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67
한자 大韓民國政府樹立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5년 08월 15일연표보기 - 광복
종결 시기/일시 1948년 08월 15일연표보기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정의]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경상북도 청송군의 정치, 사회경제적 상황과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우리나라의 당면 과제는 정부 수립이었다. 광복 직후 38도선을 경계로 이남 지역에는 미군,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한반도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함으로써 첨예한 이념 대결의 장이 되었다.

국내 정치세력도 좌우세력으로 분열되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청송 지역에서도 좌익 성향의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청년 단체 등과 우익 성향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송군지부 등이 결성되어 활동하면서 대립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좌우 대립은 약한 편이었다. 당시 청송 지역에서는 정치 문제보다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다른 지역에 비해 심각하였다.

이 시기 청송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식량 부족이었다. 당시 식량 부족은 전국의 공통적인 문제였지만, 1946년 6월 무렵 청송 지역은 굶어 죽은 사람이 수백여 명에 달했고, 지역민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고 있다는 내용이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심각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살기 어려워 국외로 떠났던 사람들이 광복 이후 국내로 돌아오고, 전염병과 대홍수가 일어나면서 식량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경과]

1946년 3월에 미국과 소련 대표가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했지만, 협의에 참여할 단체의 범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입장 차이로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미군정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직후 좌익 세력을 전면적으로 탄압하였다. 좌익 세력은 여기에 맞서 미국과 미군정을 비판하는 정치투쟁을 강화하였다. 1946년 좌익세력이 9월 총파업을 벌이던 중 식량문제 해결, 친일파 처단 등을 요구하는 ‘10월 사건’이 발발하여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청송 지역에서도 좌익 성향의 청년들이 청송경찰서를 공격하여 지서를 점거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이 부상을 입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이 이 사건에 가담한 청년을 포함한 좌익 세력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좌익 세력은 월북하거나 청송 지역의 주요 산으로 피신하였다. 청송 지역은 보현산(普賢山)[1,124m]과 주왕산(周王山)[720.6m] 등 험준한 산이 많은 대표적인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피신해 온 좌익 세력도 많았으며, 이들은 무장 유격 활동을 벌였다.

[결과]

1947년 들어 미국은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소련에 대한 기존의 유화적인 입장을 버리고 강경한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한반도 문제도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유엔으로 이관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미국은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성과 없이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되자, 9월에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켰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는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유엔은 선거를 감독하기 위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였으나 북한과 소련은 유엔의 결정에 반발하여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다. 결국 1948년 2월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 결정은 좌우 세력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우익 세력은 유엔의 결정을 지지하고 선거 준비에 들어갔으나, 좌익 세력은 선거를 무산시키고 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무장 유격 활동을 강화하였다. 청송 지역에서도 좌익 세력이 선거를 무산시키려는 활동을 폈다. 하지만 5월 10일 총선거는 예정대로 실시되었다. 청송 지역에서는 광복 후 김천여중과 경북여중 교장을 지내고 경상북도 학무과장을 역임한 교육협회 소속의 김봉조(金鳳祚), 대동청년단 소속의 윤용구(尹鎔球),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의 심운섭(沈雲燮) 3명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여 김봉조가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하여 7월 17일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제정하는 등 정부 수립을 뒷받침하는 여러 법률을 제정하였다. 7월 20일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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