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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 명동마을은 행정지명이며, 속칭으로는 홈실마을로 부른다. 그리고 명동 바로 옆 마을 이름은 외홈마을이다. 명곡마을, 명동마을보다 왠지 정감이 가는 ‘홈실마을’. 이 이름은 과연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열쇠는 명동(椧洞)의 ‘명(椧)’자에서 찾을 수 있다. 명(椧)은 우리말로 ‘홈’을 뜻한다. 농사를 지을 때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사용한 홈(椧)이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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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흐르고 영남 알프스가 있는 양산, 그곳에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양산IC에서 양산 시내를 거쳐 물금을 지나 원동역에 이르는 지방도 1022호선을 따라 들어가면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낙동강의 물길을 따라 달리는 듯 차창 밖으로 낙동강이 흘러가고, 지나가는 차 뒤로는 오봉산과 토곡산이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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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푸르고 넓은 논에는 한창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도시화가 되어 땅값이 올라도 이곳에서 농사가 계속 될 수 있는 이유는 관개시설이 잘 되어서 농사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동이 처음부터 관개 시설이 완벽하게 좋았던 것은 아니다. 관개 시설이 되기 전에는 이곳에서도 물이 없어 가뭄으로 인해 고생이 매우 많았었다고 한다. 우리는 명곡마을 이자무 이장님을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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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리를 찾아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통도사 나들목(IC)에서 시작한다. 통도환타지아를 지나 홀로 오롯이 자리한 외길을 따라 들어오면 지산마을은 통도사의 후문과 연결되어 있고, 평산마을은 통도사와 철조망을 경계로 위치한다. 아래 위 만복재가 동네를 둘러싸고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마을 뒤쪽의 영취산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단풍은 가히 장관이다. 단풍이 흐드러지게 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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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리는 이웃 고을 밀양의 삼랑진과 천태산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다. 천태산(630.9m) 남쪽에 위치한 천태사[천태정사)에서 용연폭포에 이르는 계곡은 장사바위, 수자굴바위 등 기암절벽과 더불어 오염되지 않은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 산은 임진왜란 때 승려들의 훈련장이었으며, 천태정사와 수자굴 바위, 장사바위가 계곡폭포 뒤에 위치하고 있다. 오의정 전설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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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변에 위치한 용당은 역사가 깊은 지역이다. 용당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경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신라, 가야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이곳 용당은 당시 황산강(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의 영역이고, 서쪽은 가야의 영역이다. 신라와 가야는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에 따라 황산강(낙동강)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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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상북 소토리 인근 야산 소나무들이 집단 고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를 두고 주민들은 인근 공장 가동 후부터 고사되었다고 주장하고, 회사 관계자들은 소나무 재선충이라며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상북면 소토리에 조성된 공단 인근 야산에서 지난해(2007) 12월부터 한두 그루씩 소나무들이 죽어가기 시작해 최근에는 200여 그루 이상이 집단 고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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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의 지도는 향토의 과거·현재·미래를 함께 볼 수 있는 도구이다. 이는 지도가 종합과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이 양산의 모든 것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그려진 양산의 고지도는 제작 당시의 위치 정보를 이미지로 전달하기 때문에 텍스트로 쓰인 지리서보다 위치 파악에 효율적이다. 따라서 양산의 고지도는 양산 지역의 향토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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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서 한국군은 북한군에 의해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려나게 되어, 결사항전지역으로 맞붙었던 곳이 바로 낙동강 전선이었다. 양산은 낙동강 하구에 해당되는 지역이므로 이곳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전쟁이라고 하면 서로 총을 겨누며 살생만 한다고 생각하여 군인들의 희생만 언급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주게 된다. 그래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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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도 세월에 따라 나이를 먹고 변해간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도 그러하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했고, 또한 정보화 시대로 변해가고 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그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마을도 변해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막을 수 없는 하나의 시대적 흐름일지도 모른다. 여기 이곳 소토리도 이러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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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이름이 똑같거나 비슷하여 혼동하는 실수를 누구나 한번쯤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곳 명동마을 또한 이름이 비슷하여 생긴 일화가 있다. 명동마을이 ‘명곡’이라고 불렸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양산대학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에도 같은 지명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느 명곡마을인지 잠시 당혹스러웠다. 2007년 4월 1일, 웅상읍이 소주동, 평산동, 서창동, 덕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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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기억되고, 살아있는 양산읍성이지만 실제 그 흔적은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읍성을 보호하고 읍성 주민들의 마음을 편안히 감싸주었던 성벽의 흔적은 지적도를 통해 전체적인 규모를 알 수 있지만, 실제로 그 흔적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아주 일부인데, 읍성의 북동쪽, 동쪽과 동남쪽이다. 읍성의 북동쪽에는 북문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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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식탁에서 흔히 먹는 딸기는 한국 품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외국에서 들여온 딸기가 더 많다. 그중 일본에서 들여온 ‘아키히메’라는 품종이 있는데 고추같이 길쭉하게 생겼다고 하여 일명 ‘고추딸기’라고도 한다. 이 고추딸기가 가정의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는 용당 주민들의 품종 선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일반적으로 딸기품종은 금향·레드펄(육보)·미홍·매향·설향·아키히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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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는 각자 특색 있는 향기를 내뿜는 소노마을, 율리마을, 효충마을이 있다. 이제부터 마을의 향기를 따라, 마을 찾아 역사 찾아 소토리 여행길을 떠나보자. 경부고속도로 양산 IC에서 벗어나 우회전하여 통도사 쪽으로 방향으로 300m 정도 오면 좌측에 어곡터널과 공단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까지 왔다면 벌써 소토리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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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소토리 동래정씨 사당인 소노서원 뒤편에 성림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다. 이곳에 처음 들어가면 아담한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장중한 느낌을 받게 된다. 성림사는 소노마을 이장 말에 의하면, 1967년쯤 율리마을 사람인 안종석 씨가 후원하고 승려 최옥선이 주도하여 창건되었다. 처음에 이곳에 사찰을 지을 때는 주민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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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마을을 둘러보는 일은 보물찾기를 하는 것과 같다. 마을회관에서 마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진짜 마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마을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마을을 아우를 수 있는 야트막한 산지 쪽에서 천천히 둘러봐야 할 것이다. 지금은 마을회관 주변에 깔끔하게 정비된 주택들이 들어서 있지만 옛적에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1990년대부터 정관 신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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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맑은 공기를 자랑하는 이곳 마을들은 동래정씨와 광주안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기도 하다. 주민들 대부분이 논밭을 일구며, 평온한 삶을 살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 농경지였던 곳에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평온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양산시가 소노마을, 율리마을, 효충마을 등이 포함되는 소토리 일대를 공장지역과 준공업지역으로 지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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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마을은 웅상농청장원놀이의 명성에 걸맞게 TV에도 여러 차례 방영될 만큼 유명한 마을이다. 전통놀이의 맥을 이어가는 마을로써 사람들에게 알려진 만큼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부산에서 방문할 때에는 7번 국도를 타고 울산 방향으로 가야 한다. 작은 마을이지만 두 개의 광역시를 사이에 둔 지역답게 도로변은 이미 도시화가 되었다.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선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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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들 앞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낙동강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용산이다. 이 산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마을사람들에게는 마을의 정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그런데 2002년 1월 19일에 이 마을에 큰 일이 벌어졌다. 이 용산이 앞으로 갈라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자연적으로 갈라져도 문제가 되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사람이 갈라놓는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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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가며 오늘도 용당 사람들은 자신이 키우는 작물에 애정을 쏟고 있다. 그들에게 딸기나 수박은 단순한 과일이 아닌 자식이요, 작품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한낮의 더운 햇빛도 견뎌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아마 홍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모종부터 시작해서 거름 주고 물주고 심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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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마을과 율리마을, 효충마을은 조선시대까지만 하여도 양산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었던 마을들이다. 35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동네의 가운데를 관통하고,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마을의 형태는 크게 변하였다. 율리마을은 공장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마을 취락지구로 지정되어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의 초입부에 율리 마을회관이 있고, 그 앞에 자리 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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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토리 마을 일대는 양산 IC가 인근에 건설되어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인근 부산광역시에서 유출된 공장들이 이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도 공업단지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어곡터널 건너편에 형성된 유산공업단지는 물론, 인근의 산막지방산업단지도 계속 확대가 되면서 유일하게 남은 소노마을 가까이도 공장이 들어서 있다. 율리마을과 효충마을은 이미 공단속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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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게 이어진 길을 좇아, 초산마을 입구임을 보여주는 표지석을 따라 골짜기로 올라가면 도시형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다. 10여 년 전부터 주택 개발붐이 들어 옛 마을이 없어지고 외지인들이 들어와 사는 곳이다. 능선의 좌측에 풍경의 소리를 담은 국사당이 보인다. 초산리를 뒤로 한 채 다시 지방도를 따라 오면 지산마을 입구임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다. 입구에는 길 가던 나그네를 손짓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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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논과 밭들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에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공단이 들어오면서 마을 일대의 땅값은 다른 지역보다 많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양산의 지역별 지가 상승을 보면 상북면 소토리 공업지역이 표준공시지가의 높은 상승으로 15.1%의 상승률을 보였다.(『양산신문』, 2008년 6월 2일) 그러나 땅값 상승은 마을 사람들에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었다. 공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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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를 출발하여 경상도를 가로질러 흐르고, 경상도의 젖줄이라고 불리는 낙동강, 낙동강의 기나긴 여행을 시작해보자. 오늘날의 낙동강은 예전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낙동강의 이름은 어디서 유래되었으며, 어디로 흘러가는가. 낙동강의 이름을 찾아보기 위해서 다 같이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낙동강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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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특징은 각기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방언, 즉 사투리이다. 지역마다 문화적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지형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은 사람의 이동이나, 물자,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흐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명동마을도 지형적 이유와 역사적 이유로 독특한 문화를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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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들에는 비닐하우스들이 끝없이 줄지어 있다. 이렇게 용당들에서는 대부분이 비닐하우스로 딸기를 재배하고 노지 농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닐을 벗기는 경우는 옥수수나 산도(밭벼), 또는 콩이나 식물을 심어서 갈아버리는데, 이것은 땅의 지력을 올려 질소와 같은 무기질을 보충하는데 큰 몫을 한다. 비닐하우스는 따뜻한 온기로 탐스러운 딸기를 키울 뿐만 아니라, 농사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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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아주머니 두 분께서 담소를 나누며 딸기를 따고 계신다. 반가워 인사를 드리며 여기 어디 사시냐고 물으니, 이 지역 사람이 아니란다. 아주머니들께서는 삼랑진 사람이라면서 여기 하우스에서 일당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고 하신다. 이처럼 용당들에서는 딸기농사의 노동력은 자가 노동력 외에도 일꾼들을 많이 쓴다. 딸기농사를 하는 경우에는 일손이 많이 들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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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신기산성(성황), 북부동산성(동산성), 우불산성, 마고산성(고장성), 단조산성 등 성곽이 적지 않게 축조되었다. 이곳은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양산 물금까지 힘차게 흘러 들어와 한 번 숨은 쉬는 장소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밀양부터 불어나기 시작한 낙동강이 합천 황강에서 흘러오는 또 다른 줄기와 어우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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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변을 따라 놓여진 지방도 1022호선을 타고 가다보면 용당리 마을과 철도 제방 사이에 적지 않은 규모의 습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배후습지의 전형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습지이다. 60㏊의 저습지중 10㏊ 정도는 농민들이 간간히 홍수피해를 겪으면서도 농사를 계속하여 짓고 있으나, 나머지 50㏊는 저습지 자연 상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사이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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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황산강(黃山江)으로 불렸던 낙동강 언저리인 용당은 가야와 신라의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경주의 신라와 김해의 가야가 서로 치고 받던 초기의 전쟁터로서 황산진의 입구와 황산하(黃山河)를 기록하고 있다. 황산진이란 물금나루나 용당나루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이후 532년에 신라가 김해의 가야를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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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의 도심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커다란 돌들이 너부러져 있다. 산에서 굴러온 돌들도 아니다. 어떤 돌들은 축대 속에 끼워져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의 돌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범상치 않은 돌들이 양산초등학교 주변에 모여 있다. 과거의 역사는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사료 속에만 남아 있지 않고 현재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며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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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 지명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연의 설비에 바탕을 둔 불법의 세계와 깊은 인연에서 유래된다. 이 산에서는 신선과 독수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영축산이 우리의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 계기가 통도사의 창건에서 비롯되었으며,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의 사람들이 영축산이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던 산 이름인 영축산으로 부른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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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의 위치는 여러 고지도에 기재되어 있으나 읍성의 구조가 구체적으로 그려진 것은 「해동지도(海東地圖)」(18세기 중엽, 채색필사본, 47.0×30.5㎝, 규장각)이다. 양산의 묘사 내용을 보면 전체적으로 황산강을 끼고 있는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산줄기가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동북쪽과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산맥의 모양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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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들에 봄이 오면 곳곳에서 새콤한 딸기 냄새가 밴다. 하지만 지금의 용당들의 모습과는 달리 옛날 이곳에서는 대부분 논농사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벼농사는 딸기농사보다는 일이 많이 없어 벼농사를 짓는 것이 더 쉽지만, 논농사는 지어 봤자 남는 게 없어 대부분의 농부들이 지금은 딸기농사를 하고 있다고 딸기를 재배하는 김갑식이 말한다. 용당들에서 논농사 대신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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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마을 앞을 유유히 흐르는 하천은 회야강이다. 회야강은 우리나라의 하천 중에 북쪽으로 흐르는 몇 안 되는 강이다. 물길은 사람의 마음을 잇는다 하였다. 이 강이 울산으로 유입되기 때문에 명동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울산 사람들과 같은 물을 먹는다는 동질적인 의식을 내재하도록 하는 데에 바탕이 되고 있었다. 이 강은 웅상읍의 주진리 원효산에서 출발하여 덕계천과 합류되어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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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마을은 양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뻗은 정족산(鼎足山) 줄기의 지맥에 해당하는 원효산을 뒤로 하고 자리 잡고 있다. 원효산(높이 922m)은 양산의 웅상읍·하북면(河北面)·상북면(上北面)을 경계 짓는 산이다. 웅상 회야강(回夜江)의 발원지이며, 원효암을 비롯하여 홍룡사(虹龍寺)·성불사(成佛寺)·혈수폭포(血水瀑布) 등의 명승지를 담고 있는 산이다. 그 끝자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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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리 당곡마을의 가야진사가 있는 곳은 신라시대 눌지마립간이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터였다. 일명 옥지연(玉池淵)이라고 하는 낙동강은 강원도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경북·대구·경남과 부산을 거쳐 남해로 흘러드는 1300리 길로 영남의 젖줄로서의 구실을 하여 왔다.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인 서긍의 저서 『고려도경』에 의하면 수레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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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는 2007년 9월 한 농민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주인공은 하북면 지산리 지산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최학용(67) 씨였다. 그 편지의 내용은 시에서 지난 7월에 설치한 야생동물 피해예방시설인 전기울타리 덕분에 농작물이 피해를 입지 않은 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야생동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300여 마지기를 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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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먼지를 풀풀 날리며 공사가 진행 중인 화성 파크드림 아파트 건설 현장. 이렇게 명동마을에도 점점 도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아파트 건설현장을 지나면 산으로 오르는 작은 샛길이 하나 보인다. 마치 도시에서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통로 같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길은 바로 시명골로 가는 입구이다. 샛길 입구에는 시명사, 청룡사, 기원정사, 시명골 쉼터 등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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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격전지 가운데 하나가 낙동강 변에 있는 양산 일대이다. 왜군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영남로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곳이 바로 이곳 양산 일대였다. 조선의 밀양부사 박진은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여 삼랑진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지역에는 작원(鵲院)이 있었는데 이곳은 낙동강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관문이었다. 물론 육지에서 낙동강을 따라 나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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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오늘날과 같은 교통로가 발달되지는 않았으나 교통로들 중에 사람들의 이동이 많고, 중요한 길들인 ‘대로’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7대로’가 있었는데 그 중에 영남에서 한양(서울)으로 가기 위한 여정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 바로 영남대로이다. 영남대로는 영남지방에서 가장 큰 길로 오늘날의 부산~양산~삼랑진~상주~문경~충주를 연결한다. 또한 영남대로는 단순히 교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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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지산리는 지산, 평산, 서리로 나누어져 있다. 지산리의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통도사를 빠트리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먼저 통도사와 관련하여 남아 있는 지명을 살펴보자. 옛날 평산의 옛 이름은 부도골(혹은 부뒤골)이었는데, 이것은 부도(스님들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탑)가 있는 뒷마을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국사당을 중심으로 본 서리마을을 본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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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로 든든하게 산이 자리한 지산리가 위치한 곳은 영취산의 끝자락이다. 우리나라의 풍수지리학에 의하면 기가 많이 모이는 곳에 평범한 사람이 자리 잡으면 기에 눌리기 때문에, 이런 곳에는 절이 위치하여 기를 눌러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큰 절이 앉아 있는 곳은 무척이나 많은 기(氣)가 모이는 곳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마을의 입지를 풍수지리학으로 설명하자면 영축산에서 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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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들에서 재배되는 딸기는 다른 마을에 비하여 반촉성 재배를 하고 있다. 촉성재배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열매를 맺는 시기를 앞당기는 것을 말한다. 용당들에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곳을 해마다 덮치고 있는 홍수 때문이다. 홍수와 딸기는 계절상 크게 상관이 없이 보인다. 딸기의 수확은 3월에서 4월이지만 홍수는 7월에서 8월 정도에 일어나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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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될 당시에 양산 IC는 양산시 신기동에 있었다. 그러나 양산시의 교통량이 늘어나고 시가지가 확대되면서, 2005년 11월에 상북면 소토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어곡터널은 2004년에 만들기 시작해서 2005년도에 완성되어 소토리와 유산공단이 연결되었다. 최근 2008년부터 유산교-효충교를 시공하고 있으며 이 사업은 2010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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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긴 수염을 날리며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용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길몽이라 여겨 복권을 사러 가거나, 혹은 장군감이 태어날만한 태몽이라 여길 것이다. 꿈에서뿐만 아니라 옛날이야기에도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처럼 용은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신성시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용을 뜻하는 순우리말은 ‘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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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용당리에는 논농사를 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마을사람들의 삶이 대단히 곤궁했었다.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먹지 못한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예전 이곳 용당리에는 논농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곳이 홍수로 물난리가 많이 일어나는 곳이어서 예전부터 논농사를 피하고 다른 농작물을 심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용당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