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55
한자 柳東說
영어공식명칭 Yu Dong-yeol
이칭/별칭 춘교(春郊),동열(東悅),동열(東烈),청송(靑松)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조은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 3월 26일연표보기 - 유동열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89년 - 유동열 일본 세이조 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02년 12월 - 유동열 일본 육군사관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04년 8월 - 유동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학도대 배치
활동 시기/일시 1905년 10월 - 유동열 대한제국 육군 기병 정위 진급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유동열 서우학회 평의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07년 4월 - 유동열 신민회 평의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유동열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18년 6월 - 유동열 연해주 한인사회당의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 유동열 ‘대한독립선언’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 유동열 상하이 임시정부 참모총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5월 - 유동열 이르쿠프크 고려군정의회 군정위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2년 8월 - 유동열 대한통군부 군정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4월 - 유동열 국민부 중앙위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2월 - 유동열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5년 7월 - 유동열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4월 - 유동열 조선혁명당 재건
활동 시기/일시 1937년 7월 - 유동열 상하이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유동열 한국광복군 참모총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6월 - 유동열 미군정 통위부장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50년 10월 18일연표보기 - 유동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9년연표보기 - 유동열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유동열 출생지 -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면 남부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총장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독립운동가.

[개설]

유동열(柳東說)[1879~1950]은 대한제국 시위대 기병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미군정청 통위부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겸 군인이다.

[가계]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면(博川面) 남부동(南部洞)에서 아버지 유종식(柳宗植)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활동 사항]

어린 시절 집안에서 전통 교육을 받다가 19세 때 10월 일본으로 가서 사관 예비학교 성격의 세이죠학교[成城學校]에서 3년간 군사교육을 받았다. 1902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 제15기생 기병과에 입학하여 1903년 11월 졸업 후 견습사관으로 일본군 근위사단 예하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904년 8월 귀국 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에 배치되었다가 1905년 10월 육군 기병 정위[대위]로 진급했다. 기병대 대장, 군무국 마정과장 등을 거쳤다. 1906년 기병대 대장 재직 중 서우학회(西友學會) 평의원으로 활동했고 1907년 4월 비밀결사인 신민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09년 10월 초순 중국 베이징[北京] 망명 후 1910년 4월 열린 청도회의에서 무장투쟁론을 지지했다. 만주 미산현[密山縣]에 사관학교 설립을 위해 군자금 모금 차 국내로 잠입했다가 1910년 10월 경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일명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2년간 투옥 중 1913년 무죄로 방면되어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성낙형(成樂馨), 박은식(朴殷植) 등과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가 다시 연해주로 가서 이동휘와 연계해 1918년 6월 한인사회당의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2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국내외 대표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에도 참여했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의 참모총장에 취임했다가 1년 반 만에 사퇴했으며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군정의회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22년 8월 대한통군부 군정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었지만 부임하지 않고 서간도에서 활동하며 3부 통합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29년 4월 국민부를 결성하면서 국민부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2월 창당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후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합류했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35년 7월 창당된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군사부장을 겸했다가 1937년 4월 탈당해 조선혁명당을 재건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계기로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해 7월 국무회의에서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9년 치장[綦江]에서 임시정부가 증설한 참모부장에 선임되었고 1940년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참모총장이자 통수부의 막료로서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하였다.

광복 후 1946년 6월 미군정 통위부장으로 임명되었고 6·25전쟁 발발 중 납북되어 북송 중 1950년 10월 18일 평안북도 희천의 어느 농가에서 사망했다.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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