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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전해 내려오는 통도사 중건에 대한 사찰 연기담. 사찰 연기 설화는 사찰을 대상으로 그에 얽힌 창사·중건·폐사 혹은 고승·보살·부처 등을 통해 불교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설화이다. 사찰 연기 설화가 일반 설화와 다른 점은 일반 설화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불교 교화라는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통도사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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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이후 김종직 등이 가야진 용당의 풍광과 그에 대한 감회를 읊은 한시. 「가야진 용당 제영(伽倻津 龍堂 題詠)」의 대상이 되는 가야진 용당은 삼국시대부터 박혁거세의 묘를 세우면서 시작된 가야진 용신제를 지내는 사당으로 국가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과 칙사를 보내어 국가의식으로 제사를 올려 장병의 무운과 낙동강의 순조로운 수운과 범람을 막고자 하였다. 가야진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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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토리의 소노마을은 동래정씨가, 율리마을은 광주안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소노마을 지명은 작을 소(小)와 나라 노(魯), 즉 작은 노나라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작은 나라라는 뜻에 맞게 동리를 중심으로 밖의 마을을 외리, 안 골짜기에 있는 내리, 마을 뒷산 이름을 ‘하늘 만딩’이라고 불러왔다. 소노마을은 동래정씨 문중을 중심으로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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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대(臺). 경파대는 조선 고종조 사인(士人) 정임교(丁壬敎)가 향토의 사우(士友)들과 수창(酬唱)하던 승경지(勝景地)다. 정임교는 이황(李滉)의 문인인 고암(顧庵) 정윤희(丁胤禧)[1531~1589]의 후손으로, 자는 남서(南瑞), 호는 매촌(梅村), 일명 규열(奎烈)이라고도 하며,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정임교는 양산향교의 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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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마을을 감싸는 산 가운데 오른쪽 신인 백호에 해당되는 야트막한 능선이 있다. 부드럽게 마을을 남쪽으로 감싸 돌면서 평지로 잦아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산이지만 이곳에서 옛날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이 일명 ‘명곡리 고분군’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주로 4~5세기의 토기류가 발굴되었다. 토기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용기이므로 당시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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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었던 나루. 원래는 구읍포(仇邑浦)로 불렀다. 양산 읍내에서 가장 가까운 나루 터로 낙동강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수운의 요지였다. 그러나 내륙 수송이 발달하고 잦은 홍수로 수로가 바뀌자 차차 쇠퇴하였다. ‘굽개’는 ‘굽은 개’로 강의 형태가 여러 번 꺾어지는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즉, 양산천은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시살등의 여러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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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지라 천변 영산신씨(靈山辛氏)의 재사인 삼강사 앞에 위치해 있다. 옛날 지라천(旨羅川)에 큰 소(沼)가 있었는데, 그 소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살았던 신용권(辛容權)이 부친 신도일(辛道日)의 유상처(遊賞處)로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구룡대라고 이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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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병풍. 「구룡도육곡병풍(九龍圖六曲屛風)」의 재질은 한지 혹은 상지(桑紙)이고, 한 폭의 가로는 63.8㎝, 세로는 122.4㎝이며, 전체 너비는 412.2㎝인 여섯 폭 짜리 병풍이다. 홀수 폭인 1, 3, 5폭에는 용이 한 마리씩 그려져 있고, 짝수 폭인 2, 4, 6폭에는 두 마리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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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명동에 있는 조선시대 인명박홍남(朴弘楠)의 재실. 고령(高靈) 김성도(金聲燾)가 지은 「귀후재기」에는 우풍현(虞風縣)의 명곡촌(椧谷村)에 우뚝 솟은 정사가 있는데, 이것이 선무공신(宣武功臣) 훈련원 봉사 박홍남의 묘소 아래 재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후손 김장식(金長植), 김명수(金明守), 김정건(金正鍵) 등이 여러 친족들과 조상의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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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에 있는 조선시대 나주임씨 재실. 금영재는 나주임씨(羅州林氏) 김해문중이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조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재실이다. 임비(林庇)는 고려 충렬왕 때의 대장군 충청도지휘사판사재시사(忠淸道指揮使判司宰寺事)이고, 임비의 9대손 임탁(林卓)은 벼슬이 봉순대부해남감무(奉順大夫海南監務)에 이르렀다. 현관 입구에는 ‘경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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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김려택은 양산 지역 웅촌(현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에 살았다.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할 때 호랑이와 개, 쥐 등 세 가지 동물이 김려택의 효성에 감동하여 도와주었다고 한다. 김려택의 효행과 관련한 소문이 널리 알려져, 사후에 나라에서 호조좌랑의 벼슬을 내리고 정려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주진동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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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자는 인언(仁彦), 호는 초정(樵亭). 할아버지는 김종렴(金宗濂)이다. 김상영은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복시(覆試)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평소 경상남도 양산 지역의 선사재(選士齋)에 거처하며 동학들과 학문을 연마하고 인격을 수양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거상(居喪) 3년에 행실이 소박하기가 한결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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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부. 박씨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시명(金時鳴)의 처(妻)이다. 박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섬긴 것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맛있는 버섯을 먹고 싶어 하였지만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마침 뒤뜰의 뽕나무에 버섯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채취하여 드렸다. 버섯을 따면 그 자리에 또 다시 돋아나곤 하여 시부모님이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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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순경(舜卿), 호는 몽천(蒙泉), 삼옥당(三玉堂).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며, 김재연(金在衍)의 동생이다.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에 밝았다. 유정재(柳定齋)의 문인(文人)이다. 양산(陽山) 조충식(趙忠植), 동계(東溪) 한긍인(韓兢人),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몽천재운(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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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김정해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6년 상을 치렀다. 남들은 3년 상도 잘 치르지 않는데 여기에 3년을 더하였으니 그 어려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원래 3년 상을 치르게 되어 있는 부모상을 6년이나 치렀으니, 이러한 행동 또한 예에 어긋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은 김정해의 효성이 남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양산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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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어머니가 눈병을 앓다 시력을 잃어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하자 온갖 약을 쓰고 정성을 다하여 북두칠성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어머니의 눈이 갑자기 밝아졌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효성에 감천(感天)하였다”라고 말하였다. 경상도에서 김칠득(金七得)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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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수성(壽城). 호는 북헌(北軒). 양절공(養節公) 나익희(羅益禧)의 후손으로 하동부사 나순손(羅順孫)의 7대손이며, 참봉(參奉) 나경문(羅景文)의 고손자이다. 안시명(安諟命)의 손자사위이다. 천성이 착하였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였다. 성리학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뜻을 밝혀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손처눌(孫處訥)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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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석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대(臺). 남유대는 성주인(星州人)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이기주(李琪柱)가 만년에 쌓은 누대이다. 남유대 옆으로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고 물줄기가 셋으로 나뉘어 흐르고 있다. 아래는 이기주가 남유대에 대하여 지은 시이다. “천리 교남 땅 낙동강 동쪽/ 이 대를 쌓고서 사람들과 함께 했네./ 절벽에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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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토지대장에 등재된 경상남도 양산 지역 하천 주변의 저습지. 노전(蘆田)은 하천의 퇴적 작용으로 인해 하류 지역에 형성되는 저습지로 갈대를 비롯한 습지성 식물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의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 노전이 전답(田畓)·저전(楮田)·죽전(竹田)·송전(松田)·저전(苧田)·과전(果田)·채전(菜田) 등과 함께 주요 토지 항목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노전은 황해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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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에 소재한 풍류를 즐기고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기능을 가진 다락식의 집 양산은 태백산맥에서 이어진 천성산(千聖山) 시발지에서 천태산과 대웅산으로 분리되었으나 천성산 말미에 와서는 금정산(金井山)이 이를 받쳐 주고 취서산에서 발원되는 물줄기가 양산천의 주류가 되어 내원계곡 오룡곡(五龍谷) 계곡으로부터 대석천은 천성산 흥룡폭포에서 발원되는 물이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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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용당은 낙동강을 경계로 김해와 접하고, 천태산을 사이에 두고 밀양 삼랑진과 경계한다. 마을의 사방이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다른 마을로의 이동이 쉽지 않은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는 양산이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김해나 삼랑진 또는 구포로의 이동이 쉬웠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배를 타고 수로를 이용하여 다녔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에서 육로보다는 수로가 대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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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신전리에 있는 수원김씨 재실. 재실은 모두 삼가(三架)로서, 동서 두 방은 재소(齋所)이며, 재소 가운데와 앞쪽은 당(堂)으로서 재회소(齋會所)로 삼았고, 옆에 주방과 고사가 있다. 앞으로는 요사채와 출입문을 만들었고, 정당에 편액을 달아 ‘도원재(道源齋)’라 하였다. 문소(聞韶) 김종락(金鍾洛)이 쓴 「도원재기(道源齋記)」에 따르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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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어곡동에 임진왜란 후 최흥국 등이 세운 정자의 터. 남계(南溪) 최흥국(崔興國)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고향 양산 지역으로 돌아와 한강(寒崗) 정구(鄭逑)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망우당 곽재우 등과 함께 화왕성 전투 등에 참전하여 전략을 세우고 진두지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최흥국은 임진왜란 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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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마을을 따라 신령스런 독수리의 산이라고 하는 영축산을 오르는 길에는, 지금은 애잔한 흔적만 남아 있는 단조성이 있다. 그 흔적을 찾아 단조성으로 가는 길은 먼저 통도사 입구에서 지산리(서리·평산·지산)의 지산마을회관 앞 운동장 쪽으로 등산로를 따라 가야 한다. 그 길을 따라 마을을 지나 300여m 정도 가면 조선 숙종 37년에 동우대사가 건립한 축서암이 나온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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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서암 지산마을회관 앞 운동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마을을 지나 300여m 가면 1711년(숙종 37)에 동우대사가 건립한 축서암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절(암자)들은 주로 마을로부터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자연과 일정한 조화를 가지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축서암은 통도사에 소속된 암자이지만, 영축산 아래 지산마을 속에 있어 마을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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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형제 사이에 우애를 두텁게 하여 나라로부터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았다. 이에 마을에서 사당(祠堂)을 세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역의 관리인 역승(驛丞)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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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화선(化善).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의 후손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재주와 기예가 남달랐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남김없이 읽어 학문이 뛰어났다. 자신을 연마하여 행동을 깨끗이 하였고, 후진을 깨우치는 데 앞장서 친구들이 존중하여 우러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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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화룡리 어곡동에 있는 조선시대 대(臺). 영일인(迎日人) 처사(處士) 정상순(鄭相淳)이 축조하였다. 할석을 쌓아 반구형으로 담장을 둘러놓았으며, 바닥에는 평평한 자연석을 깔아놓았다. 그 위에는 장기·바둑·고누판이 새겨져 있다. 건너편 바위에는 휴룡연(休龍蓮)이라는 각서가 있다. 수석(水石)의 기절(奇絶)이 많아 읍재(邑宰)와 문인(文人)들의 제영(題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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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에 있는 대(臺). 반산대는 묵경(黙耕) 유준영(柳準永)과 그의 동생인 유복영(柳福永)과 유해영(柳海永) 삼형제가 유상(遊賞)하던 곳이라고 한다. 유준영이 남긴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방의 봉화산에 아침 해 하늘로 떠오르고/ 석양에 푸른 돌은 물 맑은 북천이로다./ 옷섶을 날리며 대에 올라 금회를 노래하는데/ 반산대 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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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준영이 반산대 주위 경관과 유희의 감회를 읊은 칠언율시의 한시. 반산대(盤汕臺)는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탑산(塔山) 아래에 있다. 반산대는 묵경(墨耕) 유준영(柳準永)과 동생인 유복영(柳福永), 유해영(柳海永) 등 3인이 노닐던 곳으로, 바위에 새기기를 “대가 없으면 반(盤)이 없고 반이 없으면 이름이 없다. 대와 반이 서로 의지하니 주로 그 뜻을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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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대(臺). 영천이씨 족보에 의하면, 영조 때 이정회(李廷會)라는 사람이 고을 선비들과 유상(流觴)한 곳이라 한다. 선장(仙庄)이라는 지명에 따라 반선대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반선대의 큰 바위에 ‘반선정’이라 새겨져 있고,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다. ‘반선정’ 위에는 모란바위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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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도언(道彦), 호는 창산(昌山). 양산방씨의 시조인 방태경의 후손이며, 양산 지역 출신으로 명망이 높았던 방익(房翼)의 후손이다. 방채수에 관하여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양산 문행(文行)조에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재능과 기예가 뛰어났고 슬기로웠다. 말은 어눌했으나, 일을 처리하는 것은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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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경원(敬元), 호는 경재(敬齋).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백유익(白有翼)이고, 아버지는 백사정(白思正)이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무과 조에 의하면 “효성과 우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덕행이 있었다. 남는 시간에는 집안일을 다스렸다. 성품과 마음 씀씀이는 소박하였지만, 생각은 넓은 세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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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조선시대의 역참은 고려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개편하면서 재정비되어, 『경국대전』의 전국 역로망 체제로 확립되었다. 역의 수는 고려 때 520여 개 소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540여 개 소로 기록되어 있고, 『경국대전』에는 540여 개 소로 시대에 따라 다소 변천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한 도별 역수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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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김재형이 성정 도야의 공간으로 복룡대를 이야기하면서 읊은 칠언율시의 한시. 복룡대는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구소석에 있으며, 삼옥당(三玉堂) 김재형(金在衡)과 김재언(金在彦) 형제가 노닐던 곳이다. 복룡대의 주인은 정인휘(鄭寅諱)로, 대를 조성한 후 자신의 초명인 정인석(鄭寅錫)을 음각하였다. 『양산향교지』 등에는 복룡대의 주인이 삼옥당(三玉堂) 형제로 잘못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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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불과 연기로 통신하던 제도와 시설. 봉수제(烽燧制)는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 우편과 전기 통신이 창시되기 이전까지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봉수제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 분명한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고려 중기부터이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의 수, 봉화군의 정원 등 여러 규정을 정비하고,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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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에서 부처의 유골이나 불상을 안치하고 예불을 드리기 위해 세운 구조물. 경상남도 양산시의 불교건축은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통도사의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이중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불전으로, 1997년 1월 1일자로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유물들은 자장율사가 처음 세운 당시의 것은 아니고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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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어곡동과 원동면 대리에 있는 절터. 사찰의 창건과 폐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절터가 있는 복호산은 비봉산, 선일산, 응암산 등으로 불리었다. 『양산읍지』불우조에 “비봉암은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飛鳳庵在郡西十里)”고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양산시 어곡동과 원동면 대리 뒤 복호산(伏虎山)의 8부 능선 매바위 아래에 있다. 사찰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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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년(선조 6) 이기(爾奇)와 신백(信白)이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창건한 암자. 통도사 부속 암자 중 하나로 서운암에서 서쪽으로 약 400미터 되는 지점에 있다. 사명대사는 이곳에 모옥을 짓고 수도하면서 통도사의 금강계단 불사리를 수호하였다. 1573년(선조 6)에 이기(爾奇)와 신백(信白)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명암(泗溟庵)’이라는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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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여락리 남쪽에서 부산으로 넘어가던 고개. 예로부터 사배치(沙背峙)에는 쇠가 많이 났으며, 서낭당이 있어 당고개라고도 하였다. 사배치 길가 모퉁이에는 전지바위, 정진암, 지경바위라고 부르던 바위가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공적을 새긴 바위이다. 현재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대부분이 깨어지고 말았다. 사배치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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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 고려시대의 의창 제도·상평창 제도를 이어받아 조선시대에 발전시킨 것이 사창제도이다. 사창이 처음 실시된 때는 1451년(문종 1)이었다. 이때 경상도 각 고을의 사창 설치 규정이 마련됨에 따라 결실을 보게 되었으며, 1461년(세조 7)에 드디어 사창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될 수 있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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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 있는 이징석·이징옥·이징규 삼형제의 사당.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 이전생(李全生)이 조선 태종 때 순찰사로 양산을 순력(巡歷)하다가 하북면 삼수리에 정착하여, 아들 장강공(莊剛公) 이징석(李澄石)과 충강공(忠剛公) 이징옥(李澄玉)과 영산군(靈山君) 이징규(李澄圭) 삼형제를 낳았다. 삼수정사는 이 삼형제를 모신 사당이다. 삼수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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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이천 대리에 있는 조선시대 조성된 청도김씨 사당. 삼우당은 청도김씨 영헌공(英憲公) 김대(金垈)의 후손인 김영호(金榮澔)·김기호(金基澔)·김성호(金聖澔) 삼형제를 추향하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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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에 있는 칠원윤씨 재실. 칠원윤씨 대언공파(代言公派) 양산 소문중(小門中)이 임진왜란 전에 남하하여 양산 상삼 및 양동에 세거의 터를 잡았는데 26세조 윤승원(尹承元)을 모시는 재사이다. 「상량재기」는 1997년 5월 18일 38세손 윤정삼(尹政三)이 근찬한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 태종무열왕 때 태사로서 고명원로(顧命元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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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있었던 초중등 단계의 사설 교육기관. 서당은 조선시대 서민 자제의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원형은 고려시대부터 설립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변화하면서 발전하였으나 현존하는 서당은 없다. 교육 내용은 글의 뜻을 익히는 강독, 글을 짓는 제술, 서체를 익히는 습자의 세 가지였다. 서당의 인적 구성은 스승인 훈장, 학도 중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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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선현제향(先賢祭享)과 교육을 위해 설치된 조선 시대 기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이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건립하여 운영한 것을 본받아 고려 말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것이 사립 중등 교육기관인 서원의 효시이다. 그 후 풍기군수로 온 퇴계 이황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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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 호는 해남(海南).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누정 경현당(景賢堂) 조에 의하면 “호는 해남이고, 본관은 보성으로 무과에 올라 우후(虞侯)에 봉해졌다. 집안을 지켜 규율을 아름답게 하였고, 양산에 살면서 풍속을 착하게 만들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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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의 이몽란에게 발급된 선무원종공신 3등 문서. 선무원종공신은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인물을 의미한다. 1604년 호성공신, 청난공신, 선무공신 합계 18명을 포상할 때 누락된 인물 가운데, 1605년 4월 1,060명을 선별하여 호성원종공신, 청난원종공신,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하였다. 「선무원종공신녹권」도 그때 함께 발급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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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 내의 마을인 성내리는 성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양산읍성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성내리라는 지명도 읍성과 함께 사라져 다른 마을들과 함께 통합되어 나눠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성내리의 예전 모습을 상상하기 조차 힘들다. 하지만 성내리의 일부 모습들은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남북로이다. 성내리의 남북로는 현재 미로의 흔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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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신기산성(성황), 북부동산성(동산성), 우불산성, 마고산성(고장성), 단조산성 등 성곽이 적지 않게 축조되었다. 이곳은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양산 물금까지 힘차게 흘러 들어와 한 번 숨은 쉬는 장소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밀양부터 불어나기 시작한 낙동강이 합천 황강에서 흘러오는 또 다른 줄기와 어우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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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인 사창(社倉). 우리나라에서 사창이 처음 실시된 때는 1451년(문종 1)이었다. 사창은 고려시대부터 설치해 온 의창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실시하였다. 즉, 원곡의 부족과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군자곡의 감소를 막자는 데 있었다. 농민에게 환곡 정책의 일환으로 대여했던 의창곡은 이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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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조선시대의 역참은 고려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개편하면서 재정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전국 역로망 체제로 확립되었다. 역의 수는 고려 때 520여 개 소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540여 개 소로 기록되어 있고, 『경국대전』에는 540여 개 소로 시대에 따라 다소 변천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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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원리에 있는 조선시대 사당.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영호(金英浩), 김을생(金乙生), 김의상(金義祥) 등 세 사람의 충신과 아홉 효자를 배향(配享)하고 있다. 원래 양산시 하북면에 있었으나 원동면 원리로 이건을 해왔다. 세덕사는 맞배지붕의 일각문 담장을 두르고 있으며, 내부에는 2단의 바른층쌓기 기단 위에 주좌(柱座)를 다듬은 정평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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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외석리에 있는 조선시대 건립된 진주강씨 재실. 강정구(姜貞求)는 진주강씨 23세손으로 자가 세정(世貞)이며, 진주강씨 양산 입향조가 되었다. 세정재는 강정구와 그의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된 재실이다. 세정재는 시멘트로 축조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와가(瓦家)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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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조선시대 불전(佛殿). 통도사 세존비각은 중로전(中爐殿) 영역에 있는데,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의 서쪽 편 금강계단 옆에 바짝 붙어 있다. 세존비각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였고 평방은 가설하지 않았다. 공포(栱包)는 출목(出目)이 있는 주심포식으로, 살미첨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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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에 있는 조선시대 건립된 재실. 소경재는 죽림칠현 김칠득(金七得)과 증산(甑山) 박승장(朴承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재실이다. 소경재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소경재기(紹景齋記)」와 「현효사이건기(賢孝祠移建記)」가 남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경재기」 “ 양산군 현효사는 김죽림(金竹林), 박증산(朴甑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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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마을에 들어서면 두 개의 오래된 사당을 만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동래정씨 사당인 소노서원이다. 동래정씨가 이곳 소노마을에 정착하게 된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려 말 조선 초기로 보인다. 동래정씨의 가보를 보면 고려 초기에 그들의 조상이 경주에서 부산 동래로 들어왔고 이들 중 일부가 고려 말에 소노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동래정씨가 소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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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조선 중기 사액 서원. 백수회(白受繪)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가서 9년간 억류되었다가 귀국한 후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민심이 흉흉하자 여러 번 상소를 올렸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예빈시참봉,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호조참의(戶曹參議)가 추증되었으며, 양산의 송담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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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인 사창(社倉)의 하나. 우리나라에서 사창이 처음 실시된 때는 1451년(문종 1)이었다. 사창은 고려시대부터 설치해 온 의창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실시하였다. 즉, 원곡의 부족과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군자곡의 감소를 막자는 데 있었다. 농민에게 환곡 정책의 일환으로 대여했던 의창곡은 이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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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조선시대 암자 터.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양산군」 기록에 의하면 “신불암(新佛庵)은 내포(內浦) 서산 골짜기에 있다”라고만 되어 있다. 양산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16㎞ 떨어져 있는 내포는 원동에서 배내골로 가는 길가에 있는 마을이다. 이로 보아 신불암의 현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한편 용당동에 있는 밭에서 수습한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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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영포리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조선 중기 사찰. 신흥사는 영축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본전(本殿)인 대광전(大光殿)은 광명(光明)이 두루 비친다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봉안(奉安)한 곳이다. 중종대까지의 연혁은 알 수 없으며, 1582년(선조 15) 성순(性淳)이 중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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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인동(仁同), 장학석(張鶴碩)의 딸로 심상순(沈相舜)의 아내이다. 인동 장씨는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남편이 내장에 종기가 생겨 고통스러워하자 하늘에 빌며 자신이 대신 앓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숭어를 잡는 꿈을 꾸고는 병이 곧바로 나았다. 남편이 죽자 조용히 시체를 끌어안고 남편을 따라 죽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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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 누각. 옛날에 누 아래에 시내가 흐르고 넓은 면적의 푸른 대나무가 있어 서로 마주하여 푸른 빛을 비추고 있어 쌍벽루(雙碧樓)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쌍벽루는 처음에 벽계(碧溪)로 명명되었다. 고려시대 1381년(우왕 14)에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군수 전평원(田平遠)이 중건하여 쌍벽(雙碧)으로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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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의 안근과 안시명이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 문과와 무과에 급제하여 국왕이 내리는 교지를 홍패라 한다. 안근이 1594년 1월 25일, 안시명이 1603년 1월 각각 무과에 급제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교지가 발급되었다. 안근의 「무과교지」는 가로 43.5㎝, 세로 90㎝ 크기의 한지이고, 안시명의 「무과교지」는 가로 43.5㎝, 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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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의 교생 안시명을 참봉으로 임명한 교지. 「문관고신교지」와 더불어 「진사시급제교지」가 1977년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진사시급제교지」는 1882년 양산의 유학 안효필이 진사시에서 3등급 56등으로 합격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교지이다. 「문관고신교지」와 「진사시급제교지」 모두 가로 40㎝, 세로 50㎝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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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늑동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안우의 묘. 안우는 1524년(중종 19) 17세에 문과 장원에 발탁되어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을 거쳐 외직으로 나와 개성·밀양·평산부사를 역임하고 고종(考終: 제 명대로 살다가 편하게 죽음)하였는데, 경상남도 양산시 북가동 부자지원(負字之原)에 안장하였으며, 부인 강릉김씨와 합부하였다. 양산군수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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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무신 안이명의 묘. 안이명은 임진왜란 때 양산에서 창의종군(倡義從軍)하다가 양산이 함락되자 밀양 청도, 울산, 대구 등지에서 싸웠는데, 안이명을 백호장군(白虎將軍)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충무공 휘하에서 당포만호로 있다가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승진되고 다시 가리포 첨사에 올랐으며 선무원종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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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고봉(高峰). 회암 안유(安裕)의 후손이다. 안처익은 향촌사회에서 후진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주위의 사람들을 가르치며 자연 속에서 은거하며 살았다고 한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의하면 ‘호는 고봉(高峰)이고, 본관은 순흥으로 회암 안유(安裕)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경현당(景賢堂)은 양산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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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명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 가마 터. 양산 명곡리 도요지는 대운산 기슭의 화양골, 솔밭골, 시명골에 산재한 가마 터이다. 화양골에서는 접시, 사발 등의 철화백자(鐵畵白磁)·흑유류(黑釉類)가, 솔밭골에서는 분청사기(粉靑沙器)·회백자(灰白磁)가 주로 출토되었다. 시명골에서는 분청사기·흑유류·백자가 각각 조사되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백자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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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에 있는 조선 중기 가마 터. 양산 법기리 요지에는 창기마을 뒤편 산 중턱에서 기슭에 이르기까지 여럿의 요지가 남아 있었으나, 근래 대부분 논과 밭으로 개간되었다. 창기마을 뒤편 산 위의 유적에서 채집된 것은 주로 백자편이다. 그 중에는 낮은 온도에서 구워 표면이 녹청자(綠靑磁) 같은 것이 섞여 있다. 처음부터 백자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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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성전암에 있는 조선 중기 및 조선 말기 고서 및 고문서. 양산 성전암 소장 고서 및 고문서는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 동활자본 1책,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목판복각본 1책, 『사서삼경정문(四書三經正文)』 목판복각본 1책,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序難錄)』 목판본 1책,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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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 왜식(倭式) 석성. 물금 증산리 왜성은 일명 양산성(梁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황산역(黃山驛)이 있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경상도 동남의 양산 지역이 교두보로서 중요하였기 때문에 황산역이 있었던 곳에 증산리 왜성을 쌓아 침략과 방어에 이용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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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조선 중기 불교 경전 목판. 대장경(大藏經)이라 함은 원래 인도에서 말하는 삼장(三藏)으로 세 광주리를 의미하는 경(經)·율(律)·론(論)을 말한다. 트리피타카(Tripitaka)라는 팔리어의 한역(漢譯)으로서 불전(佛典)의 총집성을 말하는 것이다. 삼장이란 부처의 설법[經]과 부처가 정한 교단의 규칙[律],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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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1652년에 비구니 선화자가 제작한 금동 천문도. 천문도는 조선시대 이외에도 고대의 고구려로부터 확인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4세기 말로 추정되는 무용총과 각저총, 5세기경의 장천1호분 천장, 6세기 말 7세기 초의 집안 오회분 4호 묘 천장 등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평양남도 대동군 덕화리 2호분에 나타나는 별자리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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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 불전. 건물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44년(인조 22)에 영숙화상(靈淑和尙)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세워지기 전에는 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익공(翼工) 형식의 공포(栱包)를 갖춘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둥이 높고, 각각의 기둥 간격이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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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의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 감로탱화. 감로탱화(甘露幀畵)란 지옥에 빠진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해 주는 장면을 그린 불화이다. 면(綿) 바탕에 채색한 「통도사 사명암 감로탱」은 폭을 상하로 엮어 이은 흔적이 있다. 화면 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상단부와 하단부에 얼룩과 바탕천의 박락이 부분적으로 보인다. 화면의 구도를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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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 불전. 통도사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석가모니불과 부처의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제자들인 16나한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전각이다. 1667년(현종 8)에 지성대사(智聖大師)가 창건하였으나 중수 연대는 알 수 없다. 통도사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외이출목(外二出目) 주심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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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서 사용해 온 통도사의 직인과 인장함. 인적 및 동인은 각종 도장을 보관하는 도장함과 도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장함은 사각형의 목재로 만들어졌고, 뚜껑까지 잘 갖추어져 있다. 표면은 상어 껍질로 장식하고 각 모서리마다 금속 장식을 부착하였으며 쇄금(鎖金)을 채웠는데, 우아함과 견고성을 보여줌으로써 그 속에 넣어둔 도장의 중요성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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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佛殿). 통도사 장경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서 지붕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만든 공포는 익공 양식이다. 통도사 장경각 내에 보관된 경판은 25종 801판에 이르는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변상(變相)을 새긴 목판 대장경 경판이다. 이들 목판 대장경은 불교 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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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중기 향완. 입사(入絲)는 청동이나 입철(粒鐵) 등의 금속 표면에 선이나 면을 파고 그 곳에 다른 금속을 박아 넣는 금속공예 기법이다. 은입사는 고려시대 불교 관련 기구에 널리 이용된 기법으로, 청동과 은의 색채 대비를 통해 다양한 문양을 격조 있게 표현함으로써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정수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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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호계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마애불. 양산 호계동 마애불은 커다란 연화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얼굴은 양각, 신체는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는 머리에 비해 작고, 얼굴은 방형에 가까운데, 눈, 코, 입의 표현을 보면 상호가 투박하고 토속적인 인상을 풍긴다. 신체의 오른쪽 부분은 마모가 심하여 오른손의 수인은 확인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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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가마 터. 양산 가산리 도요지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양산군조」에 보이는 관요(官窯)로 추정되며, 대접·접시류가 주를 이루지만 제기류·호(壺)·병(甁)·매병(梅甁) 등도 수습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약식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연이은 도굴로 인하여 많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최근 상태가 양호한 퇴적층과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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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원효암에 있는 조선 중기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복장 유물.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은 원효암의 중심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으로,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에 따르면 원래는 통도사 약사전에 봉안되었으나 말사인 원효암으로 옮겨졌다. 복장 유물로 불상조성기를 비롯하여 인쇄본 『다라니경(陀羅尼經)』, 오곡과 오색실 등을 넣은 동(銅)으로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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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의 도심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커다란 돌들이 너부러져 있다. 산에서 굴러온 돌들도 아니다. 어떤 돌들은 축대 속에 끼워져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의 돌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범상치 않은 돌들이 양산초등학교 주변에 모여 있다. 과거의 역사는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사료 속에만 남아 있지 않고 현재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며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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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은 우리의 기억 저편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양산읍성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려졌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그중 아름다운 영남의 모습을 자라하던 8루 중의 하나인 쌍벽루가 양산읍성의 마을에 있었다. 쌍벽루(雙碧樓)는 양산읍성 내의 관청의 부속건물, 즉 객사의 서루이다. 객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누각 아래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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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던 조선시대 정려 터. 양산의 효부(孝婦)와 정열(貞烈)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비각이 있었던 터로서, 경상남도 양산의 효부인 엄석규(嚴錫圭)의 아내 박씨(朴氏)와 정열(貞烈)인 엄국영(嚴國永)의 아내 이씨(李氏)의 행적을 표창하기 위해 정려각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양산군(梁山郡)」편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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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조선 전기 성종 때 도승지를 역임한 대봉(大峯) 양희지(楊熙止)[1439~1504]의 후손이다. 양의화는 선현을 존중하여 우러러보며, 학문과 덕행에 정진하였다. 송담서원에 힘을 쏟았으며, 유림을 주관하여 임금께 편액(扁額)을 청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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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일명(一名)은 근윤(根允), 자는 문익(文益), 호는 송정(松亭). 조선 전기에 『고려사』, 『세조실록』, 『예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한 문양공(文襄公) 양성지(梁誠之)의 후손이다. 양재근은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경상남도관찰부주사(慶尙南道觀察府主事)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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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조선시대의 역참은 고려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개편하면서 재정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전국 역로망 체제로 확립되었다. 역의 수는 고려 때 520여 개 소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540여 개 소로 기록되어 있고, 『경국대전』에는 540여 개 소로 시대에 따라 다소 변천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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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재두가 어룡대를 건조한 후 주변 경관과 자신의 유유자적한 삶에 대하여 읊은 칠언율시의 한시. 어룡대(魚龍臺)는 벽파(碧波) 양재두(梁在斗)가 건조한 대(臺)로,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영축산 기슭에 위치한다. 양재두가 어룡대에 새기기를 “사방의 산이 구름과 같으니/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는구나(四山如雲 魚變成龍)”라고 하였다. 칠언율시의 한시이며,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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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에 있는 조선시대 누대 터. 어룡대는 벽파(碧波) 양재두(梁在斗)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문에 “사방의 산이 매우 아름다워 물고기가 변화하여 용이 되었다”고 하였다. 물금읍 범어리 오봉산 기슭에 있다. 오봉산은 양산 시민들이 당일 코스로 많이 찾는 산으로 영남알프스의 동남쪽에 솟아 있는 명산이다. 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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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어영리에 있는 김해김씨 재실. 1779년(정조 3)에 원동면 어영리에 입향한 김해김씨 석성공파 66대조 김우현(金禹鉉)을 모시는 사당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한 목조 건물이다. 기둥은 다포계 양식이며, 배흘림기둥에는 여섯 개의 주련이 있고, 재청 양옆으로 방을 두었다. 재실 바깥은 관리인의 집과 대문이 있는데, 태극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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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전통시대에 공공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전국에 역과 원이 설치되었다. 역(驛)은 정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 공공 물자의 운송 등을 위하여 설치되었다. 원(院)은 공무 여행자의 숙식 제공과 빈객을 접대하는 숙박 시설로 설치되었다. 우리나라 역참은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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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늑동에 있는 조선시대 대(臺). 연필대를 묘사한 이재현의 글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돌 모양은 벼루와 같고 봉우리 모양은 붓과 같으니 오직 너를 좋아하는 것이 너의 붓과 벼루로다. 너를 사랑하고 이름하기를 연필이라 한 것은 붓으로써 쟁기를 삼고 벼루로써 밭을 삼아 갈고 또 다스리면 나의 단전(丹田)을 개벽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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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던 조선시대에 조성된 대(臺). 조선시대에 현재의 양산시 산막리 영동에 살았던 정병모(鄭柄謨)가 3단으로 축대를 쌓아 조성하였다고 한다. 천성산 기슭에서 발원한 범내가 양산천으로 향하다가 ‘ㄱ’자로 꺾어져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자리에 위치한 암반 위에 있었다. 대는 높이 약 6~7m, 넓이 60평 정도로 100여 명이 동시에 모일 수 있는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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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예취신은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3년 동안 항상 대변을 맛보고 병세의 호전 여부를 살피더니 급기야 병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어 어머니를 회생케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 옆에 오두막집을 짓고 죽으로 연명하며 효성을 다하니 나라에서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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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의 위치는 여러 고지도에 기재되어 있으나 읍성의 구조가 구체적으로 그려진 것은 「해동지도(海東地圖)」(18세기 중엽, 채색필사본, 47.0×30.5㎝, 규장각)이다. 양산의 묘사 내용을 보면 전체적으로 황산강을 끼고 있는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산줄기가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동북쪽과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산맥의 모양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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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호계동에 있는 장수황씨의 재실. 재실 이름을 오린재라고 한 이유는 후손들의 기록에 잘 드러난다. “장수황씨의 조상 중에 고려 후기, 조선 전기에 황희(黃喜)가 있었으니 곧 방촌 선생이다. 선생은 문장이 세상에 으뜸이요 정략의 도와 청렴 결백한 자질은 여항의 필부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흔의 노령에 이르도록 세종대왕을 보필하여 그 치적의 많음은 지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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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내송리에 있었던 조선시대 정자 터.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정자로, 바위 위에 ‘오수정(午睡亭)’이라고 새겨져 있다. 양산시 동면 내송리 마을 동쪽 1㎞ 지점 동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넓은 반석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위쪽 200m 지점에는 폭포가 흐르는데, 여기에 오수정 터가 있다. 현재 정자는 없고 바위에 ‘오수정’이라고 새긴 흔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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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박경홍이 용대의 절경을 감상하며 지은 칠언율시의 한시. 용대(龍臺)는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에 있으며, 그 골짜기는 깊고 냇물이 길어 용이 놀던 곳이라 전한다. 용대에는 용이 비스듬히 서린 형상이 있으며 폭포도 흐른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절경을 만끽하는 정회를 읊고 있다. 용대가 있는 곳은 초목이 늦게까지 시들지 않을 만큼 깊은 골짜기라, 물고기와 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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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용연사지에 있는 조선 중기 부도. 선화대 자성대사부도는 노전암 대웅전 북쪽에 위치한 두 기의 부도 가운데 좌측의 것이다. 높이 170㎝, 둘레 230㎝, 대좌 높이 95㎝의 화강암으로 만든 석종형(石鐘形) 부도이다. 기단부는 복련(覆蓮) 하대석 위에 팔각형의 중대석과 앙련(仰蓮)이 조각된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팔각형 중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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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 법기천에 있는 대(臺). 양산 사람인 박경홍이 용천대를 소요 자적하며 지은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땅과 하늘이 숨겨서 이름은 드러나지 않아도/ 돌로 된 대와 은빛 폭포를 자연으로 이루었도다./웅덩이가 검푸르니 일찍이 고기 새우 집이 되었고/ 골짜기가 깊으니 초목이 늦도록 싱그럽도다./고사(高士)가 서로 만나면 사마공처럼 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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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의 효자. 일찍부터 효성이 남달라 무덤 옆에 오두막집을 짓고 시묘를 지냈다. 오로지 학문에만 마음을 두었으며, 특히 성리(性理)에 밝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양주(梁州)[지금의 양산]의 숨어 사는 뛰어난 선비라고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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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었던 조선시대 우촌 정수가 지은 정사(精舍)의 터. 현재 우촌정사는 터만 남아있고, 오시유가 지은 노래만이 전한다. “앞 언덕에서 소 먹이며 백석의 무구를 노래하노라/ 세상일은 내 알바 아니니 은약을 즐기노라/ 소가 주리고 배부름은 제 힘에 맡기노라/ 세월이 끝나도록 고생하여도 축적한 것 없노라/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거워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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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시에 원동관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나루. 양산 지역에서 밀양으로 건너가던 나루로, 원래는 원동관이 있던 곳이라 원동이라 불렸고, 원댕이, 원리라고도 불렀다. 원동은 신라와 가락국의 국경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이곳에 작원관원(鵲院關院)을 두고 육로와 뱃길을 감독, 관리하였다. 그래서 ‘원이 자리한 마을(洞)’이라는 뜻의 ‘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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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주진동에 있는 조선시대 효자 김희조를 추모하는 정자. 조선시대 양산 주진 마을의 효자 김희조는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한결같이 순종했으며, 학질로 고생하는 부모에게 살을 베어 먹이고, 등창을 앓을 때는 입으로 빨아서 낳게 했으며, 상을 당한 후 3년간 술과 고기를 금하고 매달 두 번씩 성묘하는 일을 늙어서도 폐하지 않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김희조에게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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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조선시대의 역참은 고려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개편하면서 재정비되어, 『경국대전』의 전국 역로망 체제로 확립되었다. 역의 수는 고려 때 520여 개 소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540여 개 소로 기록되어 있고, 『경국대전』에는 540여 개 소로 시대에 따라 다소 변천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한 도별 역수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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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박천수가 경상남도 양산 지역의 원효대(元曉臺)에 제영한 한시. 원효대는 원효암(元曉庵)에 있는데, 원효대사[617~686]가 득도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원효대제영」은 박천수(朴天銖)가 오랫동안 인적이 끊어진 듯 칡넝쿨이 엉킨 길을 따라 원효대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심정을 읊고 있다. "푸른 산 첩첩하고 물소리는 잔잔한데/ 칡넝쿨 여기저기에 엉켜 당겨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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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위천(渭川) 지역은 동래 지역과 언양 지역을 잇는 중간 지역에 있던 지역으로 봉화산(249m) 밑의 지역이다. 위천은 원적산에서 발원하여 양산천에 합류하는 지류인데, 하천의 명칭이 지역의 명칭으로 쓰이는 것은 일반적이다. 위천산(현재의 봉화산)에는 과거 봉수대 자리였던 위천봉대가 자리하고 있다. 『신증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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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윤빙삼은 시서를 많이 읽고 재주 또한 특출하였으며, 성품이 어질고 부지런하며 부모를 모시는 일이 남달랐다 한다. 불행히 일찍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를 더욱 지성으로 모셨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중에 있을 때 입에 맞는 음식을 올리고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징험하였으며, 혼절한 어머니를 단지 수혈하여 다시 회생시켰다. 동네사람들이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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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시 유산동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양산군지』에 따르면 윤산(輪山)은 유산리 앞들 가운데 있는 둥근 야산으로 일명 반월산(半月山)이라 한다. 지금의 양산지방산업단지 한전변전소 서쪽에 있는 산으로 일제강점기에 신사(神祠)가 있었다가 해방과 동시에 없어졌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 만들어진 40여 개의 찰방역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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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마을에 들어서면 그 입구 왼쪽에서 소계사를 만날 수 있다. 서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서원을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 서원을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있다. 본래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른 잎을 지니며, 강인한 인상을 주는 줄기 때문에 대나무와 함께 변하지 않는 절개를 상징하거나 인품이 뛰어나고 오래 사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나무 숲 속의 소계서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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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학문을 익히기 위해 지은 집. 율리정사는 『오륜행실도』, 『삼강행실도』, 『사기』,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 1672년(현종 13) 안희청이 진사 안효필의 생가에 학문을 익히기 위해 지은 정사로, 처음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이었다. 그러다 율리정사에 살았던 안종석이 1970년에 틀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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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김영봉이 율리정사의 모습과 기풍을 읊은 칠언절구의 한시. 율리정사(栗里精舍)는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으며, 1672년(현종 13)에 죽산(竹山) 안희청(安希請)이 안효필(安孝弼)의 생가에 학문 전념을 위해 지은 정사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현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율리정사의 기풍을 매일 비추는 밝은 달빛과 끝없이 흐르는 차디찬 냇가에 빗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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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함포리에 있는 경주최씨 재실. 양산시 원동면 함포리는 은수(殷岫) 최봉한이 충주에서 이주해 살던 곳이다. 최봉한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순수하여 지극하게 부모를 섬겼으며, 기개가 굳어 충직하게 의리를 지켰다. 병자호란 때 국권이 위태롭자 스스로 청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절의를 본받고자 깎아지른 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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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이규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외출할 때 반드시 부모에게 행방을 고하였고, 살림이 어려워도 섶을 팔아 부모를 공양했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생배를 원할 때도 한겨울에 이를 구하여 공양하였고, 어머니가 병중에도 생어(生魚)를 들고 싶어하면 구하여 드렸으며 손가락을 잘라 수혈해가며 봉양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묘를 지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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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의 선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진(元眞), 호는 우남(愚南).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양산에서 학행으로 이름을 얻은 사람으로,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학문에 뜻을 두었다. 서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가난한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도와주기를 좋아하였다. 고종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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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리 당곡마을의 가야진사가 있는 곳은 신라시대 눌지마립간이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터였다. 일명 옥지연(玉池淵)이라고 하는 낙동강은 강원도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경북·대구·경남과 부산을 거쳐 남해로 흘러드는 1300리 길로 영남의 젖줄로서의 구실을 하여 왔다.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인 서긍의 저서 『고려도경』에 의하면 수레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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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정자. 현재 황산역 내에 있는 정자로 옛 관리들의 휴식 장소였다. 일아라는 명칭은 한문공(韓文公)의 『승청벽기(丞廳壁記)』의 한 구절을 취한 것이다. 『양산군지』에는 일아정과 관련하여 조선 숙종 때의 명신 우암 송시열 기문(記文)이 기록되어 있다. 1630년(인조 8)에 찰방(察訪) 정백순(鄭百順)이 일아정을 창건하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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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에 있는 절터. 사찰의 창건과 폐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구전에 의하면 임경사(臨鏡寺) 아래 임경대에서 매일 관원과 풍류객들이 풍악을 울리고 육류를 먹어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폐사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 순조 때 양산군수 이연상이 편찬한 『양산읍지』 불우조에 나오는 “군의 서쪽 황산 기슭 큰 강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고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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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제1차 침략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략이 정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진왜란이라 한다. 이를 일본에서는 ‘문록(文祿)·경장(慶長)의 역’이라고 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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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에 있는 밀양손씨 재실. 밀양손씨 입향조인 손신(孫信)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이다. 손신은 밀양손씨 7세손인 광리군 손극훈의 19세손이 되는 첨정공파 손수산의 7세손이다. 손신은 창녕에서 출생하였으나 양산의 수성나씨 집안과 결혼하였고, 그 뒤 처가인 양산시 북정동에 정착하였다. 이로써 밀양손씨 양산 입향조가 되었다. 2002년에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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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암자. 통도사를 짓기 전인 진평왕 때에 자장율사가 바위 벽 아래에 움집을 짓고 수도하던 곳으로, 자장율사 입적 후에는 율사의 제자들이 수도하였다. 자장율사가 창건한 이래, 연대는 미상이나 회봉(檜峰)이 중건하였고 1870년(고종 7)에 한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63년 용복(龍福)이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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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우성(遇聖). 고려시대 밀직부사(密直副使) 장순(張純)의 후손이다. 장재문은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님을 몸과 마음으로 잘 받들었다.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였다. 장재문이 하늘에 빌고 산에 기도를 드렸더니 날아가던 꿩이 갑자기 뜰로 뛰어들어 왔다. 이를 잡아서 아버지께 드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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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의 충신을 기리는 단소(壇所). 신라시대의 충신은 박제상이다. 박제상은 신라 17대 내물왕 때 양산의 태수였다. 실성왕 때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눌지왕의 두 아우, 복호와 미사흔을 구한 후, 왜국에서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켜 순국한 충신이다. 고려시대의 충신은 김원현이다. 김원현은 고려 문종 때 왜적이 전선 19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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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 좋은 곳에 정자(亭子) 모양으로 지어 한가히 거처하는 집. 경남 양산시에는 천성산과 낙동강의 물줄기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어 많은 문무대신 관료들의 행차가 빈번하여 정사(亭舍)가 많이 세워져 있다. 이러한 정사는 실질적으로 고려 말부터 정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크게 번성하였으나 사찰에 정사의 명호가 붙은 예는 드물고 선비집 사랑채의 당호를 칭하는 등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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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동래(東萊). 자(字)는 성숙(成淑). 절의(節義) 정응진(鄭應珍)의 후손이며, 정상학(鄭商學)의 아들이다. 정창모는 모친을 잃고 계모를 섬김에도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고, 부친이 발찌(목 뒤 머리털이 난 가장자리에 생기는 부스럼)를 앓을 때에는 농즙(濃汁)을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평소 가난하여 신을 삼아 팔고,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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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위령제 또는 기우제 형식으로 이어져왔다. 지금 현재 용당에서 이루어지는 용신제는 마을사람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놀이문화로 승화·발전되었다. 즉 지금의 용신제는 제의의 형식을 극복하면서 민속놀이로 전환된 형태로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용당리 마을에서 만난 용신제 상쇠를 맡고 있는 박홍기(44세)의 설명에 놀이로서의 용신제가 잘 담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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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태조 1)부터 1910년(순종 4)까지 경상남도 양산의 역사. 양산시는 1413년(태종 13)에 양산군(梁山郡)으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동래부(東萊府)에 편입되었다가 1603년(선조 36)에 복구되었다. 1897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읍내(邑內)·동면(東面)·상서(上西)·하서(下西)·상북(上北)·하북(下北)·구포(龜浦)·대저(大猪)의 8개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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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져서 여러 번의 재건축으로 모양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 정신은 그대로 이어져왔다. 이 읍성이 본격적으로 증축되었던 것은 조선시대 문종 원년(1451)과 성종 24년(1492)에 증축되기에 이르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읍성의 규모도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읍성은 석축이며 둘레가 3710척, 높이고 13척, 성 안에 우물 6개와 못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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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격전지 가운데 하나가 낙동강 변에 있는 양산 일대이다. 왜군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영남로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곳이 바로 이곳 양산 일대였다. 조선의 밀양부사 박진은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여 삼랑진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지역에는 작원(鵲院)이 있었는데 이곳은 낙동강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관문이었다. 물론 육지에서 낙동강을 따라 나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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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오늘날과 같은 교통로가 발달되지는 않았으나 교통로들 중에 사람들의 이동이 많고, 중요한 길들인 ‘대로’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7대로’가 있었는데 그 중에 영남에서 한양(서울)으로 가기 위한 여정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 바로 영남대로이다. 영남대로는 영남지방에서 가장 큰 길로 오늘날의 부산~양산~삼랑진~상주~문경~충주를 연결한다. 또한 영남대로는 단순히 교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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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주남리에 있는 조선시대 백자와 분청사기 도요지. 주남리 도요지는 천성산(千聖山) 동쪽 사기점(沙器店)마을 뒤쪽 산기슭에 위치한다. 사기점마을이란 이름은 사기를 구워서 파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마을 이름에서부터 이곳이 일찍부터 도자기를 구워 팔았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주남리 도요지는 현재 대부분 논과 밭으로 개간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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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건물 터. 징심헌은 객사의 서편에 있었다. 오랫동안 퇴락하여 방치되었던 것을 1680년(숙종 6)에 양산군수 조헌경(曺憲卿)이 중건하고 서헌을 지었으나 1687년에 객사와 함께 화재로 소실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양산군수 유정휘(柳挺輝)가 다시 영건(營建)했으나 1697년(숙종 23) 겨울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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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원진이 창포정의 모습을 보고 감회를 읊은 칠언절구의 한시. 창포정은 양산군수 이여익(李汝翊)[1591~?]이 관가의 창고 옆에 있는 연못 가에 건립한 것이라 전한다. 작자인 이원진(李元鎭)[1594~1665]은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동래부사로 재임할 때 「창포정 제영」을 지었다. 칠언절구의 한시이며, 1구와 2구에서는 반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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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안눌이 3년 만에 만난 승려를 천성산으로 돌려보내면서 지은 오언절구의 한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문집인 『동악집(東岳集)』에 「원적산으로 돌아가는 경일 상인을 보내며(贈別敬一上人還圓寂山)」라는 제목으로 전한다. 예부터 천성산(千聖山)은 원적산(圓寂山) 혹은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불리었다. 이안눌의 「천성산 제영」은 전체적으로 이별의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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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터. 상북면 소토리의 소노서원에 있는 정호인의 한시에 청계당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술이 좋고 관직 한가해서 보병과 비슷한데/작은 마루 적적하게 단지 네 칸이로다/구여릉의 백발은 무너지듯 취하였고/구루령의 단사는 도모할 필요가 없네/십리 바다 산이 일곱 점 떠오르고/한 당의 풍월은 둘이 맑아 풍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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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초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이후의 일반 무덤군. 초산리 민묘군은 초산리 초산못 남쪽 구릉에서 삼수리와 경계를 이루는 경작지와 그 북쪽 구릉이 이어진 곳에 위치한다. 구릉을 따라 조성된 1차선 도로의 바로 옆에 위치한다. 동쪽에는 경부고속도로가 나란히 지나가고 북쪽에는 안초산마을이 있다. 초산리 민묘군이 위치한 지역은 청동기시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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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한업(翰業). 아버지는 사과(司果) 최혁수(崔奕壽)이다. 최현업은 집이 가난하여 아내와 함께 농사일을 하였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이가 우물 속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곧바로 아이를 건져내고 아이의 목숨에는 관계가 없다고 거짓으로 말하여 부모를 안심시켰다. 다행히 얼마 후에 아이가 다시 살아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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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던 조선시대 누각 터. 경상남도 양산시에는 조선시대의 누각이 많이 있다. 이 가운데 춘설루에 대한 자료는 조선 후기에 양산군을 거쳐간 관리들의 시에서 그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영조와 정조 때의 무신이었던 권만과 양산군수였던 이만도가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에 이만도의 글 일부를 인용해 본다. “의춘에 무엇이 있더냐? 대나무 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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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의 양산읍성 내에 있던 정자 터. 춘화당은 원래 양산읍성 내에 있었다고 전하는 조선시대 정자이나, 현재는 터만 전하고 있다. 춘화당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이를 묘사하는 선현들의 시가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춘화당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시 몇 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거정 작) 말을 몰아 달린 병이 늙음과 함께 겹쳐서/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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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충과 효와 열을 행했던 사람들.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는 효충사의 효충계 서문에는 충효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릇 충효열(忠孝烈) 세 가지는 천성에서 나오는데, 사람의 도리 가운데 큰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성인을 내리시어 군주로 만들고 스승으로 삼아서 삼강오륜을 가르치고 집집마다 깨우쳐서, 왕궁과 도성에서부터 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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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김해김씨 재실. 콘크리트 목조형 건물로서, 기단을 높게 쌓아 사방에 난간을 두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겹처마이며, 내부에는 재청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방이 있다. 취산재 왼편에는 사당으로 들어가는 3칸 목조의 내삼문이 있고, 문에는 ‘통모문(統慕門)’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으며, 맞배지붕에 홑처마이고, 단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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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소노서원(小魯書院)에 있는 조선시대 목조 누각. 1994년 함안 조용하의 소노서원 「취송루기」에는 “양산 고을의 북쪽 십 리에 대림산(大林山)이 있는데, 송림이 은은하여 고인(高人)이나 일사(逸士)가 밭이랑 옆에서 살면서 천지가 바뀌어도 변치 않을 듯하고, 여기가 소산(蘇山) 선생의 탄생지요 구거지인 소토(蘇土)란 곳”이라고 실려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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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효종 1) 진희대사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창건한 암자. 통도사 내의 부속 암자들 중 하나이다. 보타암을 지나 200m 정도 되는 거리에 영축총림 율원과 붙어 있다. 통도사의 대웅전을 짓고 남은 재정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통도사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암자 중 하나이다. 1644년(인조 22) 우운당 진희대사가 통도사 본사의 대웅전을 중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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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자장율사의 진영을 모신 조선시대 사찰 건물. 통도사는 크게 상노전·중노전·하노전 등 세 부분으로 구분하는데, 개산조당은 중노전에 있으며, 용화전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통도사 개산조당은 1727년(영조 3)에 창건되어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1867년(고종 4)에 수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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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의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678년(숙종 4) 운흥사에서 제작된 불교 경전 목판. 통도사 권수정업왕생첩경목판(通度寺勸修淨業往生捷徑木板)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일괄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의 일부이다. 일반적으로 ‘권수정업왕생첩경목판(勸修淨業往生捷徑木板)’ 또는 ‘왕생첩경목판’이라고도 한다. 목판의 내용은 정업(淨業)을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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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안눌 등이 통도사의 모습과 주변 경관 등에 대하여 읊은 한시. 통도사는 절의 명성만큼이나 많은 시인 묵객을 불러들였으며, 이에 따라 통도사에 관한 많은 시가 남게 되었다. 시인들은 속세와 절연된 공간의 이미지를 나름의 창작력으로 살려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통도사의 맑은 이미지가 오롯이 드러나는 많은 작품이 곳곳에 남아 있다. 통도사에 관한 시를 남긴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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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 청동은입사향완. 통도사 청동은입사향완은 넓은 전이 달린 구연부, 밥그룻 모양의 몸체와 나팔 모양의 받침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향완의 형태를 띠고 있다. 구연부 전의 윗면에 연당초문이 은입사되었으며, 전의 아랫면에는 ‘강희십삼년갑인삼월일통도사은사향완중사십오근(康熙十三年甲寅三月日通度寺銀絲香垸 重四十伍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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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김이만이 양산향교 풍영루에서의 감흥과 학문에 정진하기를 청하며 읊은 오언율시의 한시. 풍영루는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향교의 정문으로 김이만(金履萬)[1683~1758]이 양산군수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1684년(숙종 10)에 낙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기존에 전해오던 것을 1878년(고종 15)에 양산군수 이민하(李玟河)가 중수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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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대리에 있는 조선시대 대(臺). 천은(川隱) 박기섭(朴基燮)이 여가 중에 대를 쌓았고, 선현들을 추모하여 풍호대(風呼臺)라 이름을 붙였다. 행양산군수(行梁山郡守) 동래진관(東萊鎭管)을 지낸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이능화(李能華)의 「풍호대서(風乎臺序)」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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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조선시대 지방 관립 교육 기관. 향교는 유교 문화 위에서 설립·운영된 교육 기관으로, 국가가 유교 문화 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이다. 교궁(校宮), 재궁(齋宮)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 향교는 지방에 설치된 관학으로 중등 과정의 교육 기관이다.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으나 그리 성행하지 못하였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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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 왜군이 쌓은 석축 성터. 호포 왜성지는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에 의하면 원래 호포원지(狐浦院址)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호포원은 호포의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530년경에는 역원 기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병화에 인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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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조선시대 찰방역은 찰방(종6품) 1명이 관장했고, 역리들이 역의 관리와 공무를 담당했다. 특히 중앙 직속 기관이었던 찰방은 역정(驛政)의 최고 책임자였으며, 세력 또한 막강해 양산 지역에 어사가 순찰을 돌 때 보필했을 뿐 아니라 군수(종4품)의 치정을 견제하는 역할까지 했다. 황산역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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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 있었던 조선 중기의 정자 터. 1632년에서 1638년까지 양산군수를 역임한 조신준(曺臣俊)이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동표(李東標)의 기문이 있었다고 한다. 희청헌은 관사 서쪽의 춘설루 뒤편에 있었다고 한다. 조정융(曺挺融), 조신준(曺臣俊), 권만(權萬), 오하철(吳夏哲), 이만도(李晩燾)가 쓴 제영(題詠)이 전하고 있다. 현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