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9년 교통시보사 대구분실에서 간행한 경상북도 고령군의 향토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 앉아 지역사의 서술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고령군에서는 향토 문화사에 대한 고증과 심층적인 역사서의 기초를 놓기 위해 『고령대관(高靈大觀)』을 편찬하게 되었다. 『고령대관』 서문에는 편찬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진보한 국민의 사이에서는 반드시 향토...
-
개항기 고령 출신의 유학자 이두훈이 지은 역사서. 이두훈(李斗勳)[1856~1918]은 본관이 성산이씨로 국포(菊圃) 이문룡(李文龍)의 9세손인 이인한(李寅漢)의 아들이다. 초명은 이중훈(李中勳), 자는 대형(大衡), 호는 홍와(弘窩)이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만년에 내산서당(乃山書堂)을 지어 교육에 힘썼다. 예학에 뛰어나 예설과 관계된 서간문을 많이...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던 고적 보존 단체. 고령고적보존회는 조선총독부가 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池山洞古墳群)을 발굴하여 출토된 유물을 보존한다는 명목 아래 만든 어용 단체이다. 고대 시기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부 지방 일대를 식민지로 지배하였다는 설을 입증하고 이를 선전하기 위하여 1938년 설립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고고학자와 관계 전문가를 동원하여 금...
-
일제강점기 고령 지역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1910년대 일제에 의해 추진된 토지 조사 사업은 식민지 지주제를 구축하였다. 1920년대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시행하면서 식민지 지주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식민지 농업 정책의 결과 지주의 토지는 증가하였으나, 자작농이 대거 몰락하여 자소작농 또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 초반까지의 세계 대공황은...
-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던 공산주의자 조직. 고령군 인민위원회는 6·25전쟁 중 고령을 점령한 북한 공산군이 점령지를 공산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점령 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설립되었다. 6·25전쟁 당시 고령군의 경우, 북한 공산군이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약 2달 간 머물러 있으면서 공산군 사단 본부가 있는 저전동[낫질]에 고령군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
1931년 12월 고령 지역의 소작인들이 부당한 지세 납부에 저항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 1910년대 일제에 의해 추진된 토지 조사 사업은 식민지 지주제를 구축하였다. 1920년대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시행하면서 식민지 지주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식민지 농업 정책의 결과 지주의 토지는 증가하였으나, 자작농의 대거 몰락하여 자소작농 또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1920년대...
-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던 상공업자 친목 단체. 고령 지역에서 전통적인 상인 단체인 고령상무사 좌사계와 고령상무사 우사상계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산되자 지역 상공업자들은 상공업 발전을 위한 협의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1930년대 경제 공황으로 인해 지방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상공업 발전을 꾀하기 위한 노력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에 지역 상공업자들이 고령상무...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던 소비조합. 소비조합의 목적은 경제적 약자로서의 소비자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자는 데에 있다. 소비자는 소비조합을 기반으로 하여 생활의 안정 및 향상, 문화와 교육의 충실을 도모한다. 구체적으로는 조합원의 생활필수품을 매입, 가공, 배급하고, 생활을 위한 공동 시설을 이용하며, 생활 개선 교육, 문화 향상 사업 등을 운영한다. 고령소비조합은 고령...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결성을 추진하였던 농민 단체. 1931년 고령군에서는 식민지 지주제 아래에서 소작료 인하, 소작인의 지세 부담 거부, 말세 거부 등 소작인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운동이 폭발적으로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령군의 소작인들은 일제의 방해로 소작인 조합을 결성하지 못한 채 소작인 대회를 통해 자신들의 결의를 밝히는 동시에 지세 불납 동맹을 결성하는 방식...
-
조선시대 고령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고려시대까지 고령군에는 상설 지방관이 파견되어 있지 않았다. 940년(태조 23) 고령 지역에는 두 가지의 행정적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읍격(邑格)이 신라 경덕왕의 개명 이래 고령군으로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경산부의 속군으로 편제되어 위상이 하락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에 읍치를 두고 우곡...
-
1937년 성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국위 선양 및 황군무운장구(皇軍武運長久) 기원제 거부 사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의 승리를 이끌기 위해 식민지 대중을 동원하는 관제 행사를 추진하였다.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소재 성산공립보통학교에서는 1937년 10월 17일 전국적으로 일제히 거행하는 국위 선양 및 황군무운장구 기원제를 추계 운동회를 통해 개최하였다. 이는 추...
-
구한말에서 해방 이전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근대교육은 근대 국가의 성립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교육으로 주로 계몽사조를 기초로 나타난 계몽주의 교육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근대교육은 한국의 근대를 어떻게 시기 구분하느냐에 따라 다소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본격적인 개항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1945년 해방까...
-
1919년 3월 29일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원송리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3·1운동은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에서 발생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하는 원칙으로 미국 윌슨 대통...
-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민족 독립을 위해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운동가들. 독립운동가들은 개항기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거나 일제강점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이다. 독립운동의 범위는 한일 병합을 기점으로 앞선 시기에는 크게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으로 설정할 수 있고, 이후 시기에는 국내외 무장 투쟁, 3·1운동, 노동·농민·학생 운동 등 대중 운동...
-
조선 후기 고령 지역에 성리학적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시행된 향촌 자치 제도. 16세기 이후부터 사림 세력은 훈척 세력의 향촌 지배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수단을 찾았다. 이는 향촌에 성리학적 윤리를 보급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학(小學)』 교육을 하고 더불어 향약을 실행하였다. 고령의 향약 주도 세력은 향약에 참가한 사람들의 명부인 향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고령향교에 소장된...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던 유교 단체. 모성계는 애국계몽 운동기에 고령의 대표적인 계몽 운동가 이봉조(李鳳朝)[1861~1937]의 주도로 민족 자존과 전통을 수호하고, 유교적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모성계는 고령향교(高靈鄕校)의 문묘(文廟)를 중수하여 유교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일제의 한국 침략을 계기로 고령 지역에서는 신교육의 보급을 통...
-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박순천(朴順天)[1898~1983]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본명은 박명련(朴命連)이다. 한학자인 박재형의 무남독녀로,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7년 동래의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마산의 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교육 활동과 정치 활동을...
-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으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감당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강력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후금은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 명...
-
조선시대 고령 지역의 관아에서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하던 군사 통신 시설. 봉수는 조선시대 변경의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통신 수단이다. 봉수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그 내용이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활용되다가 조선 전기 전국의 봉수 제도가 정비되면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
1919년 3월 말~4월 초 고령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 3·1운동은 서울에서부터 시작되어 5월 중순까지 비폭력·일원화·대중화 등을 원칙으로 하여 전국에서 발생하였고, 한국인이 거주하는 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발생하였다. 대도시에서 농촌에 이르기까지 청년·학생과 지식인, 농민과 노동자, 여성 등 전 민족적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의 역량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
-
1946년 10월 경상북도 고령군민이 참가한 시위사건. 10·1항쟁은 10·1사건, 10월 폭동사건, 10·1폭동, 영남폭동, 10·1소요, 46년 가을 폭동, 10월 폭동, 추수 폭동, 10월 항쟁, 10월 인민항쟁 따위에서 나타나듯 다양하게 불리고 있는 만큼 역사적 평가의 편차도 매우 크다. 8·15광복 직후 경상북도의 사회 경제적인 상황이 10·1항쟁을 발생시켰다. 미군정의...
-
1919년 3월 하순 경상북도 고령군 쌍동면[현 고령군 쌍림면]에서 계획한 만세 시위. 3·1운동은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에서 발생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하는 원칙으로 미국...
-
개항기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교육을 통해 국권을 수호하고 근대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 개항기 고령 지역에서는 관과 유림을 중심으로 교육기관 설립 등 각종 교육 및 문화 사업이 펼쳐져 실력 양성론에 입각한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 등의 단체 설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06년 군수 윤하영...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사회 교육.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일제는 기존의 교육 제도를 공립화 하는 데 매진했고, 이로 인해 서당 등 향촌 자치적인 교육기관이 모두 철폐되면서 배우고자 하는 학생 수에 비해 학교 수가 턱없이 부족해졌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국 각 지역의 청년회가 야학 또는 강습소를 설치·운영하면서 이러한...
-
조선시대 고령 지역에 있던 역과 원. 역원(驛院)에서의 역(驛)은 군사적 의미가 매우 크고 관에서 설치·운영하여 교통을 지원하는 행정 기관의 역할을 한 반면, 원(院)은 민간 여행객들을 위한 시설로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역은 대로변에 12㎞마다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 두었다. 중앙과 지방간에 공문 전달, 관리의 사행 및 운수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
1919년 4월 초순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3·1운동은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에서 발생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하는 원칙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걸...
-
1950~1953년 경상북도 고령군을 비롯한 한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공격에 의해 1953년 7월 27일 휴전 성립까지 3년 1개월 동안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물적 기반이 파괴된 전쟁이다. 전쟁은 민족 간 전쟁의 성격으로 진행되었으나, 이후 유엔 연합군과 중국군이 참전하였다는 점에서 국제전으로서의 성격도 띤...
-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고령 지역의 역사. 개항 이래 조선은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외세의 침탈을 막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가시화되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한반도는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갔다.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만국...
-
1939년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고령향교 옆에 세운 비석. 1939년 4월 29일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는 고령향교 옆에 ‘임나대가야국성지(任那大伽倻國城址)’라는 이름으로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관음사(觀音寺) 북편 언덕 에는 ‘임나일본부지(任那日本府址)’라는 팻말을 박았다. 이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정확하지 않...
-
1392년부터 1910년까지 고령 지역의 역사. 조선시대는 1392년 조선 건국에서 1910년 한일합방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의 역사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지방 제도와 고령, 고령의 향촌 자치, 고령의 경제와 산업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던 조선의 지방 행정 제도는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전국을 8도로 나누는 등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졌...
-
1951년 8월 18일 빨치산이 경상북도 고령군 읍내를 공격한 사건. 6·25전쟁 중 고령군은 1950년 6월 전쟁 발발 이후 8월부터 9월까지 약 두 달간 북한 공산군의 점령 아래 있었다. 이후 유엔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한 공산군은 고령군에서 후퇴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중 북한으로 후퇴하지 못한 공산군과 전쟁 이전부터 빨치산 활동을 벌이던 무장 세력은 모두 빨치산이 되...
-
1945년 8월 15일 이후 경상북도 고령 지역의 역사. 현대라 함은 역사학의 시대 구분 가운데 사상(思想)이나 그 밖의 것이 현재와 같다고 생각되는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동양사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서양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현대라고 말한다. 고령군은 옛 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던 비밀 독립 결사대.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물적·인적 자원의 동원이 강압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일제의 민족 말살을 통한 민족 동화 정책이 조선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 신사 참배 등으로 구체화되자 이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이 일어났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경상북도 고령의 곽태진(郭泰珍)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전쟁이 확산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