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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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之瑞 |
영어공식명칭 | Jo Jiseo |
이칭/별칭 | 백부(伯符),지족당(知足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전기 부여 지역에 세거한 문신.
[가계]
조지서(趙之瑞)[1454~1504]의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전중어사 조익(趙益)이고, 할아버지는 직장 조민원(趙敏原)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조찬(趙瓚)이고, 어머니는 정참(鄭參)의 딸이다. 부인은 정윤관(鄭允寬)의 딸 영일 정씨(迎日 鄭氏)이다.
[활동 사항]
조지서는 1454년(단종 2) 진주에서 태어났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뒤 식년시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478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승문원저작으로 있던 1479년에는 문과 중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1479년 이조좌랑이 되었고, 어유소(魚有沼)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할 때 서정종사관으로 차출되었다가 명을 잘못 전달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후 관직에 복귀하여 홍문관의 부교리와 교리를 거쳐 형조정랑, 홍문관의 부응교와 응교, 세자시강원보덕 등을 지냈다. 세자시강원보덕으로 있을 때 강관(講官)으로 차출되어 세자[후일의 연산군]를 철저하게 교육하였는데, 세자가 심히 미워하여 원수처럼 여겼다고 한다.
조지서는 연산군 즉위 후인 1495년(연산군 1) 창원부사로 부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지리산 자락에 초막을 짓고 은거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조지서는 임금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압송되었고, 정성근(鄭誠謹)과 함께 잡혀가 국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이후 시신은 능지처참되어 강물에 버려지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학문과 저술]
조지서의 저술로는 「언심견투(彦深見投)」라는 제목의 시 1수가 『동문선(東文選)』에 전한다.
[묘소]
조지서의 묘소는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산146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직후 신원되었고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도 선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