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굴과 의병장 김세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572
한자 將帥窟-義兵將金世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염승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장수굴과 의병장 김세근」 『광주의 전설』에 수록
관련 지명 백마산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지도보기
관련 지명 장수굴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지도보기
성격 설화|지명설화
주요 등장 인물 김세근|장정들
모티프 유형 인물|지명유래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마을 백마산에 있는 장수굴김세근 의병장에 관한 이야기.

[개설]

「장수굴과 의병장 김세근」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백마산에 있는 장수굴(將帥窟)삽봉(揷峰) 김세근(金世斤)[1550~1592] 의병장에 관한 지명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었다.

[내용]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중앙부에 있는 백마산에는 3m 정도의 굴이 있는데, 이 굴을 장수굴이라고 한다. 이 장수굴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 때 고경명(高敬命)[1533~1592] 장군과 함께 순절한 삽봉 김세근 의병장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김세근은 경상도 함안군 마륜동 출생이다. 김세근은 경상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나, 방계(傍系) 선조인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주도로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연좌(緣坐)를 피하기 위해 가족들이 전라도 흥양[지금의 고흥]과 광주 세하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김세근은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와 함께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자는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간신배들의 반대에 부딪쳐 묵살되었다. 하지만 왜적의 침략을 염려한 김세근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 마을 뒷산인 백마산에 연병장을 설치하고 장정들을 규합하여 무술을 연마하였다. 이 소문이 광주 일대에 퍼져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장정들이 백마산에 모여들었다. 이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세근은 장정들과 함께 고경명의 의병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금산전투에서 장정들과 함께 모두 순절하였다.

당시 김세근 의병장이 장정들을 훈련시킨 백마산 계곡을 '수련골' 혹은 '수련재'라고 불렀다. 현재 백마산에는 장정들이 숙소와 휴식처로 삼았던 채일봉과 당시에 식수로 사용했던 옥동샘이 남아 있다. 백마산 상봉에 깊이가 3m 정도에 달하는 암굴이 있었는데, 김세근 의병장이 이 암굴에 기거하면서 심신을 단련했다고 하여 '장수굴'이라 하였다.

[모티프 분석]

「장수굴과 의병장 김세근」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에 의한 지명유래'이다. 김세근은 왜적의 침략을 우려해 마을 뒤에 있는 백마산 수련골에 장정들과 함께 무술을 연마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고경명의 의병과 합세한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김세근의 행적과 이야기 내용을 미루어 보았을 때, '장수굴'이란 이름은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세근이 유숙하면서 심신 수양을 한 암굴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장수가 있었던 굴이란 의미에서 '장수굴'이란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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