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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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淰 |
이칭/별칭 | 징보(澄甫),도계(道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혜경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유수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징보(澄甫), 호는 도계(道溪).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이고, 할아버지는 현감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유열(柳悅)이다. 아버지는 광덕대부(光德大夫) 유정량(柳廷亮)으로 선조의 딸인 정휘 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여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다. 첫 번째 부인은 응교 엄성(嚴惺)의 딸인 영월 엄씨(寧越嚴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현감(縣監) 윤경(尹敬)의 딸인 해평 윤씨(海平尹氏)이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5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과 사위 모두 판관, 부사, 정랑, 감사 등 주요 관직을 지냈다. 또한 측실(側室)에게서도 3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유심(柳淰)[1608~1667]이 태어나자 선조가 귀히 여겨 주영(朱纓)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할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사사되면서 집안이 일거에 화를 입어 13세에야 비로소 유수업(兪守業)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아버지의 관작이 회복된 후 1627년(인조 5) 사마시에서 장원을 하고 연이어 참봉·시직(侍直)에 임명되었다. 1635년(인조 13) 문과에 급제하여 지제교를 지내면서 승문원에 예속되어 사국(史局)으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미처 임명되기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거가(車駕)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주서(注書)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 전적에 추천되고 홍문관에 선발되었다. 이후로 11년 동안 병조와 이조의 정랑·좌랑, 삼사의 차관,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쳤다. 또한 동부승지부터 도승지, 병조참의와 판결사,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참판 및 우윤과 군기시·내자시의 제조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양주·동래·광주와 영남 및 강화의 유수를 지냈다.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는 지인(知人)의 무고에 연루되기도 하였고, 1641년(인조 19) 보덕에 임명되어 심양(瀋陽)으로 가게 되었으나 아버지의 병환을 이유로 사양하였다가 대참(臺參)을 받아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복귀하여 호서 지역에 어사로서 나아갔으며, 서장관 및 사신으로서 두 번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글재주와 기예가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를 잘 써서 많은 사람이 그의 편지를 소장하곤 하였으나 스스로 글재주가 있음을 내세우지 않았다. 통훈대부 행홍천현감 원주 진관 병마절제도위(通訓大夫行洪川縣監原州鎭管兵馬節制都尉) 윤경지(尹敬之)의 묘갈을 썼으며, 1652년(효종 3)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초보(初譜)를 바탕으로 전주 유씨 최초의 가보(家譜)인 『임진보(壬辰譜)』를 완성·간행하고 그 서(叙)를 썼다.
[묘소]
묘갈에 의하면 양주의 도봉 선영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유심이 유수를 지내기도 했던 당시 양주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를 비롯하여 경기도 양주시, 의정부시, 동두천시[탑동 제외] 등을 포함한 지역이다. 묘소의 현재 주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로서, 두 부인도 여기에 부장(祔葬)되었다.
[상훈과 추모]
법 집행이 엄정하고 고과(考課)가 공정하였으며, 풍류와 여색을 멀리하여 외직으로 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사모해서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죽책(竹冊)을 쓴 공로로 인해 사망한 그 해 판서에 추증되었다. 『청구총소(靑丘叢笑)』에는 유심의 전생에 대한 일화가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려서부터 유심은 항상 한 노파가 제사를 지내면서 통곡하는 꿈을 꾸었다. 평안 감사로 나아갔을 때 꿈에서 본 그 노파가 우는 것을 보고 연유를 물었더니, 자신의 아들이 어렸을 때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감사가 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었다고 하였다. 이에 유심은 노파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 주고 후하게 보상을 해 주었다. 유심이 평안 감사의 임기가 끝난 직후 별세하자 세상 사람들이 전생에 바라던 바를 그대로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