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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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熽 |
영어음역 | O Su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규근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자(字)는 회백(晦伯), 호(號)는 금암(琴巖)이다. 보성부원군(寶城府院君) 오천복(吳天福)의 9세손이며 생원(生員) 오행원(吳行遠)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639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성균관의 정6품 또는 종8품 벼슬)·감찰(監察:사헌부의 정6품 벼슬)·예조좌랑(禮曹佐郞:정6품의 벼슬)·병조정랑(兵曹正郞:정5품의 벼슬) 등의 경관직(京官職)을 거쳤다.
1648년에는 지방관직으로 나아가 고성현령이 되고, 1652년(효종 3) 홍산현감, 1655년에 영천군수, 1659년에 문천군수 이밖에 봉산, 풍기, 흥해군수 등 7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1668년(현종 9)에는 진주목사를 역임하였다. 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종4품의 벼슬]을 거쳐 승지(承旨)[승정원의 정3품 벼슬]에 이르렀다.
[활동사항]
글이 매우 뛰어났으며, 지조 또한 매우 고결하였다.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청렴결백하게 선정하여 고을마다 백성들이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와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상례범절(喪禮凡節)을 다하여 정성껏 모셨으며, 3년동안 극진하게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훈과 추모]
1826년(순조 26)에 청주의 기암서원(機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묘소]
갈산 응봉 아래에 있으며, 신도비는 예조판서 강석이 찬하고 김병길이 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