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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향현사의 건립 내력과 연원을 적은 비석. 강릉명륜서원은 향현사를 말한다. 향현사는 조선조 강릉 지방 출신 12명의 인물을 향현으로 추배한 사우이다. 강릉명륜서원묘정비(江陵明倫書院廟庭碑)에는 향현사 연혁 등이 기술되어 있다. 향현사는 고종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다시 옛터에 중건하였다. 중건하면서 명륜서원이라 불렀고 묘정비도 세웠다. 이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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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는 고려 초기 승려 개청(開淸)의 탑비(塔碑). 비의 원명은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이다. 개청은 930년 9월 24일에 96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입적한 지 5일 뒤인 28일에 보현사에서 300보쯤 떨어진 서봉(西峰) 석실(石室)에 장사를 지냈다. 신경(神鏡)·총정(聰靜) 등의 제자와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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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도에 강릉 향교 내에 세운 묘정비(廟庭碑). ‘공부자 묘정비(孔夫子廟庭碑)’라고 되어 있는데 사성(師聖)인 공자를 찬양하는 글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강릉시 명륜로 29[교2동 233번지] 강릉 향교 내 명륜당 전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받침돌 위에 높이158㎝, 두께 32㎝, 너비 63.8㎝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제는 예서체로 ‘공부자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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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향교 주변에 세워진 사적비의 총칭. 향교는 지역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면서 사족들의 전유기구로서 상징성을 갖는다. 이런 성격으로 말미암아 향교 주변에는 기적비, 사적비, 공적비 등 많은 기념비들이 건립되었고, 이들은 지역의 학문과 사족의 발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강릉 지역의 유림 및 목민관의 활동을 기념하는 각종 비들을 총칭하는 의미에서 강릉 향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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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임당동에서 발견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龜趺). 1965년 강릉시 임당동 139번지 도로확장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제작 시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비몸자리(碑座)가 중앙에 뚜렷하게 있는 귀부이다. 귀부는 높이 42㎝, 너비 82㎝, 두께는 109㎝의 크기로 지대석(地臺石)과 같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공(碑孔)은 가로 45.5㎝, 세로 23.5㎝,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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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김씨 부정공파(副正公派)의 시조인 김경생(金慶生)의 비. 김경생은 1326년(고려 충숙왕 13)에 출생하여 조선조에 종3품 중직대부(中直大夫)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냈고, 부인은 숙인(淑人) 강릉최씨로 판서 육성군 최안호(崔安灝)의 딸이다. 둘째 부인은 숙인(淑人) 삼척심씨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을 지낸 삼척심씨 시조 심동로(沈東老)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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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릉부사를 포함한 19기의 선정비. 역대 강릉부사 및 관찰사의 선정송덕비(善政頌德碑)로 19기이다. 이중에는 진사최공재린유혜불망비(進士崔公在璘遺惠不忘碑)와 충노문리동행적비(忠奴文里同行蹟碑)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이한 사항이다. 역대 강릉부사와 관찰사들의 선정(善政)을 찬양한 송덕비인 관계로 선정비군(善政碑群)이라 하였다. 지방 관리가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떠난 다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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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선행을 펼쳐 마을을 구한 산계리 선각자들의 사적을 기록한 사적비. 1780년을 전후하여 산계리에는 기존의 전세(田稅)에 산삼 공납이 추가되었고 설상가상 심한 흉작으로 지역민이 마을을 떠나는 유리(流離) 현상이 심하게 되자, 고진창(高鎭昌), 우광택(禹光澤), 전삼박(全三泊) 등 14명이 상계(上啓)하여 관가로부터 경공(京貢)의 산삼을 감량 받았다. 그리고 어려움을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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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강릉 공군기지의 전적과 전공을 기념하여 세운 전적비(戰績碑). 바다와 육지가 맞닿은 강릉에 있는 공군기지는 대한민국 공군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곳이다. 그것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 공군이 처음으로 단독 출격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공군기지이기 때문이다. 강릉 공군기지에서 활약한 인물로 김영환[1921~1954], 유치곤[1927~1965] 장군 등이 있다.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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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강릉지구 전투에 참전한 18포병 대대와 삼용사의 전공을 기리는 전쟁기념비.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사천초등학교 일대는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월 26일 38선 인근에 강릉 8사단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6월 27일에는 현남까지 밀려 내려왔다. 강릉 8사단 제18대대는 105밀리 포 5문을 사천면 노동하리 지역에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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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 강릉 사람인 효자 김덕장(金德璋)의 효행을 적은 효자비. 이 비석은 조선 중종 때 강릉 사람 김덕장(金德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세웠다. 김덕장은 어릴 적부터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살던 중, 하루는 산불이 나서 묘소에까지 이르자 통곡하며 하늘에 비니 돌연 비바람이 일어나 산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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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장(金德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 현재의 비와 정려각은 1978년 종중(宗中)과 강원도지사 박종성(朴鍾星)이 보내온 문화기금으로 건립되었다. 강릉시 동부시장1길 7[옥천동 332-2번지]에 있다. 전체 높이 187.2㎝, 비신 너비 51㎝, 비신 두께 21㎝ 비석으로 비좌, 비신 그리고 비두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의 비명은 '증가선대부호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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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교리 곽거완(郭居完)을 모신 경덕사(景德祠) 사적을 적은 비 강릉시 사천면 노동상리에 있는 경덕사는 곽거완의 후손들이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2년에 신축되었다. 사우 신축과 더불어 지역 사림들에 의해 위패가 봉안됨에 따라 매년 음력 2월 23일에 다례(茶禮)를 거행한다. 곽거완(郭居完)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강릉 출신이다. 1399년(정종 1)에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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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지변동에 있는 최문한 관련 유적인 용지와 관련된 내용을 적은 비. 최문한은 고려조 인물로 부마(駙馬)였으며, 강릉최씨 문한계 시조이다. 고려부마도위문한공의 유적비에는 최문한이 아끼던 말이 하루는 연못에 뛰어들어 용으로 변해 승천했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1920년 후손 최종하(崔宗河) 등이 용지와 용지각을 정비하면서 시조 최문한과 관련된 읍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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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소설가 허균(許筠)의 「누실명(陋室銘)」을 써놓은 시비. 1569년(선조 2) 강릉시 사천면 교산 애일당(愛日堂)에서 태어난 허균의 문학사상을 기리기 위해 1983년 8월에 세운 시비이다. 교산 시비는 이곳을 가로질러 애일당을 감싸 안고 바다로 향하는 교산의 이름을 따서 아호를 삼은 허균과 관련된 시비를 세운 것에서 유래되었다. 1983년 8월 전국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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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사균(權士均)의 가계, 행적 등을 기록한 비. 권사균의 호는 보진당이다. 보진(葆眞)이란 마음이 자세하고 한결같아 공부에 전념하여 천심(天心), 즉 도심(道心)의 진리를 회복하여 그 진리를 효우(孝友)의 근본으로 삼고 자손훈계(子孫訓戒)로 남기고 행동의 모범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권사균의 명의(名義)를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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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인 권사균(權士均)의 묘비. 권사균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1506년(중종 1)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강릉으로 귀향한 후 강릉향교 교수직을 맡아 후진 양성을 하는 한편 보진당(葆眞堂)을 세워 명유들과 교류하면서 후학 계도(啓導)에도 기여하였다. 권사균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고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06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현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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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송(權悚)의 묘비. 권송은 안동권씨 추밀공파조 권행의 19세손이며, 강릉 낙향시조이다. 무공랑(務功郞)으로 선원전(璿源殿) 참봉을 지냈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권륜(權綸)의 아들이며, 형은 권구(權懼)이다. 연산군 때 누이가 후궁 숙의(淑義)로 입궐하자 외척으로 지목될 것을 우려하여 한양에서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부인은 삼척심씨 심산보(沈山甫)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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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인 권연(權璉)의 묘비. 권연이 졸한 후 수백 년이 지나 권연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문헌이 유실되자 권연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82년에 11대 후손인 권진영(權晉榮) 등이 주축이 되어 비석을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에 있다. 비신의 높이가 152㎝이고 비신 두께 및 너비가 67㎝인 비석이다. 비제는 "유명조선국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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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상(權殷常)과 그의 부인 강릉김씨의 효자비. 부효부열(夫孝婦烈, 남편은 효자이고 부인은 열부)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경우이어서 반드시 그 정신을 숭상하고 널리 알리기 위하여 현손인 권오식(權五植)이 자료를 수집하여 이 비석을 세웠다. 이 효자비는 권은상이 돌아가신 지 71년이 되는 1944년에 세웠다. 김윤경(金潤卿)이 글을 짓고 최돈국(崔燉國)이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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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인 권적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 선대의 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차원에서 1910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14대 손인 권덕현(權悳顯)이 기록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저동 산 80번지에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6㎝, 너비 55㎝, 두께 24㎝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전면에는 “성균진사증예빈시정안동권공적지묘(成均進士贈禮賓寺正安東權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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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권처평(權處平)의 처 강릉 최씨의 열행(烈行)을 기록한 비 권처평 처 강릉최씨는 진사 최해문(崔海文)의 딸로 임진왜란을 당하자 적소에서 핍박을 피하여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때 권처평의 동생 권처직(權處直)의 부인 김씨도 함께 핍박을 피해 투신하였다. 아들 권덕유(權德裕)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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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화(權和)[1539~1573]의 묘비. 권화(權和)의 자는 희혜(希惠), 호는 습독(習讀)이다. 권화(權和)는 연곡에 무진정(無盡亭)을 짓고 정자 주위를 거닐며 보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와는 이종사촌간이다. 묘비가 오래되어 훼손되자 후손 권학수(權學洙) 등이 율곡 이이가 찬한 묘지명과 가승을 근거로 1884년(고종 21)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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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광국(金光國)[1489~1554]의 묘비. 김광국의 자는 관여(觀如), 아버지는 김세남(金世南), 어머니는 함종어씨(咸從魚氏) 어충경(魚忠敬)의 딸이다. 등과하여 제천현감을 지냈으며 제천 주민들이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부인은 영일정씨 정희소(鄭希韶)의 딸이며, 3남 1녀를 낳았다. 원래 있던 묘갈이 훼손되어 18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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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광철(金光轍)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 김광철의 자는 자유(子由),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다. 헌납(獻納)을 지낸 김대(金臺)의 후손이다. 후손 김한성(金漢星) 등이 묘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후세에 전했으나 세월이 지나 마모되어 그 행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자 1931년 다시 건립하였다. 김광철의 묘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핸다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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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광헌(金光軒)[1485~1539]의 묘비. 김광헌의 자는 중여(仲輿)이다. 조는 헌납 김지(金墀), 부는 군자감정을 지낸 생원 김반석(金盤石), 모는 최입지(崔立之)의 후손인 진사 최유남(崔洧南)의 딸이다. 김광헌은 최치운의 손자인 현감 최세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임경당 김열(金說)이다. 1540년 후손들이 김광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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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효자인 김담(金譚)[1522~1605]의 효행을 기리는 묘비. 김담의 자는 담지(譚之), 호는 보진재(齋眞齋), 본관은 강릉이다. 강릉김씨 부정공파(副正公派) 보진재공(葆眞齋公) 노암파(魯巖派) 파조(派祖)이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김담의 효행을 천거하며 시를 지었다. 사후에는 첨지중추부사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졌으며, 「삼강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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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대(金臺)의 무덤 앞에 세운 비. 1831년(순조 31)에 세웠다가 비문의 자획이 마모되어 1985년에 다시 세웠다. 12대 손인 김병혁(金秉爀)이 지었고, 17대 손인 김수남(金壽南)이 글씨를 썼다.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신복탑동에 있다. 비석은 전체높이 183㎝, 비신 130㎝, 폭 43㎝이다. 비의 제목은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통훈대부 사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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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김동명 문학관 옆에 있는 김동명의 시비(詩碑). 김동명 시인은 강릉 출생의 민족시인으로 「파초」·「내 마음」·「바다」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85년 이 지역의 국회의원이었던 이범준을 시비 건립 추진위원장으로 하여 당시의 행정구역상 명주군수의 주관으로 김동명 시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김동명 시비는 본래 김동명 시비공원 내에 건립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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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득의(金得毅)[1595~1653]의 묘비. 김득의는 강릉김씨로 자는 임경(任卿)이다. 김주원의 후손이며, 5대조는 괴당(槐堂) 김윤신(金潤身)이다. 김득의의 묘비는 1818년(순조 18)에 세워졌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리 김득의의 묘 앞에 있다. 안인 대동마을에서 영동화력발전소 사원 사택을 지나자마자 우측 야트막한 산에 있다.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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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지봉(芝峰) 김몽호(金夢虎)[1557~1637]의 가계 및 행적을 기록한 묘비. 김몽호는 본관이 강릉이고 김주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수(金鐩)이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9년(광해군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몽호의 손자인 김시혁(金始爀)과 김시형(金始炯)이 세웠다. 김몽호의 묘가 대관령 넘어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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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김씨 김반석(金盤石)의 묘비. 김반석(金盤石)의 자는 자안(子安), 1455년에 출생하였고, 1522년에 병으로 졸하였다. 아버지는 홍천훈도 김지(金墀), 할아버지는 김필양(金匹陽), 증조는 김윤귀(金允貴), 외조는 강릉최씨 최백종(崔伯宗)이다. 부인은 강릉최씨 최유남의 딸이다. 아들은 김광주(金光輳), 김광헌(金光軒), 김광로(金光輅), 김광복(金光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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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무신인 김여명(金汝明)의 묘비. 강원도 강릉시 저동 숭덕재 근처의 김윤신 묘 앞에 김윤신 신도비와 함께 있다. 화강석 재질의 방형비좌 위에 오석 재질의 비신이 놓여 있다. 비신의 높이는 96㎝, 비신 너비 42.5㎝, 비신 두께 5.5㎝이다. 비문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兼)를 지낸 최응현(崔應賢)이 짓고,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권적(權迪)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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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김연생(金演生)[1859~1921]은 강릉김씨 김병도(金秉鍍)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성심껏 공경하였으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맛있는 나물이나 고기가 생기면 자기의 입에 대는 일이 없이 아버지에게 드렸으며, 혹간 밖에서 별미의 음식을 보게 되면 그것을 나무 잎사귀에 싸서 아버지에게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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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인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의 묘비. 김열은 1506년(중종 원년)에 출생하였으며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金周元)의 25세손으로 진사 김광헌(金光軒)의 장자이다. 관직은 평강훈도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세칭 임영처사(臨瀛處士)로서 강릉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1812년(순조 12)에 6세손 김처진(金處鎭), 김국명(金國嗚), 8세손 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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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인 김영연(金永淵)의 묘비. 김영연은 강릉김씨로 아버지는 호조참의를 지낸 회정(檜亭) 김자흠(金子欽)이다. 어머니는 청풍군수를 지낸 강릉최씨 최득유(崔得濡)의 딸이다. 부인은 강릉최씨 생원 최맹섭(崔孟涉)의 딸이다. 성품이 고명하여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묘소 앞에 있던 옛 묘비가 오래되어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워지자 1959년 15세손 김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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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인 김윤신(金潤身)의 묘비. 김윤신(金潤身)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강릉 출신이다. 호는 괴당(槐堂), 자는 덕수(德叟)이다. 금란반월회를 창계했던 인물 중에 한사람이다. 김윤신 사후에 후손인 판서(判書) 김상익(金尙翼), 김형진(金衡鎭) 등이 주도하여 비를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저동 강릉김씨 옥가파 종산(宗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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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인 김윤신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 김윤신의 호는 괴당(槐堂)이다. 금란반월회를 창계했던 인물 중에 한사람이다. 만년에 낙향하여 향약(鄕約)을 저술하였다. 1766년(영조 42) 김윤신의 후손 김형진(金衡鎭)이 찬하고 판서 김상익(金尙翼)이 서한 의정부사인구비(議政府舍人舊碑)가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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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김응일(金應一)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 김응일[1598~1660]의 자는 덕문(德文),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3년간 율봉찰방(栗峯察訪)을 역임하면서 풍흉에 따라 조세를 거두고 구휼을 지극히 하였다. 아버지 난사공(煖沙公) 김경윤(金景潤)이 기침병이 들자 엄동설한에 석청(石碃)과 석회(石灰)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3일간 기도하였다. 이때 꿩이 소리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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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인 김이려(金以礪)의 묘지석(墓誌石). 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묘지명이다. 김이려의 자는 성지(成之), 본관은 강릉이다. 조부는 찰방을 지낸 김석견(金石堅), 아버지는 교수를 지낸 김보(金黼)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신(權伸)의 딸이다. 김이려는 1487년(성종 18)에 출생하였으며, 1552년(명종 7)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참봉 김세달(金世達)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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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인(金訒)의 묘지석(墓誌石). 김인[1516~1571]의 자는 대인(大仁)이다. 본관은 강릉이며 김주원의 후손이다. 증조는 증통정대부 예조참의 행봉정대부 사간원헌납(贈通政大夫 禮曹參議 行奉正大夫 司諫院獻納)을 지낸 김대(金臺), 할아버지는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봉정대부 종부시첨정(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行奉正大夫 宗簿寺僉正)을 지낸 김세훈(金世勳),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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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자흠(金子欽)의 신도비. 김자흠은 1444년(세종 26)에 과거에 올라 수직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김자흠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두호미(豆乎彌)에 있다. 화강암 비좌, 비신, 지붕돌[옥개석]로 만들어졌으며, 전체 높이는 272.5㎝이고 비신의 폭은 82㎝이다. 1971년에는 후손들이 신도비각을 건립하였다.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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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는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의 신도비. 1960년에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인 김주원의 묘역 입구에 김주원의 37대 후손인 김진만(金振晩)이 건립하였다. 신도비의 규모는 높이 317㎝, 비신 180㎝, 두께 36.5㎝, 폭 69㎝이다. 비문의 글씨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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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집(金鏶)의 묘비. 김집(金鏶)[1614~1664]의 자는 기지(器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김성철(金聲徹)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최승안(崔承安)의 딸이다. 부인은 삼척김씨 김준남(金俊男)의 딸이다. 김집은 품성이 중후하고 언어가 신중하며 경서에 열중하여 향중에서 덕행이 뛰어난 사람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1946년 9세손 김장묵(金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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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주(裵文周)의 처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효부비(孝婦碑). 김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강릉시 옥계면 현내 2리 193번지 도로변에 있다. 효부각(孝婦閣)이라 이름 지어진 비각 안에 받침돌 위에 높이 80㎝, 두께 10.8㎝, 너비 38㎝의 몸돌을 세웠다. 비 전면에는 “학생배공문주지처효부김해김씨지려(學生裵公文周之妻 孝婦金海金氏之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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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대관령에 있는 일제 강점기에 이천~강릉에 이르는 구간의 도로 확장 공사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기념비. 일제 강점기 총독부 치하에서 제1기 치도 사업의 일환으로 이천에서 강릉에 이르는 구간의 도로 확장 공사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대관령 구간이 가장 어려운 공사 구간이었던 데 기인하여 이곳에 건립하였다. 대관령 정상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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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의 영정을 모신 덕봉사(德峰祠) 내에 세워진 기적비(紀蹟碑). 사당이 건립된 후 7년이 지난 1963년에 후손 최형섭(崔衡燮)의 발의로 세워졌다. 강원도 강릉시 병산동 산26-1 덕봉사(德峰祠)에 세워져 있다. 덕봉사는 포남교를 지나 강릉공항 방향인 구 두산동사무소로 가기 전 좌측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받침돌 위에 높이 156.5㎝, 너비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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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함씨 시조 함부림(咸傅霖)[1360~1410]의 묘 앞에 세워진 비석. 함부림(咸傅霖)의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정평(定平).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사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와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1907년 후손 함동호(咸東鎬)가 낙향시조의 행적을 소상히 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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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밀양박씨 정재공파의 낙향시조인 박계립의 신도비. 박계립(朴啓立)은 고려밀성부원군대제학보조공신(高麗密城府院君大提學輔祚功臣) 정재공(貞齋公)의 후손이며, 밀양박씨 정재공파 북동대종중(密陽朴氏貞齋公派北洞大宗中)의 낙향 시조이다. 박계립의 호는 눌암(訥庵)이다. 김제 흥복동(興福洞)에서 1620년(광해군 12) 아버지 진사 박지봉(朴芝鳳)과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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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공달(朴公達)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 박공달[1470~1553]의 자는 대관(大觀), 호는 사휴당(四休堂), 강호만호(江湖晩湖), 사지(四止)이고 본관은 강릉이다. 박공달은 1519년(중종 14) 7개 항목의 천거명목(薦擧名目) 중 성품과 행실이 돈독하였기 때문에 김정이 현량과에 천거하여 병조좌랑을 지냈다. 1976년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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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수량(朴遂良)[1474~1546]의 묘비. 삼가 박수량은 1474년(성종 6) 강릉에서 출생한 인물로 현량과에 피천되어 용궁현감을 지냈다. 1814년(순조 14) 박수량의 행적을 기리고 후대에 보전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방동하리 박수량 효자각 안에 효자비, 효자각기와 함께 있다. 효자각 옆에는 쌍한정이 있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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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승휴(朴承休)의 묘비. 박승휴는 박제상의 후손으로 기묘사림이며 효자정려를 받았던 박수량(朴遂良)의 아버지이다. 1910년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 원래 묘소에 있던 비가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의 마모가 삼해지면서 알아 볼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이 재건립을 논의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 강원도 강릉시 시루봉길68번길 18[난곡동 51번지] 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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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문신으로 강릉박씨 양주파(襄州派)의 파조인 박시문(朴始文)의 묘비. 박시문의 자는 자소(子昭)이다. 1486년(성종 17)에 문과에 합격하여 전적(典籍), 평해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박시문은 만년에 낙향하여 금란반월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95년 후손들이 선조의 행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증봉 아래, 즉 경포호 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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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시행(朴始行)의 묘비. 박시행의 자는 가원(可遠), 호는 송계당(松桂堂)이다. 1468년(세조 14)에 생원에 올라 평창훈도(平昌訓導)를 지냈으며, 1469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부응교(副應敎)·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그리고 고성(高城)·영월(寧越)·안변(安邊) 및 금교찰방(金郊察訪)을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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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시형(朴始亨)의 묘비. 박시형의 자는 경원(景遠), 호는 국포(菊圃) 또는 동원(東原)이다. 세조 때에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였고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장령, 호조좌랑, 홍문관교리동부승지, 안동부사, 춘추관수찬, 예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박시형의 묘소에 원래 있던 비석이 훼손이 심해지자 1981년 11세손 박태구(朴泰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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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인 박억추(朴億秋)[1523~1590]의 묘비. 박억추의 자는 덕수(德叟), 호는 농헌(聾軒)이다.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효행으로 효자 정려를 받았으며, 효렴과로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 청하현감(淸河縣監), 영평부사(永平府使),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냈다. 박억추 묘소에는 원래 오래 전에 세운 묘표가 있었으나 풍파로 훼손이 심하여 후손 박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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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인 박영근(朴榮根)[1427~1497]의 묘갈. 박영근의 자는 영숙(英叔)으로 영민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22세에 사마시에 올랐으나 병으로 고향에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면서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최방(崔滂)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승소(朴承紹), 박승휴(朴承休), 박승서(朴承緖), 박승필(朴承弼)이다. 넷째 아들 박승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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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자검(朴自儉)의 묘비. 박자검(朴自儉)은 1392년(태조 1)에 문과에 합격하여 태종 때에는 지여연군사(知閭延郡事)와 권농병마단련사(勸農兵馬團練使), 세종 때에는 지단천군사(知端川郡事) 등을 지냈다. 후손들이 박자검의 생애와 행적을 후세에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1946년에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저동 187번지 경양사 옆에 위치한다. 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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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정원(朴貞元)의 묘비. 박정원은 박수량(朴遂良)의 종질(從姪)로서 1506년(중종 1)에 태어났으며 1534년에 생원에 합격하고 154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 남학교수(南學敎授) 등을 지냈다. 비석은 1850년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에 거의 모든 문헌이 없어져 박정원의 관직과 연수(年壽)도 전해지지 않았다. 이에 11대 손인 박경로(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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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중경(朴中敬)의 묘비. 박중경은 1447년(세종 29)에 생원에 입격했으며 군위현감과 영월군수를 역임했다. 1907년에 세워졌는데, 원래 있던 비석이 이끼에 침식되어 내용을 식별할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이 박중경의 생애와 행적을 추원(追遠)하기 위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시루봉길68번길 18[난곡동 51번지]에 있다. 비석은 1907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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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노암동에 있는 김담과 그의 아들, 손자까지 삼대에 걸친 4명의 정려비. 김담(金譚)을 비롯하여 아들인 김경황(金景滉)과 김경시(金景時) 그리고 김경황의 아들인 김한(金垾)의 정려를 말한다. 3대 즉 김담과 그의 아들, 그리고 손자에 걸쳐 4명의 효자가 나온 데에 기인한다. 받침돌 위에 높이 82~83㎝, 너비 30.5~33.5 ㎝, 두께가 8~8.5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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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강릉통일공원에 있는 삼학도 묘소의 위령비. 한국전쟁 시 공산군에 잡혀 죽음을 당한 강릉농업학교 최오규(崔午圭), 강릉상업학교 김동훈(金東勳), 강릉사범학교 박준열(朴準烈) 삼학도의 묘소 좌측에 1983년 10월 30일 건립된 비이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잡혀 처형된 최오규, 김동훈, 박준열 세 학생의 묘소에 세운 위령비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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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화랑 설원랑(薛原郞)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화랑도는 수련 중에 “산천을 찾아 노닐었는데, 먼 곳까지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遊娛山水 無遠不至)”고 하였다. 산천은 젊은 화랑 무리의 수련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들은 수련 기간 동안 경주 부근의 남산을 비롯하여 금강산, 지리산 혹은 최근에 알려진 울산군 두동면 천전리 계곡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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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손씨의 강릉 입향시조인 손종복(孫宗復)의 묘비. 손종복은 임진왜란을 피해 강릉 금광평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부인은 해주오씨이다. 3남을 두었는데, 손도길(孫道吉), 손덕길(孫德吉), 손준길(孫俊吉)이다. 1989년 후손 손호승(孫鎬承) 등이 입향시조인 손종복의 입향경위와 행적 그리고 선대와 후손의 가계를 정리하여 비를 세웠다. 손종복의 묘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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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서원의 건립내력과 사적을 기록한 비. 송담서원은 율곡 이이 선생을 배향한 곳으로 1630(인조 8년)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비문에는 율곡 이이의 행적과 외가에 대한 내용 그리고 서원의 창건과 이건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율곡 이이를 배향한 서원의 사적을 보존하고 전하기 위해 율곡 이이의 후학들인 지역 유생들과 문인들이 건립하였다.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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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명화(申命和)의 묘소 앞에 세운 비석. 신명화는 중종 대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류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었다. 외손인 율곡 이이와 오죽헌(烏竹軒) 권처균(權處均)이 신명화의 묘를 강릉부 북쪽 두왕동(豆旺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조산리로 이장한 이래 외손들이 봉사(奉祀)한다. 1885년(고종 22) 외손인 권인식(權麟植) 등이 신명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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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응란(沈應蘭)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비 심응란[1790~1836]의 자는 경언(景言), 본관은 삼척,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심기영(沈耆永)의 아들이다. 심응란은 어버이의 병이 위독하자 낮에는 의원을 불러 치료하고, 밤에는 하늘에 어버이 대신 자신이 앓게 해 달라고 빌었다. 어버이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기에 하늘에 절하고 조용히 빌었더니 문득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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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인 어유룡(魚有龍)[1678~1764]의 공적을 기리는 선정비. 어유룡(魚有龍)은 조선조 문신으로 자는 경우(景雨), 본관은 함종(咸從), 1710년 진사에 입격하였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0년부터 1732년까지 강릉대도호부사를 지냈다. 1732년 강원도 관찰사로 승진하여 교체되었다. 어유룡(魚有龍)이 강릉대도호부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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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집의 처인 삼척김씨(三陟金氏)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최종집의 처 삼척김씨의 효행을 본받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전면 비문 제목은 “사인최종집처삼척김씨열녀비(士人崔宗集妻三陟金氏烈女碑”)이고 후면에는 비문이 없고 입석(立石) 연월일(年月日)도 마멸되어 있다. 삼척김씨 부인이 시집 온 지 두 달 만에 시부모가 무서운 전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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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李鎭三)의 처 평택임씨(平澤林氏)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열녀각(烈女閣). 어느 해 임씨의 남편 이진삼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배편으로 장삿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배가 영해 축산포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임씨의 남편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뒤늦게 남편의 죽음과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임씨는 그날로 배를 타고 축산포로 갔다. 며칠 동안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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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박월동에 있는 심주한(沈周瀚)의 처 강릉 최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선조의 효행을 본받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심붕황(沈鵬潢)·심걸황(沈杰潢)·심태황(沈泰潢)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다. 받침돌에 높이 100㎝, 너비 36.5㎝, 두께 6.5㎝ 크기의 몸돌을 세웠으며 비신은 청석(靑石)이다. 전면 비제는 “열녀 통정대부 심주한 처 강릉최씨지려(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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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문(張振文)의 처 강릉김씨(江陵金氏)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정려각은 원래 강릉시 옥천동에 세워졌으나 장씨들이 고흥으로 낙향하면서 정려각을 가지고 가서 비(碑)만 남았었다. 1962년 강릉 시가지를 확장할 때 강릉김씨 옥가파(玉街派) 종중에 서 현재 괴당 김윤신 신도비 자리[남편인 장진문의 묘 반대편]에 이건하였으나 이 자리에 신도비를 이건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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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신세린(辛世麟)과 열부인 처 강릉김씨 그리고 아들인 신붕(辛鵬)의 효행을 기린 효열비. 영산신씨 집안에서 조상의 효행과 절의를 기리고 본받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비각에는 2개의 비가 있으며 1기는 부모인 '효자 성균진사 공릉참봉 영산신공 휘세린(孝子 成均進士 恭陵參奉 靈山辛公 諱世麟) 처 열부 강릉김씨지려(妻 烈婦 江陵金氏之閭)'의 비석은 받침돌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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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신씨 신세린(辛世麟), 신세린의 처 강릉김씨, 신세린의 아들 신붕(辛鵬)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는 효열각. 신세린(辛世麟)의 처 김씨(金氏)는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으며, 남편이 죽자 다락에서 떨어져 같이 죽으려고 하였으나 집안사람들이 구해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씨는 늘 애통하게 울면서 간장을 먹지 않았다. 소상(小祥)을 맞아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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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서원(五峯書院)의 건립내력과 연혁을 기록한 기적비(紀蹟碑). 오봉서원에 우암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한 후 그 건립시기 이후부터의 내력을 적어 기적비를 세웠다.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오봉서원 앞 기적비각 안에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12㎝, 비신 높이 161㎝, 비신 너비 67㎝, 두께 14㎝이다. 비신은 오석이고 비좌와 비두는 화강석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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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서원 건립 배경과 내력 그리고 제향인물 등을 기록한 묘정비(廟庭碑). 공자 진영의 봉안 인물과 과정 그리고 서원의 건립과정, 주자와 송시열의 제향 등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구비(舊碑)가 있었으나 우암 송시열을 추배한 사실을 추가로 기술하여 1856년(철종 7) 강릉 지역 유림들 뜻을 모아 새로 세웠다.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오봉서원 앞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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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기의 학자인 우복(愚伏) 정경세의 권학흥교(勸學興敎) 정신을 기린 비(碑).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호 ‘우복’을 비의 이름으로 붙였다. 정경세가 1613년(광해군 5)에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부사로 부임하여 흥학(興學)과 교화(敎化)에 진력한 점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또한 이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정경세는 유성룡(柳成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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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최씨 최철집의 처 유인 수원백씨(水原白氏)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열비(孝烈碑). 효부이자 열녀인 수원백씨는 강릉시 유천동에서 태어났다. 강릉최씨 최철집에게 시집와 평창군 봉평면 장평리 지석동에 거주하였다. 백씨는 와병 중인 시부모를 위해 낮에는 험준한 산골을 헤매며 약초를 캐어 봉양하였다. 밤에는 정한수를 길러 기도하기를 수년이나 하였다. 시부모가 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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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인 유헌장(柳憲章)의 공적을 기리는 선정비. 유헌장(柳憲章)은 1707년 강릉대도호부사로 부임하여 1712년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객사와 관방들을 중수하였으며 향교 대성전 석전제 때 사용하는 돗자리를 새로 만들었다. 굶주린 부민들의 구휼을 위해 자비곡(自備穀) 400석을 내 놓았으며, 후손이 없는 효자정문에 비를 새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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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강 처 강릉최씨의 이름·생일·죽은 날·자손 등을 적어 무덤 앞에 묻은 판석. 이무강 처 강릉최씨의 아버지는 최수당(崔壽塘)이고 어머니는 비인현감(比仁縣監)을 지낸 신수(辛守)의 딸이다. 조부는 통훈대부금구현령(通訓大夫金溝縣令)을 지낸 최세충(崔世忠)이고, 증조는 가선대부형조참판(嘉善大夫刑曹參判)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이다. 이무강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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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지방 향리였던 이병화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이병화유혜불망비(李秉華遺惠不忘碑)는 대관령 옛길 등산로 입구에서 2㎞ 정도 올라간 곳에 자그마한 무덤과 함께 위치한다. 한겨울 대관령 험난한 고갯길에 변변한 쉼터가 없어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이들이 생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비를 내어 주막을 운영하도록 했던 이병화의 은혜를 기리는 비석이다. 조선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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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안성이씨(安城李氏) 강릉 입향조인 영재(瀛齋) 이석진(李錫珍)의 묘비. 이석진의 호는 영재(瀛齋)이며 자는 세보(世寶)이다. 1465년 평해에서 출생하였다. 16세의 나이로 강릉에 들어와 죽헌동에 거주하였다. 1489년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지역 유림인 춘헌(春軒) 최수(崔洙), 보진당(葆眞堂) 권사균(權士均),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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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문신이자 우계이씨 시조인 이양식(李陽植)을 추모하는 비. 우계이씨 시조인 이양식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중서사인좌복야(中書舍人左僕射)를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선영 동쪽 기슭에 묘소를 쓰고 묘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봉분이 퇴락하고 석물이 멸실되어 1982년 다시 건립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 15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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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선비인 이종손(李宗孫)의 묘비. 이종손 형제간의 우애와 덕행(德行) 및 지업(志業)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웠다. 이종손의 묘가 위치하고 있는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에 있다. 비문 제목은 ‘유명조선국성균진사이종손묘갈(有明朝鮮國成均進士李宗孫墓碣)[조선의 성균관 진사 이종손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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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신라 말 잠시 강릉에 정착했던 장정필(張貞弼)의 행적을 적은 묘비. 장정필의 자는 영보(寧父), 호는 포음(圃蔭)이다. 장정필은 당나라 소종(昭宗) 898년에 태어나 5살 때 변란을 만나 아버지 대사마공(大司馬公) 장원(張源)과 함께 신라로 피신 와 10여 년 동안 살다가 떠났다. 이후 다시 사신으로 왔다가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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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전계현(全繼賢)의 묘비. 전계현은 정선전씨로 자는 원구(元龜), 세종 11년(1429) 출생하였으며, 중종 14년(1519) 졸하였다. 부인은 삼척심씨 참봉 심양보(沈梁甫)의 딸이다. 3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진사 전순지(全舜智), 차남은 문과에 합격하고 교리를 지낸 전순인(全舜仁), 셋째는 습독이었던 전순철(全舜哲)이다. 1849년(철종 1) 후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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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전성명(全性命)의 묘비. 전성명의 자는 호천(浩天), 호는 신암(愼庵)으로 신라전법판서(新羅典法判書) 전훤(全愃)의 후손이다. 증조(曾祖) 전우정(全遇禎)은 성균생원이었고, 할아버지 전륜(全崙)은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냈으며 아버지 전민행(全敏行)은 통덕랑행정선훈도(通德郞行旌善訓導)를 지냈다. 전성명은 기자전참봉(箕子殿叅奉)과 희릉참봉(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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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전순인(全舜仁)의 가계와 행적을 기록한 비석. 전순인의 자는 원경(元卿), 아버지는 전계현(全繼賢), 어머니는 삼척심씨 심양보(沈梁甫)의 딸이다. 어촌 심언광, 삼가 박수량과 교유하였다. 1519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비문은 강릉부사를 지낸 박종정(朴宗正)이 지었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심보영(沈普永)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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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운(崔致雲)의 아내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함씨(咸氏)의 묘비. 정경부인 함씨는 함세린(咸世麟)의 딸로 1392년 출생하였고 천성이 정숙하였으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21살에 최치운에게 시집왔으며 시댁에서도 효행을 몸소 실천하였다. 서거정이 비문을 지었으나 비석을 세우지 않아 소실되었다. 그러나 9세손 최정태(崔挺泰)가 우연히 두타산 삼화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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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선비인 정기평(鄭基平)의 묘비(墓碑). 정기평의 자는 정백(正伯)이고, 1584년(선조 17) 양주목사를 지낸 정약(鄭爚)의 아들로 출생하여 1629년(인조 7)에 졸하였다. 효행이 출중하여 부모상을 당하자 예제를 충실히 지켜 상을 치렀다. 비문을 지은 사람이 한성부좌윤 및 예문관제학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인 것으로 보아 처음 세워진 것은 18세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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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인인 정란(鄭鸞)의 경력과 인품을 기록한 묘지(墓誌). 정란은 1568년(선조 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부친은 정두형(鄭斗亨)으로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저동 전충사(全忠祠)에 있다. 개자판(蓋磁板)은 가로 15.2㎝, 세로 21.8㎝, 두께 3.3㎝이며, 저자판(底磁板)은 가로 14㎝ ,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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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에 있는 조선 전기 경휘옹주의 태실(胎室) 옆에 세운 비. 강원도 강동면 모전리에 있는 태봉산 정상부에 조선 9대 왕 성종의 소생인 경휘옹주의 태실비(胎室碑)가 위치하고 있다. 태실비 뒤편으로는 봉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오래전에 이미 파헤쳐진 상태이고 태실비 주변에서는 관련 석물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태실비의 재질은 화강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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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강릉부에서 산삼의 남획을 막고 궁궐에 공납하기 위해 세운 민간인 산삼 채취 및 출입 금지 표석. 1992년 강릉영림서에서 가리왕산 국유림도 개설공사 중 정선 강릉부 삼산 봉표가 발견되었다. 봉표는 금표(禁標)라고도 하며 산림에 출입을 금하거나 일정한 공간을 막아서 특정한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다. 황장목의 보호를 위해서 황장금표를 세우고 산삼의 공출을 위해 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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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박(崔始鎛)의 처 정선전씨의 효열비. 최시박의 처 정선전씨는 시할머니가 중병으로 자리에 누워 끼니를 제때 하지 못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정성스럽게 간호하였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자기의 모유를 짜서 공양하여 시할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다. 그후 시할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이밖에도 전씨는 남다른 부덕(婦德)으로 아들을 교육하여 진사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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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선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조산사(助山祠)’라는 이름으로 보자면 옛날 사당이 있었다는 의미인데, 조산이라는 이름이 유교식의 사당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마을제사를 지내는 민간신앙의 성소인데, 유교식 의례와 혼합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무렵에 세워진 조산사 유허비는 조산사의 옛 터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건립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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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인 조석삼의 묘비. 조석삼[1813~1896]의 본관은 창령, 호는 황포(篁圃)이다. 조석삼은 1888년(고종 25)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그해 특별히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돈령도정(通政大夫敦寧都正)에 증직되었다. 1890년 다시 수직으로 가선대부돈령(嘉善大夫敦寧)에 증직되었다. 1893년 다시 수직으로 가의대부에 증직되었다. 1910년 후손 조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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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육성황신(肉城隍神)으로 봉안된 창해역사의 유허비. 중국 한나라의 장량과 함께 진시황을 저격한 역사를 창해역사로 보고, 그의 출생이 이곳 강릉의 대창리라는 주장을 밝혀주는 유허비이다. 조선 후기에 이미 유허비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고, 1991년 옥포장학재단 최종찬 이사장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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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지변동의 마명산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인 최문한(崔文漢)의 묘비. 최문한은 충숙왕의 부마이며 고려 말에 국운이 다하자 강릉으로 낙향한 후에 강릉최씨 시조가 되었다. 1799년 강릉에 거주하는 최문한의 자손들이 최문한 묘지의 표석으로 묘비를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지변동의 유천재사(楡川齋舍)가 있는 마명산 자락에 있다. 받침돌 위에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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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최세건(崔世楗) 처 김씨의 성명·생몰연월일·자손의 성명 등을 기록한 돌. 최세건 처 김씨는 강릉김씨로 김세량(金世良)의 딸이다. 남편 최세건은 승문원 교리 최자점(崔自霑)의 아들로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냈다. 최세건 처 김씨는 1457년 출생하여 1535년 9월 1일에 병으로 졸하였다. 1535년 11월 30일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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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최세창(崔世昌)의 부인 강릉김씨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旌閭). 강릉최씨(江陵崔氏) 최세창의 처 강릉김씨는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으며, 남편에게 지극히 순종하였다. 남편이 죽자 며칠 동안 남편의 시신을 껴안고 자신도 따라 죽을 결심을 하여 치마 한 폭을 찢고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의 관에다 넣고 손가락의 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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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최세충(崔世忠)의 생애와 행적 등을 기록한 비. 최세충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익찬주부(翊贊主簿),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등의 관직을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조산 강릉최씨 선영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는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개자판(蓋磁板)은 가로 26.5㎝, 세로 37㎝, 두께 2.3㎝이고, 저자판(底磁板)은 가로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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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강릉 12향현의 한 사람인 최수(崔洙)의 행적을 적은 묘비. 최수의 자는 도원(道源), 호는 춘헌(春軒)이며, 강릉 출신으로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유명하다. 통훈대부진잠현감(通訓大夫鎭岑縣監)을 지냈으며, 금란반월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강릉 12향현 중의 한 사람으로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후손 최시복(崔始復)과 최주학(崔柱鶴)이 잘 전해지지 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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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강릉최씨 용연동파의 시조인 최수담의 묘에 세운 비석. 최수담[1499~1582]의 자는 청수(淸叟),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지평현감을 지낸 최세번(崔世蕃)이고, 할아버지는 최진현(崔進賢)이다. 최수담은 박공달(朴公達)의 딸과 혼인하여 최인준 등 다섯 아들을 낳았다. 후손 최영대와 최종태 등 종인들이 묘소에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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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강릉최씨 용연동파의 시조인 최수담의 묘비. 최수담[1499~1582]의 자는 청수(淸叟), 공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는 지평현감을 최세번(崔世蕃)이다. 현량과(賢良科)로 공조좌랑을 지낸 박공달(朴公達)의 딸과 혼인하였다. 최수담 사후 400여 년이 지나 묘표의 마모와 훼손이 심해지자 후손 최영대(崔永大), 최종태(崔鍾泰) 등이 논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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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의 신도비. 강릉최씨 필달계 종중에서 최수성의 행적을 보존하고 추모하기 위해 1957년에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즈므마을 입구에 있는 삼현비각 내에 있다. 삼현비각 서북쪽 산록은 강릉최씨 필달계 선영으로 보은에서 이장해 온 최수성의 묘소도 함께 있다. 방형 비좌에 오석 비신이며, 지붕돌[옥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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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인 최숙남(崔叔男)의 묘비. 1644년에 현손인 최진후(崔鎭厚)가 세웠으나 쪼개어져서 1694년에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이후 마모가 심해져 1884년(고종 21)에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월호평동에 있다. 비신의 높이는 141㎝, 두께는 15㎝, 너비는 51.5㎝이다. 비제는 ‘성균생원학구최공묘갈명병서(成均生員鶴衢崔公墓碣銘幷序)’이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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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인 최여림(崔汝霖)의 묘비. 최여림은 어릴 때부터 두루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실학(實學)에 뜻을 두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경포 부근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최여림이 죽은 후 380여 년이 지나 최여림의 생졸이력(生卒履歷)을 상세히 밝히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유산동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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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간재(艮齋) 최연(崔演)[1503~1549]의 신도비. 최연의 호는 간재(艮齋), 자는 연지(演之), 시호(諡號)는 문양(文讓)이다. 고려조 충숙왕 부마 문한공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최세건(崔世楗)이다. 후손들이 최연의 행적과 공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리에 있다. 비제(碑題)는 "자헌대부한성판윤증시문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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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 최응현 신도비는 1687년(숙종 4)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에는 신도비문 작성 경위,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는 강릉최씨의 상계와 조상의 공적, 수헌공의 행적과 후손들의 행적, 그리고 비명(碑銘)이 기록되어 있다. 최응현의 묘소에 비가 있었으나 오래되어 마모되자 후손들이 최응현의 행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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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강릉최씨 입지계의 시조인 최입지의 신도비. 최입지(崔立之)는 강릉최씨 입지계의 시조이다. 최입지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다. 1844년(헌종 10)에 후손 최종태(崔鍾泰)·최양호(崔養浩) 등이 종인들과 함께 재원을 마련하여 건립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최입지 묘 근처에 있다. 비좌와 비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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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자점(崔自霑)[1434~1508]의 묘비. 최자점의 자는 자흡(子洽), 호는 괴헌(槐軒), 부마(駙馬) 최문한(崔文漢)의 증손이며 직장(直長) 최윤(崔沇)의 아들로 1465년(세조 11)에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 정언, 고성군수를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교1동 강릉시외버스터미널 북쪽 산록에 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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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인 최진현(崔進賢)[1424~1460]의 묘비. 1451(문종 1) 생원에 입격하였고 음사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부인은 죽산안씨 여흥부원군 안치강(安致康)의 딸인데 향년 30세로 졸하였으며, 이때 묘표는 동생인 수헌공(睡軒公) 최응현(崔應賢)이 찬하였다. 그리고 다시 강릉함씨 호장 함순(咸順)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최세번(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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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남(崔忠南)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비. 최충남[1566~1616]의 자는 신부(藎夫), 본관은 강릉, 최문한(崔文漢)의 후손이다. 최충남의 나이 8살 때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아버지의 병이 낫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1796년(정조 20)에 7세손 진사 최구현(崔九鉉)이 선조의 효행을 전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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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치운(崔致雲)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 강릉최씨 필달계 후손으로 조선 세종 조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의 상계(上系) 및 혼인관계, 출생과 관직경력, 후손, 명문(銘文) 등을 기록한 것으로 최치운의 아들 최진현(崔進賢)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즈므마을 강릉최씨 필달계 선영에 있는 최치운의 묘 앞에 있다. 비석의 총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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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 최치운의 자는 백경(伯卿)이고, 호는 경호(鏡湖)·조은(釣隱)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이다. 1408년(태종 8)에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412년(태종 12)에는 향유(鄕儒) 68인과 더불어 강릉향교 중건을 건의하는 공장(供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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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심원준(沈元濬)의 여종 금복(金福)의 충정을 기린 비. 선조 심원준(沈元濬)의 효행과 함께 주인에게 정성을 다한 조선시대 충노의 행적을 알리고 기리기 위해 심붕황(沈鵬潢)·심걸황(沈杰潢)·심태황(沈泰潢)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금평로 779[박월동 87-2번지] 도로변에 위치한다. 전체 높이 105㎝, 너비 33.5㎝, 두께 6.5㎝ 크기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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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충노(忠奴)였던 문리동(文里同)의 비석. 문리동은 관노로서 임진왜란 당시 강릉부사 이광준(李光俊)을 모시고 전란을 피하여 헤매다가 양식이 떨어지자 흩어진 나락을 주워 연명하게 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을 다하여 부사를 섬겼다. 주민들이 충성을 다하여 주인을 섬긴 문리동의 행실을 갸륵히 여겨 비석을 세웠다. 현재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에 있었던 명주군청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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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 강원도 강릉시 명륜로 29[교2동 233]에 위치한 향교 앞 100m지점, 강릉명륜고등학교(江陵明倫高等學校) 후문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이 곳 주위는 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1610년에 세운 이래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받침돌 위에 높이 115㎝, 너비 40㎝, 두께 10.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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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시인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시비. 강릉 출신 난설헌 허초희[1563~1589]의 시인 「죽지사(竹枝詞)」 세 번 째 시를 돌에 새겨서 초당동 허난설헌 생가 터 입구에 세웠다. 한시 「죽지사」는 장정룡(張正龍)이 번역하였고, 조각은 최종림 작가의 작품이다. 허난설헌의 시 「죽지사」에는 ‘강릉’이라는 지명이 들어있는데, 난설헌이 어려서 이곳에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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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인 홍인국(洪仁國)의 묘비. 홍인국은 남양홍씨 시조 홍은열의 21세손으로 생원이었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산북리 묘소 인근에 묘제를 위한 전청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홍인국의 아버지는 홍충양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이다. 부인도 강릉김씨이다. 후손 홍재민(洪在珉) 등이 홍인국의 가계와 행적을 정리하여 세웠다. 건립시기는 병자년 윤3월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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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와 최수성(崔壽峸)을 배향한 화동서원의 묘정비.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蒙周) 선생과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사당의 묘정비이다. 구정(邱井) 개화(開華)의 동쪽에 있다 하여 화동서원(華東書院)이라고 하였고 묘정에 세운비석이라 화동서원 묘정비라 하였다. 후손인 최종만(崔鍾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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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교동의 화부산사 경내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업적을 기록한 비. 화산(花山)은 화부산(花浮山)을 말하며, 이곳에 사당을 짓고 기적비를 세운 데에서 유래하였다. 1910년 후손들이 김유신의 은택에 감사하며 김유신의 충정을 비석에 새겨서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비석은 1980년대 이전만 해도 큰 벚나무 밑 그늘진 곳에 있었다. 그 후 도로 옆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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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正公) 최수성(崔壽峸)의 묘정비. 최수성의 시호가 문정공인데서 유래하였다. 공의 부조묘(不祧廟)를 1920년 구황산사(舊篁山祠) 구내에 이건(移建)하였다. 1982년 황산사를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자 부조묘도 함께 옮기고 그 앞마당 왼쪽에 문정공의 묘정비를 세워 공의 업적을 기렸다. 강릉시 운정길21번길 27[운정동 440-2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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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부인 정곤(鄭鵾)의 처 강릉최씨의 정려. 최씨의 행동은 집안의 명예인 동시에 고을의 자랑이었으므로 후손들에게 훌륭한 조상을 기리고 또한 그 효성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강릉시 옥계면 현내2리 869번지 성재(城村)에 있다. 정렬각(旌烈閣)이라 이름 지어진 비각 안에 받침돌 위에 높이 110㎝, 두께 14㎝, 너비 35㎝의 몸돌을 세웠다. 전면비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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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곤(鄭鵾)의 처 강릉최씨(江陵崔氏)의 열녀각(烈女閣). 집에 큰불이 났을 때 시어머니는 미처 집에서 피해 나오지 못했다. 이때 최씨는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시어머니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부인은 시어머니를 껴안은 채 함께 죽었으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시신은 알아볼 수 없게 타버려 손에 낀 가락지로 식별하였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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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유천동에 있는 함성섭(咸聖燮)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효자 함성섭의 행적을 적어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1980년 강원대학교 최승순(崔承洵) 교수가 글을 짓고 전주 후인(後人) 최하용(崔夏鏞)이 글씨를 썼다. 강릉시 유천동 178-4번지에 있다. 비각 내 2단 머릿돌 위에 높이 153.5㎝, 너비 56.5㎝, 두께 2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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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金衡重)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 김형중은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1839년(헌종 3) 여름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김형중의 아버지도 전염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김형중은 아버지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간병하였으며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아버지에게 마시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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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복(南漢復)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 남한복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차츰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잃은 통한의 서러움에 복받치곤 하였다. 남한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들은 모두 아버지를 알지만 나는 모른다. 남들은 모두 아버지를 부를 줄 알지만 나는 모른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천지간(天地間)의 죄인이라 생각하였다. 이때부터 남한복은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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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억추(朴億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박억추는 충렬(忠烈) 박제상(朴堤上)의 후손으로 훈도(訓導) 박윤량(朴允良)의 아들이며 삼가(三可) 박수량(朴遂良)의 조카이다. 이 가문에서는 박수량과 사휴(四休) 박공달(朴公達)과 같은 효자들이 배출되었으며 박억추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효성이 지극하였다. 『삼강행실』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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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순(徐夏淳)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서하순은 경기도 이천 사람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간병에 피를 빨고 대변 맛을 보면서 지성으로 효행을 실천하였다. 추운 겨울에도 어머니가 생채를 먹고 싶어 하면 눈 속을 헤치고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나물을 캐어 봉양하였다. 임종을 당하여서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서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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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개(沈元漑)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 선조의 효행을 본받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심붕황(沈鵬潢), 심걸황(沈杰潢), 심태황(沈泰潢)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다. 강릉시 금평로 779[박월동 46통 3반 87-2번지] 옆 도로변에 있다. 전체 높이 105㎝, 너비 36.5㎝, 두께 6.8㎝ 크기로 비신은 청석(靑石)이다. 앞면의 비명은 ‘효자성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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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준(沈元濬)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 선조의 효행을 본받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심붕황(沈鵬潢), 심걸황(沈杰潢), 심태황(沈泰潢)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다. 강릉시 금평로 779[박월동 46통 3반 87-2번지] 옆 도로변에 있다. 전체 높이 107㎝, 너비 36.5㎝, 두께 7.5㎝ 크기로 비신은 청석(靑石)이다. 앞면의 비명에 '효자성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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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규(李東奎)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이동규의 아버지 이선빈(李善彬)은 풍수에 조예가 매우 깊었다. 어느 해 한 상가(喪家)의 묘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그 묘자리가 공교롭게도 그 상가의 종인 개산(介山)의 아버지 묘자리와 가까웠다. 그러자 개산(介山)은 이선빈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으며 이후 개산(介山)은 남몰래 이선빈을 독살하였다. 이동규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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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최기원(崔起元)은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사석(師席)이었으며 강릉 향현사에 배향된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스럽게 섬겼다. 최기원이 8살 때 부친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소생케 하고, 이러한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1608년(선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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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상(崔斗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최두상은 품성이 청렴하고 근실(勤實)하였으며 어버이를 지극히 공경하였다. 1706년(숙종 32) 어사 오명준(吳命峻)의 장계로 1707년 정려에 포상되었다. 강릉시 대전동 한밭 골말길 길 옆에 있다. 앞면의 비명은 '효자가선대부행용양위부호군최공두상정려비(孝子嘉善大夫行龍驤衛副護軍崔公斗相旌閭碑)'라고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