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855
한자 趙根伯
영어공식명칭 Cho Geunbaek
이칭/별칭 조근백(趙勤伯),조성일(趙性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조근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조근백 산남의진 입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조근백 입암전투 후 은신
몰년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조근백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조근백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경상도 청송도호부 두현리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청송군
활동지 경상북도 청하군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참모장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조근백(趙根伯)[1872~1908]은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일으킨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참모장(參謀將)이 되어 의진을 이끌었다. 그 뒤 1907년 10월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은신하였다가 1908년 6월 자택에서 일본군에게 피살당해 순국하였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이명은 조근백(趙勤伯) 또는 조성일(趙性逸). 전용기의 산남의진에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조근백은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일어난 정용기의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고종의 시종관(侍從官) 정환직(鄭煥直)이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들고 맏아들 정용기(鄭鏞基)와 상의하여 일으킨 의병 부대이다. 처음 의진을 일으킬 때 모집된 군사의 수는 무려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조근백은 의진에 들어가 1906년 3월 5일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경상북도 영천을 거쳐 청송을 향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우각(牛角)에서 1906년 4월 28일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의 간계로 대장 정용기가 잡혀 경상 감영(監營)으로 압송되었다. 의진은 대장을 대신하여 중군장(中軍將) 이한구(李韓久)가 이끌었으나 구심점을 잃고 곧 해산되고 말았다.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풀려난 뒤 1907년 4월 재기하였다. 이때 정용기는 다시 의진에 들어가 청하·청송·포항 등 여러 곳에서 항전을 펼쳤다.

조근백은 1907년 10월 지금의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에서 치러진 일본군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와 여러 장령(將領)들이 전사하는 참화를 겪고 간신히 귀가하여 은신하였다. 하지만 1908년 6월 20일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현장에서 피살당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에 위치한 영일민속박물관에는 1967년 산남의진기념사업회가 세운한말의병항왜혈전기념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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