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망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42
한자 滿洲亡命
영어공식명칭 Manchuria Exile
이칭/별칭 도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박영산 만주 망명
종결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박영산 지린성 반석현에서 사망

[정의]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滿洲)로 망명한 경상북도 청송 지역 출신 인물들의 활동.

[개설]

만주 망명은 일제 침략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만주 지역으로 나가 구국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경상북도 청송 출신 인물로는 박영산(朴榮山)과 남우락(南佑洛) 등이 이 길을 걸었다.

[역사적 배경]

만주는 압록강(鴨綠江) 및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중국 동북 지방의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 3성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만주 지역을 다시 나눌 때는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의 서간도(西間島)와 북간도(北間島)로 구분한다.

이곳은 일제 침략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한인들이 민족운동을 펼쳤던 주요 무대였다. 한인들이 이 지역으로 망명하게 된 동기는 정치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는 애국지사들이 국권회복의 방안을 찾아 망명하였고, 경제적인 이유는 국내에서 빈민층의 한인들이 생활의 방편을 찾아 이주하였다.

[경과]

만주 망명은 1860년대부터 이주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서북간도(西北間島)의 한인사회를 귀착지로 하여 이루어졌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무렵 간도에는 이미 10만 명을 헤아리는 한인들이 거주하였고, 1919년 3.1운동 무렵에는 그 수가 34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초기 이주 한인들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한인사회를 형성하여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 및 독립운동 단체 결성 등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러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만주 망명은 경상북도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선택하여 나선 길이었지만 대개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진상을 자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결과]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염원하여 만주 망명의 길을 떠났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사람은 박영산과 남우락 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 박영산은 청송군 진보면 월전리 출신으로 1909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박영산은 1919년 4월 조직된 한족회(韓族會)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한족회는 이상룡(李相龍)이 중심이 되어 지린성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된 한인 자치기구로 본부인 중앙총부(中央總部) 아래 서무(庶務), 사판(査判), 학무(學務), 군무(軍務), 내무(內務), 검사(檢査) 등의 부서를 두고 재만(在滿) 동포의 치안, 재무, 사법, 행정 등을 담당하였다. 또 유화현, 통화현(通化縣) 등 각 현(縣) 지역에는 지방 조직을 두어 조직을 체계화하였으며, 참여 호수도 1만여 호에 이를 정도였다. 박영산은 한족회에서 활동한 뒤 다시 군정부(軍政府), 정의부(正義府),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등에 소속되어 활동을 하다가 1931년 지린성 반석현(盤石縣)에서 사망하였다.

남우락은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 출신으로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12세손이며, 당대 유학자 낙금(樂琴) 남성로(南星老)의 손자였다. 남우락은 고향 청송에서 일본 순사를 폭행하고 지서(支署)를 파괴한 뒤, 노모와 부인과 어린 두 자식을 남겨두고 만주 랴오닝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일본 경찰은 남우락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부인 정특노(鄭特老)를 매일같이 지서로 불러 추궁을 하였지만 아무런 단서도 밝혀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호출과 고문으로 어린 자식들을 돌볼 수가 없게 되어 아들은 둘 다 죽고 말았다. 그 뒤 남우락은 비밀리에 입국하기도 하였다. 부인이 다시 아들을 출산하게 되자 일본 순사가 또다시 부인을 불러 협박하며 남편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정씨 부인은 대구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순사들이 또 찾아가 협박을 하자 생후 1개월밖에 안 된 아들 대식(大植)의 품에 유서를 남겨두고 자결하였다. 세상은 정씨 부인을 효열자부(孝烈慈婦)라고 칭찬하였다.

[의의와 평가]

청송 사람으로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경우는 박영산과 남우락 두 사람으로 밝혀져 있다. 다만 앞으로 더 밝혀질 가능성도 있다. 분명한 것은 국권 상실의 절박함 속에서 구국항쟁의 일념만으로 가족과 고향을 떠나 국외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족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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