡넝쿨로 대충 써 준 글씨가 영 탐탁지 않았던 터라 돌아오는 길에 현판 글씨를 가만히 열어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풍(風)’ 자가 훨훨 날아 달아나 버렸다. 김언거는 황급히 놀라 글씨를 접어 넣었다. 김언거는 다시 되돌아가서 갈처사에게 사죄하고 다시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갈처사는 자신은 성의 없이 쓴 것이 아니라, 이 세 글자를 쓰기 위해 몸을 숨기고 정성을 들인 것이라 하였다. 다시 ‘풍’ 자 한 자를 쓰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니, 자신의 제자인 황처사를 찾아가라 하였다. 김언거는 반성하면서 황처사를 찾아가 ‘풍’ 자를 받아와서 ‘풍영정’ 현판을 새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왜군이 이곳에 불을 질렀다. 12채의 정각 중 11채가 다 타고, 마지막 풍영정이 불에 휩싸이자 풍영정 현판의 글씨가 물오리가 되어 극락강에 떠올랐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왜군 장수는 불을 끄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오리들이 현판으로 날아와 다시 글씨가 되살아났다. 풍영정 현판에는 이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풍영정 현판의 글씨를 보면 ‘풍’ 자와 ‘영정’의 글씨체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모티프 분석]

「갈처사가 쓴 풍영정」의 주요 모티프는 ‘기인이 써 준 현판 글씨’이다. 설화에 도사나 승려 등은 기이한 능력으로 도술을 부리는 신이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도사나 승려는 설화의 주인공에게 기이한 물건을 주거나 예언 등으로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갈처사가 쓴 풍영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갈처사는 주인공 김언거풍영정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이다. 그리고 갈처사가 써 준 풍영정 글씨 덕분에 풍영정임진왜란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글씨가 다른 것도 아닌 오리로 변하였고, 그 덕에 화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정각은 나무로 지어졌기에 화재에 취약하다. 그런데 새 중에서도 물과 가깝고 하늘도 날 수 있는 오리를 통해 화재를 막은 것이다. 실제로 풍영정 현판의 글씨가 다르게 써진 것은 지금도 확인할 수가 있다. 이 연유에 대한 고민으로 전설이 생겨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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