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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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祖淳 |
영어음역 | Gim Josun |
이칭/별칭 | 낙순(洛淳),사원(士源),풍고(楓皐),충문(忠文),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조선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이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4대손으로, 부사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고, 순조(純祖)의 장인이다.
[활동사항]
1785년(정조 9) 약관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8년 규장각대교로 있을 때 시·벽파(時·僻派) 싸움에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1789년 동지겸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이조참의·검교·직각을 거쳐 1800년 보덕에 제수되었다. 순조 즉위 후 부제학·행호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 여러 요직이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1802년에 대제학을 거쳐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로 봉해지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使)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이후 훈련대장·호위대장·금위대장·양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그 뒤 실권 있는 직책은 맡지 않고 제조직과 영돈령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고 왕세자의 보도(輔導)를 맡았고, 국구(國舅)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 당파에 몰리지 않으려는 노력과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조순을 둘러싼 척족 세력들은 후대에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저술 및 작품]
『풍고집(楓皐集)』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문(忠文)이며 양주의 석실서원과 여주의 현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충주목사로 재직 중에 선정하고 애민선치했다고 하여 철(鐵)로 만든 ‘행목사김공조순영세불망비(行牧使金公祖淳永世不忘碑)’가 1839년(현종 5)에 충주시 충인동에 세워졌으나 시가지 정비 시 파손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