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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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麒煥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지역 출신의 사업가.
[가계]
본관은 의령이다. 아버지는 옥점진(玉点振)이고 어머니는 인동 장씨이다.
[활동 사항]
옥기환(玉麒煥)[1875~1953]은 4대째 마산에 정착하며 살았던 지주 집안이었으며, 어시장에서 객주(客主)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마산 지역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07년 구성전(具聖傳) 등과 함께 재원을 마련하여 한국 최초의 노동야학인 ‘마산 노동 야학교’를 개설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성호 초등학교, 마산 공립 상업학교, 마산 중학교 등 오늘날 마산의 유서 깊은 학교의 육성에 적극 관여했다. 1921년 12월 28일 3년제 마산 공립 상업학교가 설립되었다. 훗날 5년제의 정식 상업학교[현 마산 용마 고등학교]로 승격하게 되는데, 이 학교의 기성회장을 맡았다.
1927년 신마산을 근거지로 삼은 조선인들이 중심이 되어 마산 고등 보통학교 창립기성 동맹회를 조직하여 그 설립 준비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이때도 이우식, 구성전 등과 함께 각각 1만 원을 기부하기로 하였다. 결국 일제의 방해로 설립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일제가 마산 중학교[현 마산 고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있어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마산 중학교의 설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이 60%, 한국인이 40%의 설립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그 기성회가 결성되었을 때, 선생은 한국인을 대표하여 부회장을 맡음으로써 그 실현에 기여했다. 1935년 6월 1일 선생의 회갑을 맞아서는 회갑연 비용으로 쓸 작정이던 1,300원이라는 거금을 마산부 내의 각 공사립학교와 유치원에 극빈자 구제비로 기부하기도 하였다.
1919년 9월 당시 원동상회(遠東商會)를 운영하고 있던 옥기환은 명도석, 김철두 등과 함께 경제적 자주성 확립을 위해 자본금 50만 원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 이듬해 정식 출범한 주식회사 원동 무역이다. 이 회사는 마산 최초의 한국인이 설립한 주식회사이며 무역 회사로서, 마산의 경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원동 무역은 1915년 1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이시영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자금원으로써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동상회와 조선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는 원동무역회사가 성립된 이후에도 계속된 듯하다. 그 구체적이고 명확한 관계는 현재의 상태로는 밝히기 어렵지만,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시 경제 통제의 강화로 이 회사가 문을 닫기 전까지 해외의 독립 운동 단체에 회사의 이익금 중 일부를 꾸준히 독립 운동 자금으로 보내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8·15 해방 후 미군정의 초대 부윤으로 추천되어 약 5개월 간[1945년 12월 15일~1946년 5월 14일] 미군정의 부윤직을 맡았다.
일제에 협력했던 발자취도 있다. 1911년 마산 경찰서장이 조선인의 풍기 교정과 공익 증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최초로 발기한 마산 교풍회(矯風會)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일이나, 명치 신궁(明治神宮) 봉찬회(奉讚會)에 많은 성금을 기탁하고 부협의원(府協議員)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