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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간행된 충청남도 공주의 사찬 읍지. 『공산지(公山誌)』는 영조 대의 구읍지를 바탕으로 관찰사, 판관 등의 협조를 받아 공주 지역의 유력 향반이 보완하여 제작하였다. 편찬 작업에는 임정회(林挺會)·이익형(李翼亨)·오흠(吳欽)·노기웅(盧基雄) 등이 참여하였다. 『공산지』의 사본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후대의 필사본 산질(散秩)인 『공산지』와 발췌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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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의 이문에서 정월 14일에 부녀자들 중심으로 올리는 민간의례. 경천리 이문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마다 마을의 안녕과 태평을 위하여 이문(里門)에서 지내는 제의이다. 이문은 마을입구에 만든 출입문이다. 경천리 이문제는 마을의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행한다. 제관은 보통 부녀회장이 맡는데,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벌이기도 한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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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 학자 서기의 묘갈. 고청 서기 묘갈은 서기의 무덤 앞에 세운 작은 돌비석이다. 서기(徐起)[1523~1591]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자는 대가(大可), 호는 고청(孤靑)·귀당(龜堂)이다. 서경덕(徐敬德)·이중호(李仲虎)·이지함(李之函)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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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일을 시조로 하는 충청남도 공주의 세거 성씨. 시조 이천일은 기원전 53년(신라 박혁거세왕 5) 중국 한나라로 가서 뛰어난 문명으로 대장군에 올라 흉노적을 정벌한 공훈으로 요동백에 봉해졌다. 환국 후 공산군에 봉해진 이천일은 그때부터 공산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조선 전기 지리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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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주목에서 강상죄인(綱常罪人)이나 배역자(背逆者)가 생겼을 때 강등하여 부르던 이름. 『인조실록』권 47, 인조 24년(1646) 5월 1일 기사에 처음으로 공산현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공청도(公淸道) 공주목을 강등하여 공산현으로 삼고, 이산(尼山)·연산(連山)·은진(恩津)을 혁파하여 1개현으로 합하여 은산현(恩山縣)이라고 하고, 공청도를 홍청도(洪淸道)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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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에 있는 노응환·노응탁·노응호 3형제의 생가 터. 노응환(盧應皖)[1555~1592], 노응탁(盧應晫)[1560~1592], 노응호(盧應皓)[1574~1592] 등은 본관이 만경이다. 이들은 노세득(盧世得)[1526~1589]의 아들로서 일찍이 공주목사였던 중봉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공부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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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역이 6곳이니 일신·광정·경천·이인·단평·유구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 북쪽 45리에 있다. 설장수의 시에 ‘아침 해 둥그렇게 뜨자 광정역을 떠나니, 흰 구름이 깊숙이 일만 산 푸른 것을 깊이 감추었네. 들꽃 난만히 주인 없이 피어서 봄빛을 단장하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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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인간 및 재화 또는 정보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공간적 이동. 교통이란 인간 및 재화 또는 정보의 공간적 이동을 의미한다. 교통 기관의 발달은 생활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경제 생활 및 사회 문화를 발달시키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교통은 그 중 인간과 재화의 공간적 이동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통 수단은 일반적으로 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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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충신. 본관은 만경(萬頃). 자는 문백(文伯), 호는 관류당(觀流堂)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노응환(盧應晥)[1555~1592]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노숙(盧璛)[1587~1655]은 1624년(인조 2)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亂)을 피하여 공산성 쌍수정에 파천하여 있을 때, 군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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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의병. 본관은 만경(萬頃). 자는 계회(季晦), 호는 국재(菊齋)이다. 공주의 만경노씨 입향조(入鄕祖) 노혁의 5대손으로,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노세득(盧世得)[1526~1589]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삼의사(三義士) 중 한 명인 노응탁(盧應晫)[1555~1592]은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진사과(進士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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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의병. 본관은 만경(萬頃). 자는 시회(時晦), 호는 체헌(棣軒)이다. 공주의 만경노씨 입향조(入鄕祖) 노혁의 5대손으로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노세득(盧世得)[1526~1589]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삼의사(三義士) 중 한 명인 노응호(盧應皓)[1574~1592]는 임진왜란 때에 조헌(趙憲)이 일으킨 의병을 따라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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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의병. 본관은 만경(萬頃). 자는 명원(明遠), 호는 수암(守庵)이다. 공주의 만경노씨 입향조(入鄕祖) 노혁의 5대손으로,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노세득(盧世得)[1526~1589]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삼의사(三義士) 중 한 명인 노응환(盧應皖)[1555~1592]은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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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단평역은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에 존재하였던 조선시대 중요한 역참이다. 역참은 주요 도로 30리마다 존재하였으며, 단평역은 공주의 다른 역참인 이인역·경천역·광정역·유구역과 함께 중요한 도로 교통망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역은 여섯 곳이니 일신·광정·경천·이인·단평·유구이다.”라고 기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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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사람이나 차가 다니는 비교적 넓고 큰 길. 공주시 지역은 과거 수로 교통이 발달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철도 교통과 도로 교통이 급격히 발달하였다. 1933년 건설된 금강교는 공주가 철도 교통 대신 도로 교통의 중심으로 다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공주시의 도로 포장률은 국도 100%, 지방도 78.7%, 시·군도 57.7%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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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도천리에서 동짓달 초사흗날과 이듬 해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지내는 마을 제사. 공주시 우성면 도천리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에 정해진 단위이다. 1923년 간행된 『공산지(公山誌)』 천(天)에 의하면, 우정면(牛井面)의 약천리(藥川里), 도산리(道山里), 해포리(蟹浦里), 중윤리(中尹里), 경사동(京士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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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옛사람들이 남겨놓은 유·무형의 자산. 공주 지역은 60여 년간 백제의 왕도로서 역사상 특별히 부각되고 있고, 공주 공산성이나 무령왕릉 같은 유적들이 그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주의 역사는 비단 백제시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백제의 왕도였다는 사실에 비해 더 길고 오랜, 그리고 복잡한 역사의 흔적들이 공주 지역에 남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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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불과 연기를 이용한 조선시대의 통신 수단. 봉수제도는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하였다. 봉수대는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횃불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횃불 3개, 국경을 침범하면 횃불 4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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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봉정동 반선말 반선봉에서 매년 음력 정초에 지내는 산신제. 마을 이름이 ‘반선말’, ‘반선리(伴仙里)’이다. 앞에서 보듯이 18세기 후반에는 ‘반선동’이었다. 건넌말의 남동쪽으로 반선봉의 아래이다. 마을 뒤에 있는 산이 신선이 바둑을 두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반선봉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산제 기일이 다가오면 생기복덕과 일진을 따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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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있는 선현이나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곳. 사당은 제사를 드리는 의례 공간으로 가족 차원에서는 가묘(家廟), 국가 차원에서는 종묘(宗廟)라고도 한다. 또한 서원이나 향교를 비롯한 학문 공동체나 지역 사회에서도 제사를 드리는 의례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전래된 주자학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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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공주 지역의 정치와 사상의 흐름을 주도한 양반 지식인 세력. 공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호서 지방의 중앙에 위치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비중이 더욱 심원하다. 공주 지역은 오랜 역사를 지낸 고도일 뿐만 아니라 고려 말 조선 초 이후로는 유서 깊은 유향으로서 청주, 충주 등과 더불어 호서 사림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계룡산과 금강을 배경으로 천험의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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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월송동 아랫사송정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현재 공주 사람들은 사송정을 공산이씨(公山李氏)와 연관된 정자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송정이 위치한 아랫사송정에 충절사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 기록인 『희암선생집(希菴先生集)』을 보면 사송정은 여주이씨 이상의(李尙毅)[1560~1624]에 의하여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871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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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에서 정월 대보름날 농기에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민속 의례.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는 1923년 간행된 『공산지(公山誌)』천(天)에 의하면, 장척면(長尺面)의 효제동(孝悌洞), 송학리(松鶴里), 소학리(巢鶴里), 학림동(鶴林洞), 산학리(山鶴里), 행정리(杏亭里), 중산리(中山里), 우산리(牛山里) 각 일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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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동일한 인물을 시조로 하는 성들. 우리나라에서 성씨가 발생한 것은 단군시대부터라고 하며, 중국 제도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고조선 때에 왕족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귀족 관료층을 중심으로 성씨가 일반화되고 고려시대에 본관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 본관제의 의미는 퇴색된 채 동일한 성은 본관이 다르더라도 거성(巨姓)의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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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세동리 상세동에서 과거 대한제국 왕실에 대한 상축과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지내는 마을 제사. 유구읍의 세동리는 상세동·중세동·하세동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세동리의 자연마을에서는 각각 산신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상세동의 산신제만이 유지되고 있으며, 일반 마을 산신제와 같은 수준에서 소략하게 올려진다. 세동리 산신제는 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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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목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우물. 조선 중기 때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을 갔을 때, 소가 기갈이 심하자 물을 먹이고 간 후로 유명해졌으며, 면 이름도 우정면이라 하여 7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에 우성면이 되었다. 『공산지(公山誌)』제2권 36장에 “仁祖大王……馬極駕牛間關過木洞村直一路邊之井駐蹕飮牛 命名曰牛井牛井之(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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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학리 몸티에서 정월 초 농기에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민속 의례.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학리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에 의랑면(儀朗面)의 평촌리(坪村里), 송정리(松亭里), 양촌리(陽村里), 유산리(柳山里), 풍천리(豊川里), 학산동(鶴山洞), 구암리(九巖里), 미동(美洞), 백하동(栢下洞), 은곡리(隱谷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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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신관동 한적골에서 정월 대보름날 농기에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민속 의례. 충청남도 공주시 신관동 지명의 사용은 1983년부터이고, 그 이전은 장기면(長岐面) 19구(區) 가운데 하나로 신관리(新官里)였다. 신관리는 동부면(東部面)의 매산리(梅山里), 일신동(日新洞), 관동(官洞), 금송동(錦松洞), 기산리(箕山里), 이산리(李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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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인풍리 쌍령산 정상에 있는 조선 전기의 봉수대. 쌍령산 봉수대는 조선 전기에 설치되었으며, 공주시 정안면 인풍리와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무학리에 걸쳐 있는 쌍령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남쪽 공주의 고등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천안의 대학산 봉수로 전달하던 곳이다. 공주에서 천안 방향으로 22.5㎞ 정도 가다 보면 차령고개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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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연종리 연마루에서 음력 시월 초이틀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지내는 마을 제사.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연종리는 원래 사곡면에 포함된 17구의 하나였다가 1973년에 유구읍으로 편입되었다. 연마루에서 산신제를 모시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집안의 발전을 기원하고, 산신이 기도를 들어주어 무병장수하며, 산신제를 모시는 것으로 부자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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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 살던 효부. 본관은 창녕(昌寧). 아버지는 참봉 성언홍(成彦弘), 남편은 오몽렬(吳夢烈)이다. 슬하에 아들 오복립(吳復立)을 두었다. 병든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셔 효부라고 칭송되었으며 특히 호랑이에게 물려 간 시아버지를 구출해 낸 일화는 『충효등록(忠孝謄錄)』을 비롯하여 『공산지(公山誌)』, 『호서읍지(湖西邑誌)』, 『금고실기(今古實記)』, 『조선환여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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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에 있는 집성촌. 1920년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우성면의 반촌리·동곡리·목동리·귀산리·내산리에서는 만경노씨, 상서리·방문리에서는 함평오씨, 방흥리·신웅리에서는 보성오씨, 옥성리·대성리·봉현리에서는 김해김씨, 보흥리·옥성리에서는 단양이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1. 만경노씨 『만경노씨족보』에 의하면 만경노씨의 시조는 고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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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칠원(漆原). 아버지는 윤수(尹脩)이며, 어머니는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숙부 윤건(尹建)에게 양자로 입계하였다. 부인은 동래정씨(東萊鄭氏)로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역임한 정유순(鄭惟醇)의 딸이다. 칠원윤씨는 본래 정산(定山)[현 충청남도 청양군의 옛 지명]에서 대대로 세거하고 있었다. 그 후 정확한 사연이나 시기는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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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이곡리 백실에서 탑에 제를 올리어 금강의 수해를 막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지냈던 마을 제사. 이곡리는 1983년에 이인면에 편입되었다. 이곡리의 원래 순수 우리말 이름은 배실이다. 1914년 일본의 행정 구역 개편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배실이 이곡리(梨谷里)로 번안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주 지역은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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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효자. 본관 전주(全州). 덕천군(德泉君)의 13대손이며, 아버지는 이면달(李勉達)[1793~1877]이며, 어머니는 보성오씨(寶城吳氏)로 오종헌(吳宗憲)의 딸이다. 공주 지역의 전주이씨들은 덕천군의 후손들로 덕천군의 손자인 상산군(商山君)의 장남 이요년(李堯年)의 아들인 진주목사 이몽경(李夢慶)[1538~1624]부터였다. 원래 이들은 양주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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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로 유배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옹(中雍), 호는 한재(寒齋). 조선의 개국공신 이백유(李伯由)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 이윤생(李閏生)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아들은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이세장(李世璋)이다. 이목은 1489년(성종 20)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의 재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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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조선의 개국공신 이백유(李伯由)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이윤생(李閏生)이며, 아버지는 영안도병마평사(永安道兵馬評事)를 역임한 이목(李穆)이다. 이세장은 1516년(중종 11)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검열(檢閱), 대교(待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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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에 있는 집성촌. 전주이씨는 인물조뿐 아니라 문무관 등 다른 어느 가문보다 돋보인다. 이인 지역에도 전주이씨 등 여러 성씨가 세가하고 있지만 기록이나 내역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확인하기 힘들다. 우선 입향 시기로 보면 만수리, 오룡리, 신흥리의 선산김씨, 초봉리와 신영리의 안동김씨, 이곡리 경주이씨들이 1600년대 이인 지역으로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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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충청남도 공주에 은거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이존오는 1360년(공민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수원(水原)에 있던 경기관찰도(京畿觀察道)의 서기(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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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정숙(靜叔), 호는 눌재(訥齋)이다. 아버지는 이덕사(李德泗)이고, 우암 송시열이 매부이다. 1642년(인조 20) 진사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검열을 거쳐 이듬해 대교가 되었고, 1646년 설서·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 공산현감·수찬을 지냈고 낙당(洛黨) 김자점(金自點)의 일파로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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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남도 공주시 신관동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역참은 중앙 관아의 공문을 지방 관아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 공무 여행자에게 말을 제공하고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주요 도로에 대개 30리마다 두었다. 여러 개의 역을 하나로 편성하여 찰방(察訪) 또는 역승(驛丞)이 이를 관장하는 동시에 교통로 상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보고하기도 하였다. 기록에 나타나는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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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에 있었던 집성촌. 부안임씨가 연기와 공주 일원에 뿌리를 내린 시기는 고려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후기에 공조전서로 봉직하던 임난수가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맞이하여 신하 된 도리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한 곳이다. 당시 임난수는 제천리의 이웃 마을인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 터를 잡았고 이후 현재까지 양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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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세거 성씨. 정안면 석송리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전주이씨라고 한다. 처음 마을에 입향한 사람은 무림군의 후손인 이영춘(李營春)으로, 평안도 벽동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정확한 입향 사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영춘의 묘는 의당면 중흥리에 있으며, 다른 후손들도 대부분 공주 지역에 묘가 있다. 정안면 석송리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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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공주목제독을 지낸 문신이자 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아버지는 조응지(趙應祉)이다.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65년(명종 20)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67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관직에 올라 정주목, 파주목, 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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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공주시의 대통교양 쪽 장소에서 열렸던 정초의 민간 제의(祭儀). 중학동 장군제는 대통교를 기준으로 이남과 이북에서 정초의 행사 가운데 하나로 열렸다. 마을 사람들의 친목을 다지고 한해를 준비하는 마을 신앙의 한 형태였다. 가을에 열렸던 중동 별신굿과 함께 공주 지역의 양대 행사였다. 정초의 행사는 예축(豫祝) 제의, 가을에는 감사(感謝) 제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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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의 통일신라시대 지방행정구역. 통일신라시대 경덕왕은 신라 중대에 귀족 세력의 부상으로 전제 왕권이 흔들리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 개혁을 시도하여 신라 문화의 절정기를 이끈 인물이다. 이 시기 왕권 강화책의 하나로 전국의 지명에 대한 대대적인 개명 작업이 이루어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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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시행되었던 향촌 자치 규약. 초려 이유태[1607~1684]가 향촌민의 통제를 위해 향약을 조직하고, 그 규약을 기술하였다. 규약은 오가통(五家統), 향촌 경제의 안정을 위한 사창법(社倉法), 관학 교육으로서 학교 제도 등을 동시에 포괄하는 종합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17세기의 조선 사회는 16세기 후반 이래 사회 변동이 계속되고 임진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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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에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설치된 충청도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관청. 충청감영은 공주 지역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1603년(선조 36)에 공주 지역에 설치되어, 1932년 대전 지역으로 충청남도 도청이 이전될 때까지 있었다. 현존하는 많은 조선 후기의 문서들은 조선시대 충청감영으로의 공주 지역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유적에 대한 훼손 탓에 본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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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탑곡리에서 음력 정월 보름날 지내던 마을 제사. 탑곡리 마을제가 언제부터 어떻게 지내게 되었는지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탑곡리 마을제는 정월 보름날 저녁에 지낸다. 제관과 축관의 선정은 며칠을 앞두고 뽑는다. 소요 경비는 동네기금의 일부에서 충당한다. 제수 물품은 삼색실과, 흰무리(쌀 닷 되 분량), 포, 술, 돼지머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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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마암리 금강 변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세운 공주판관 조병로의 불망비. 공주에서 왼쪽으로 금강을 끼고 대전 방향으로 국도 32호선을 따라 8㎞ 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청벽 어씨네 장어구이집이 보이는데, 70m 정도 덜 간 왼쪽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긴 장방형 비신 위에 맞배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씌운 형태의 비석이다. 전체 높이는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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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평기리 벌터에서 음력 정월 보름에 기(旗)를 올리고 지내던 마을 제사. 신체는 마을의 기(旗)이다. 윗말 농기의 명문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고, 아랫말의 명문은 ‘신농유업(神農遺業)’이다. 평기리 벌터 기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지낸다. 본래 윗말(평장골·강변말·상정말)과 아랫말(중뜸·동산·산소골)이 따로 모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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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 딩풍말에서 지내는 두레 관련 마을 제사. 하봉리(下鳳里)는 글자 그대로 봉황새가 내려앉는 곳이라 한다. 혹은 하봉을 열두갬실이라 했는데, 여기서 갬실이란 개미의 실, 즉 개미알집을 가리킨다고 한다. 봉곡(鳳谷)이나 황골로 불리는 마을 이름도 모두 봉황새와 관련이 있다. 신체는 ‘신농사명(神農司命)’이라 쓰여진 기(旗)이다. 하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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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 별신당에서 정월 초와 두레 먹는 날 농기를 올리고 지내는 마을 제사.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 ‘열두갬실’ 중 5개 마을에서 기고사를 지낸다. 열두갬실 가운데 비교적 큰 마을에 속하는 황골·하산·동편말·한미터굴·별신당이 이에 해당한다. 별신당의 기고사는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지내는 마을제로, 하봉리 5개 마을에서 지내는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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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 황골에서 지내는 두레 관련 마을 제사. 하봉리(下鳳里)는 글자 그대로 봉황새가 내려앉는 곳이라 한다. 혹은 하봉을 열두갬실이라 했는데, 여기서 갬실이란 개미의 실, 즉 개미알집을 가리킨다고 한다. 봉곡(鳳谷)이나 황골로 불리는 마을 이름도 모두 봉황새와 관련이 있다. 신체는 ‘신농사명(神農司命)’이라 쓰여진 기(旗)이다. 기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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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 황골에서 음력 정월 초에 샘터에서 지내는 마을 제사. 하봉리 황골 샘제는 마을에 있는 샘[井神]이 신체이다. 하봉리 황골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샘제를 지낸다. 제일을 앞두고 우선 샘을 품어내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다. 샘 주위에는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피운다. 금줄은 성(姓)이 다른 몇 집의 짚을 가져다가 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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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이래 현대까지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지방 행정 체제. 현재의 공주시는 충청남도 2시 15군의 하나로, 1읍 10면 6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95년에 도농 복합 형태의 시가 설치되면서 종전의 공주시와 공주군이 통합되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64년간 백제의 왕도에 해당하였고, 고려시대부터 계수관 고을로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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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입구에 있는 거석 기념물.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는 계룡면 16구(區)의 하나였다. 마을 입구 둥구나무와 논 건너 또 다른 둥그나무에 각각 돌장승, 즉 선돌로 서 있다. 선돌의 높이는 150㎝, 너비 85㎝, 두께 40㎝의 자연석이다. 수령이 150년 정도인 나무와 곁에 위치해 있다. 마을의 신앙 대상으로 모셔진 증언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