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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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東府放火 |
영어의미역 | Andong-bu Prevention of Fir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강윤정 |
[정의]
1896년 일본군이 안동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안동부에 불을 지른 사건.
[역사적 배경]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1895년(고종 32) 말부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895년 12월 초 안동에서도 의병 활동이 시작되었다. 안동의진은 1896년 인근의 6개 의진과 연합 의진을 결성한 뒤 상주 함창의 태봉에 있는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연합 의진의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일본군이 의병 진압에 나섰다.
[발단]
1896년(고종 33) 3월 김도화가 이끄는 안동의진은 예안·풍기·순흥·영주·봉화·호좌 등의 의진과 연합 의진을 결성하였다. 연합 의진은 상주 함창의 태봉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연합 의진과 일본군의 전투는 3월 28일 밤 호좌의진이 일본군을 기습하는 것으로 막이 올랐다. 그리고 이튿날인 3월 29일(음 2월 16일) 아침 연합 의진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날 아침부터 시작된 태봉전투는 제방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연합 의진은 저녁 무렵 일본군의 총공격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서상열이 이끄는 호좌의진은 전투를 다시 시작하려고 준비하였지만 안동의진은 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예안의진은 학가산을 거쳐 예안으로 각각 회군을 해 버렸다. 일본군은 태봉전투의 승세를 타고 인근의 의병 진압에 나섰다.
[경과]
의병 진압에 나선 일본군은 4월 1일(음 3월 19일) 예천에 도착하여 의병들이 사라지고 없자, 그들의 집에 불을 질러 보복하였다. 이튿날인 4월 2일에는 안동부에 도착해 풍산에 주둔하고 있던 안동의진을 기습 공격하였다. 안동의진은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맞아 봉정사와 지금의 안기동 일대에서 전투를 펼쳤지만 크게 패하였다.
안동부로 들어온 일본군은 안동부를 의병의 진원지라고 여겨 민가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안기동에서 시작한 불은 바람을 타고 법흥동 탑곡(塔谷)까지 덮쳐 안동 도심에 자리한 1,000여 가구의 민가가 불탔다. 이로 말미암아 안동 시가지에서 북쪽 지역 일대가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만행은 안동부 성안의 가옥들을 방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물과 비단을 탈취해 가기도 했다. 이러한 만행은 안동관찰사 이남규에 의해 조정에 전해졌다.
[결과]
안동부 방화는 안동의진에 큰 타격을 주어, 이후 안동의진은 인적·물적 자원의 부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여기에 고종은 거듭하여 암행효유사를 파견하여 해산을 종용하였다. 결국 9월 11일 관군이 안동부에 도착하면서 안동의진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어 1895년 12월 의병을 일으켜 1896년 9월까지 약 10개월에 걸친 항전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안동부 방화는 안동 의병에 대한 잔혹한 보복이었다. 이로 인해 안동의 전기 의병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안동 의병의 항전은 국권피탈 이후에 독립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향산 이만도 등 여러 명의 자결 순국자가 나왔으며, 김동삼·이상룡 등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다. 이는 안동 의병의 이념적 발현의 결과로 한민족의 역사 속에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