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1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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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演劇 |
영어의미역 | Drama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현태영,유병철,이상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2년 - 극예사(劇藝社) 창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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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6년 8월 - 창원 오광대 채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3년 2월 - 극단 연극 협회 결성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극단 터 창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7년 2월 17일 - 극단 창원 창단, 「임금알」 공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7년 9월 - 극단 부족 창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6월 - 극딘 미소 창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12월 - 제1회 경남 소극장 축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 극단 터에서 극단 문화 사랑으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3년 - 극단 문화사랑에서 극단 고도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6년 - 극단 마산 제14회 전국 연극제에서 대통령상[최우수상] 수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극단 나비 활동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8년 - 극단 마산 제26회 전국 연극제에서 「파란」으로 대통령상[최우수상] 수상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행해지는 공연 예술 중 무대에서 배우나 그 외 전달 매체의 연기를 통해 관객에게 내용을 전달하는 종합 예술.
[창원의 연극]
연극이 독자적으로 현재의 창원 지역에서 공연된 것은 1987년 2월 17일 극단 창원의 「임금알」[오태영 작, 심태회 연출, 창원시청 강당]이었다. 이전에 창원 지역에서 극단이라는 이름을 걸고 공연한 기록은 없다. 이처럼 창원 지역에서 연극이 늦게 시작된 것은 마산과 창원 지역이 동일한 생활권이자 문화권이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지만 연극이라는 형태가 우리 전통 연희에 잇닿아 있음을 볼 때, 창원은 뿌리 깊은 영남의 오광대가 행해졌던 곳이었음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창원 오광대의 대사는 최상수 채록본 하나 뿐 이다. 상연이 중단되기 이전에 말뚝이 역을 맡았던 마산 출신 김순일의 구술로 1936년 8월에 채록된 것을 1956년 그와의 재희를 통해 대사가 수정 보완되었다.
1933년 송석하는 「오광대 소고」, 『조선 민속』 1호에서 마산의 이영재 증언을 토대로 창원 오광대의 전파시기를 1884년경에 초계에서 분파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명칭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학자에 따라 ‘마산 오광대’ 혹은 ‘창원[마산] 오광대’ 혹은 ‘창원 오광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연희 장소 때문이다. 기록에 나타난 무대가 마산의 자산동 놀음터[서원곡]와 창원의 중동에 위치한 설권주 소유의 정미소 광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창원과 마산은 동일한 생활권이기 때문에 창원 연극과 마산 연극을 명확하게 구분 짓기는 힘들다. 하지만 1974년 초부터 급격히 공업화되고 도시화되면서 창원과 마산은 서서히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화 초기에는 토착민보다 주변 도시로부터 유입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창원의 모든 문화 예술은 지역적 정체성을 확립치 못하고 인근 마산, 진해 지역의 문화 예술에 뿌리를 두고 시작하였다.
[창원 연극의 변천]
창원 지역의 연극은 마산 지역에서 유입된 심태회·이상용, 창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황종호·이상하·조판철 등 경남 대학교 영어 교육학과 출신 동문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이들은 창원 지역에 연극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고 연극 예술의 꽃을 피워보고자 1987년 2월 17일 극단 창원을 창단하고 「임금알」을 창원시청 강당에서 공연하였다. 교편을 잡고 있거나 학교 연극 몇 편을 한 것이 경험의 전부였던 단원들은 인근 마산에서 활동하던 배우를 객원으로 출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자 용기를 얻은 구성원들은 1987년 3월 7일 창원시청 회의실에서 한국 연극 협회 창원 지부 창립총회를 열어 초대 지부장에 심태회를 선출하였다. 1987년 11월 3일 한국 연극 협회 제5차 이사회에서 인준을 받아 한국 연극 협회 창원 지부가 정식 출범하면서 창원 연극의 틀이 잡혀 갔다.
1987년 9월 우정진·장현황·박성근·오세갑·이순노·이준인·김소정 등 직장의 젊은이들, 창원 대학교 극회 출신, 기업체 연극 서클이 모태가 되어 극단 부족이 창단되었다. 극단 부족은 창원시 중앙동 56-10번지 주택가 지하실에 최초로 자체 연극 전용 소극장까지 마련하고 유진 오닐 작, 우정진 연출의 「밧줄」을 창단 공연작으로 올림으로써 창원에 순수한 지역민들로만 이루어진 2개의 연극 단체가 존재하게 되었다.
1989년에 창원에는 또 다른 젊은이들이 모여 만든 극단이 태동하게 되는데, 극단 미소가 그것이다. ‘성내지 않는 그러한 얼굴’이라는 극단 정신을 걸고 1989년 6월에 창단된 극단 미소는 천영형을 대표로 하여 장은호·김영일·고대호 등을 주축으로 그 해 10월 부족 소극장에서 창단 작품인 「돼지들의 산책」[김용락 작, 천영형 연출]을 공연하였다. 이로서 창원에는 창원 예술 극단의 전신인 극단 창원, 극단 부족, 극단 미소 등 3개의 순수한 향토 극단이 정립되었다.
그러나 1990년에 극단 부족은 재정적인 문제로 그 활동을 접었다. 극단 미소가 부족 소극장을 인수하여 ‘미소 연극 실험 연구실’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1994년에는 창원 전문대학 선후배들이 모여 극단 시브로를 창단하고 활동하였으나 3년을 버티지 못했고, 1996년 10월 재창단된 'TNT 레파토리 시스템'은 마산에서 활동하던 극단 무대의 뒤를 이었으나 몇 작품을 공연하지 못하고 활동이 주춤해졌다.
2004년에 마산에서 ‘가야 레파토리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극단 활동을 하고 있던 김동원이 창원시 중앙동에 연습실 겸 소극장을 개관하고 극단 나비로 극단 명칭을 변경, 현재까지 창원 연극의 그 장을 넓혀 가고 있다. 2008년 현재 창원에는 협회등록 단체인 극단 미소, 창원 예술 극단과 미등록 단체인 극단 나비 등 3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마산의 연극]
마산 연극사는 1921년부터 시작되고, 마산 최초의 극단은 1932년 창단된 극예사(劇藝社)이다. 극예사의 뒤를 이어 극단 표현 무대가 1934년 창단되었다. 1940년대의 마산 연극은 1945년부터 시작되고, 1950년대의 마산 연극은 1955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1962년 12월 22~23일에는 서성동 3·15 회관에서 연극 「고래」[임희재 작, 한하균 연출]가 공연되었다.
1970년부터 1974년 말까지 마산에는 기성 극단이 하나도 없었고, 당시 경남 대학교 연극부의 활동이 마산 연극의 전부였다. 1974년 12월이 되면 극단 마산 까페떼아뜨가 창단되었고 「공모 살인」을 카톨릭 문화원[옛 교도소]에서 공연되었다. 1976년이 되면 마산 학생 연극회가 탄생하고, 1976년 5월에는 마산 간호 전문 대학 연극부가, 1977년 5월에는 월영동 경남 대학교에서 극예술 연구회가 각각 창립된다. 1977년에는 불씨 극회가, 1978년 4월에는 무대 예술이, 1979년 5월에는 극단 세림 기획이 각각 창단되었다.
1980년 10월에는 극단 아름이, 1982년에는 극단 어릿광대가 창단된다. 1984년에는 극단 소리와 극단 사랑방이 창단되고, 동년 5월에는 극단 마산이 창단된다. 극단 마산은 1986년 3월 전용 소극장을 개관하고 개관 기념 공연으로 「삼각 파도」를 무대에 올린다. 1989년 12월에는 제1회 경남 소극장 축제가 열린다. 이 연극제가 바로 마산 국제 연극제의 모태이다. 극단 마산은 「에쿠우스」를 시작으로 1992년부터 10여 년 간 매년 일본 순회공연을 하였다.
1996년에는 경상남도 연극 사상 처음으로 극단 마산이 제14회 전국 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극단 마산은 2008년 인천에서 열린 제26회 전국 연극제에서도 「파란」으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2001년에는 극단 객석과 무대가 창단되었다.
2007년도에는 2007 이아타(aita/iata) 세계 연극 총회와 이아타 세계 연극제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세계 30여 개 국의 극단과 60여 개 국의 연극 대표 등 총 1,500여 명의 국내·국외 연극인이 참가한다. 극단 마산은 2008년 7월 26일부터 31일까지 6일간 3·15 아트센터에서 2008 세계 환경 연극제도 개최하였다.
2013년 현재 마산에는 극단 마산[대표 이상용]과 극단 객석과 무대[대표 문종근] 등 2개의 극단이 활동 중이다. 2013년 현재 전국 국제 연극제의 효시인 마산 국제 연극제의 역사는 25년이 되었다.
[진해의 연극]
연극 단체인 연극 협회가 결성된 것은 1963년 2월이었다. 이기태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나석기·김상조·허경조·허청륭·홍기만·순영순·전병순 등의 회원으로 출발하였다.
1964년 총회에서 새 회장으로 선출된 나석기는 제2회 군항제에서 창립 기념공연을 가졌다. 슈닛츠라 작, 이기태 연출로 「회색의 병식」[원작명 최후의 가면]이 상공 회의소 회의실에서 열렸다.
1965년 4월 제3회 군항제에서 죠오코리샤 작, 이기태 연출의 「광부」를 공연하였으며 엄창섭[반장], 한금용[덕], 록양[피터], 김영옥[꼬마], 황신하[양군], 홍의[죠오] 등이 출연하였다. 스탭진에는 유택렬, 정종원, 허청륭, 우영자 등이 역할을 다했다.
1966년 4월 제4회 군항제에서는 유치진 작, 희곡 작가인 조인규 연출로 「조국」이 공연되었으며 녹우, 한금용, 허청륭, 김원숙, 이은과 학생들이 출연했으며, 유택렬, 나석기, 오경호, 김효철, 이광국, 우상덕, 옥선희가 스탭을 맡았다. 이후 중앙과의 연락 두절로 인해 인준이 취소되는 사태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그에 따른 부담은 없었으나 오랜 침묵 기간을 거쳐야만 했다.
1968년 4월에 진해 한별 클럽 초청으로 한성 여자 대학교 방송과 학생들로 구성된 김동규 연출 「피아니스트」가 미진 살롱에서 공연되고, 연극 협회에서도 6월에 미진 다방에서 막을 연 나석기 작, 이기태 연출 도둑고양이가 공연되었다. 12월 13일 진해 극장에서 승공극·박조열 작, 이기태 연출로 관광 지대를 각 분야 예술인들이 참여한 문인극으로 유택렬[미술], 진병수[사진], 나석기[연극], 전기수[시인], 황선하[시인], 박정현[무용], 방창갑[시인], 지일규[시인], 강종칠[산문], 임복진[시인] 등이 출연하였다.
1970년 4월 제8회 군항제에 연극 협회 제 4회 공연으로 안톤 체흡 작, 이기태 연출 청혼이 공연되고 홍기만·현기옥·배연옥이 출연했다. 그러나 이기태의 홀연한 잠적과 많지 않은 연극인들마저 침체하여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973년 4월 오태근 작, 배연호 연출 버남의 숲이 배연호 1인극으로 미진살롱에서 공연되었다. 진해에서 처음 가진 싸롱극이라 할 수 있다.
1973년 4월 13일 극단 새들 초청 공연으로 오페레다 작 「콩쥐 팥쥐」가 해양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진해 연극의 변천]
1978년 6월에 이강백 작, 진병식 연출로 「결혼」이 상공회의소에서 임진복, 박우희, 진병식의 출연으로 공연되어 연극에 대한 활기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0월에는 테렌스 맥날리 작, 진병식 연출의 다음이 중앙 극장에서 막이 오르고, 12월에는 박조열 작, 진병식 연출의 소식이 같은 장소에서 공연됐다. 1980년 4월 제18회 군항제에는 이근삼 작, 진병식 연출로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를 대도 예식장에서 강승구, 강기섭, 심혜숙, 김기자, 박종엽, 박우희 등이 출연하였다.
1980년 8월 연극 협회의 활기찬 움직임이 일면서 전병식이 지부장이 되고, 지부장의 열정은 열악한 재정과 연극인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공연의 열기는 젊은이들로부터 더 뜨거웠다.
1981년 4월 제19회 군항제에서도 이강백 작, 진병식 연출로 「결혼」이 리바이벌 되고, 부산의 극단 레파트리 시스템의 이언호 작, 김경화 연출의 「멋꾼」의 초청 공연이 상공 회의소 회의실에서 공연됐다.
1982년 4월 제20회 군항제에서는 박조열 작, 김성철 연출로 「토끼와 포수」가 우일 예식장에서 공연되었다. 이때 진주에서 방성진과 알찬 연극에 빠져있던 김성철이 가정의 어려움 때문에 진해를 찾은 것을 계기로 마침내 진해 연극은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진해 연극은 마침 불기 시작한 중앙의 연극 붐이 지방까지 불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고, 생업도 포기한 젊은 연기자들의 무모한 도전과 대학이 있는 인근 마산과 창원 지역의 연극이 중앙의 열풍과 함께 진해에 불기 시작하였다. 연극 협회 회원 중심의 동인제 형식으로 존속해 오다가 1983년 극단 터를 창단하면서 실직적인 진해 연극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극단 터는 1989년 문화 사랑으로, 1993년에는 진해 무대로, 또 다시 1999년 후반기에 극단 고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진해 지역 최초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극단 터는 창단 공연으로 다리오포 작 「돈 내지 맙시다」를 진병식 연출로 무대에 올린 이후 꾸준히 활동을 펼치다가, 1988년 문화 사랑으로 개칭하였다.
극단 문화 사랑은 김휘주·이승목·제성진 등을 중심으로 김종철 작, 김희주 연출의 「열아홉 살의 나」를 무대에 올린 뒤 정지현 연출의 「종이연」을 공연하는 등 1992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다시 1993년에 진해 무대의 연기자 스텝 연출가가 더불어 노력한 「스카팽의 간계」를 공연함으로써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이에 영향을 받은 진해 무대는 윤정간 연출의 「춘향전 3」을 비롯하여 유병철이 연출하고 각색한 「들개」, 「하녀들」, 「흥부하고 놀부하고」 등을 무대에 올림으로서 진해 연극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1990년 중반기에서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유병철은 반사실적인 무대와 음향을 이용한 인물의 심리 확대와 같은 표현주의 기법에 훈련된 배우의 신체 움직임을 강조한 양식적 연기를 추구했다.
2004년 새 지부장에 선임된 서용수와 뜻있는 연극인들이 2005년 경남 연극제를 진해에 유치하고 잘 치러냈다는 것은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2007년 6월 18일부터 28일까지 제1회 진해 코미디 아트 페스티벌이 진해 시내에 산재해 있는 공연장에서 ‘꿈과 희망 비전의 도시 진해’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며 개최되었다.
6월 18일부터 22일까지는 저녁 8시에 진해 극단 고도의 「고슴도치 이야기」가 소극장 판에서 공연되었고, 6월 23일 오후 4시, 7시 서울 연희단 거리패가 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장진 감독 원작 「서툰 사람들」을 공연하였다. 6월 24일 저녁 8시 야외 공연장에서는 창원 극단 미소의 「뒤집기 흥부전」이 공연되었다. 6월 24일 저녁 9시 축하 공연으로 고재경의 ‘코믹 마임쇼’와 오꾸다 마사시의 ‘아름다운 비누 방울 쇼’가 우천 관계로 야외 공연장에서 시민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공연하였다.
2013년 현재 진해구에는 한국 연극 협회 진해 지부와 극단 고도가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